20161103
자유의지를 실천한 정진영
무대 위의 갤주를 보고 생각한 것은 순수한 자유였다.
한 달이 지나버린 공연 후기를 뒤늦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 멋쩍다.
머릿속에 서식하고 있는 왕지우개가 나의 해마를 끊임없이 줘 패고 있어도 갤주의 마당극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잊을 수 없다.
강렬한 느낌이나 감동은 시간이 흘러도 생생해.
괴사된 것 같은 나의 신 피질과 고 피질에는 강렬하게 새겨진 기억이 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모 배우의 분장실에서 놀던 단편적인 추억이 있어.
꼬꼬마의 눈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어여쁜 왕비님이 날 번쩍 안아서 무릎에 앉히고 과자를 먹여주는데 그 때 먹은 과자의 이름도, 맛도, 그녀의 얼굴은 기억할 수 없어.
하지만 기억 속에서 아련하게 맴돌던 그녀의 향기는, 잊을 수가 없다.
과주를 주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의 품에 코를 묻고 맡았던 그 향기.
엄마냄새와는 또 다른 그 향기는, 태어나서 처음 맡아 본 ‘황홀한 냄새’였다.
수수한 모친에게 느낄 수 없었던 진한 분 냄새와 향수였겠지만 그녀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황홀했던 그 향기가 강렬한 자극의 흔적으로 내 머리에 새겨져 여전히 저장되어있다.
나에게 갤주의 공연이 그랬어.
방금 한 일도 까먹어 버릴 정도로, 나는 기억이 휘발되어 소실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갤주의 공연은 그런 걱정이 없겠다.
내가 싸는 글이 갤주를 향한 달보드레한 고백이나 개터지는 꿀잼 스토리는 아니더라도 지금부터기억의 필름을 돌려 볼게.
11월 3일, 마름 달 사흘.
갤주횽이 무대 위에서 첫 열연을 하신 공연을 보았을 때 눈물을 쏟았어.
눈물이란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흔적’이라고 하잖아? 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
내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표현’을 하지 못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상대방의 눈물이기도 한데, 몸의 고통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비통함을 더 견디지 못한다.
마당극의 극중 인물 ‘광대’역의 갤주는, 극의 이해를 돕는 해설자이자 활력을 불어넣어 관객들의 극 몰입을 증폭시켜주는 캐릭터였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게 만드는 역이 아니란 것이지.
그러한 갤주의 모습을 보며 울던 나를 누군가 보았다면 분명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되었을 듯.
(극의 시작을 알리는 ‘여는 마당‘ 부터 마지막 14마당을 장식하는 갤주의 열연 때까지 쉬지 않고 쳐 울어댔다는 건 아니고.)
집중해서 몰입하는 순간부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 떨어졌어.
1마당, 2마당...시간이 갈수록 심박동은 증가되고 눈앞은 흐릿해 지면서 태풍 셀마 보다도 더욱 강력한 무언가가 심장을 강타했어.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복부에서부터 내장을 훑어 올라 턱 끝까지 올라 왔을 때 난 숨을 멈춰야 했다.
헉하는 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야. 감격한 거겠지?
그런데 '20년 만에 무대에 선 갤주의 연극을 내가 보게 될 줄이야'라는 이유만은 아니었어.
감격과 뭔가 아릿아릿한 느낌까지 동반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대 위에서 생기와 생동감이 넘치다 못해 지니고 있는 숨결을 모두 토해내는 것 같은 저 사람, '20년 동안 연극 무대를 어찌 떠나 계실 수 있었을까? 아니 떠나 계셨던 분 맞나?' 라는 생각이 스쳤어.
내가 20년 만에 무대로 돌아 온 갤주를 보고 있는 것인지, 20년 전의 정진영을 머릿속에서 그려 상상 인물을 소환한 건가, 진정한 자유를 보여주고 있는 광대가 내 눈 앞에 실제하고 있는 것인가 알쏭이 달쏭이 하더라니까.
갤주의 연기를 눈앞에서 실제로 본 것이 이번 공연이 처음이고, 영화나 드라마 촬영현장에서도 갤주를 뵌 적이 없는데.
광대는 ‘낯설음’이 아닌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오히려 연극이 끝난 후, 내 앞을 서둘러 지나쳐가는 배우 정진영인 갤주가 낯설고, 광대보다 친근하지 않았으니까.
fantasy와 the fantastic과 의 차이를 따지는 나인데 그 순간, 시간이 멈췄어.
아니구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본래의 시간'은 아니야.
그래, 시간이 느릿느릿 해 진 것 같았어.
지극히 짧은 75분의 1초 동안, 갤주와는 반대로 생기 없는 나샛의 모습에 서글픈 생각도 들기도 했어.
통속적인 시간으로 계산 하여 본다면 매우 짧은 '찰나'인데 내가 느낀 그‘찰나의 느낌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 날의 나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25시간 같았어.
일상이 23시간인 것 같이 구멍난 시간이 있는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서글픔도 잠시 느꼈다고 했지만 내 눈물은 비통함의 눈물이 아니었어.
감동적인 순간에 흘린 눈물이지만 멈추려 애를 쓰면 쓸수록 눈물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무대 위를 제외한 곳은 더욱 캄캄해지고 그 환했던 무대도 갤주횽 보다는 밝지 않았다.
그 공연에서 갤주는 극이 ‘빛이 나도록 빛을 내게 해주는 극중 인물’이면서 동시에 본인도 ‘빛이 나는 배우’였어.
갤주의 모습은 정말 눈이 부셔서 갤주가 잃지 않은, 그에게 분명 간직되어 있는 강렬한 청년 진영의 젊음과 당당한 자신감, 순수한 자유를 보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젊으시고 자유로워 보이시지만 그 무대 위의 정진영은 내가 그동안 느껴왔던 것보다도 더 진심으로 멋지셨기 때문이야.
영원한 청년, 정.진영.ㅇㅇ
(내가그동안 뻘 글로 싸질렀던 갤주의 모습인 '천지가 개벽하고 우주 에너지를 뿜뿜 내 뿜으시더라'고 했던 그 아스트랄 한 차원의 표현이 아니다.)
갤주횽이 연기하실 때 진심, 진정으로 열연하는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 실제 눈앞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이 정도로 강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첫 날 공연이 지나고 지인들과 함께 관람하기로 한 다음 회 차들의 공연부터는 갤주횽의 연기를 보면서 울지 않았어.
그래도 첫 날의 벅찬 감동과 강렬함은 여전히 생생히 기억되고 이어져 정말 신명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매 연극 때마다 눈물이 났던 대사는, 꼬레아 공국의 통령인 빈선택의 대사였다.
순재할배의 열연 때는 콧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엉엉하고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콧물을 소매로 닦아서 소매가 하얗게 얼룩졌다.
‘심.양홍 선생님’의 빈선택의 열연 때도 마찬가지로 눈물이 났던 그 대사.
(공연 관람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메모했던 대사이고 한번 들은 대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내는 똑똑한 친구 덕에 완전하게 완성할 수 있었어.)
<7마당, 감옥 안에서의 회동-'무악재 감옥 안'에서>
빈통령이 노민오에게 말 한 대사이다. (노민오(로미오): 원작의 클.로디오)
“목숨이란, 한 줄기 숨결에 불과한 것. 육체는 잠시 머무는 거처,
삶은 어차피 죽음의 노리개에 불과한 것.
죽음을 피하려고 아무리 애써 본 들 결국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마련이지!
최선의 안식은 잠드는 것, 중생은 매일 잠을 청하면서도
잠에 불과한 죽음은 지극히 두려워하지.
삶과 죽음은 윤회라 매일 아침 해가 떠도 저녁이 되면 지고
매일 밤 달이 떠도 새벽이면 사라지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이와 똑같은 것, 인생은 일장춘몽!
잠이 깨고 나면 모두 부질없는 것.
그러니 목숨이라는 허울만 그럴듯한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무아미타불.......”이 부분이었다.
처음에 이 대사 들었을 때 진짜, 심장이 미친 듯이 나대는 거야.
거짓 쾌락 속에서 무위도식이나 하고 살던 난, 철학적 사고가 불가능하여 으스스한 불안감이나 느끼면서 심장은 쪼그라 들대로 작아졌었다.
일상의 감동들이 찾아 왔다 해도 쪼그라든 심장은 설레거나 뛰지 않았거든.
그런데 공연을 보는데 가슴이 미친 듯이 뛰더라고.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려.
그 당시 가슴에 손을 얹고 뛰는 것을 확인하지 않아도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어.
유통기간 지난 통조림 속에 고등어로 저며졌던 나 놈, 살아서 밖으로 튀어나온 느낌이야.
지금 살고 있는 것 맞고, 숨 쉬고 있는데 말이지.
현생 살면서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
그런데 공연을 보고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기쁘더라.
내 몸과 마음이 생기 없이 건조해져간다고 느끼던 차에 다시 무엇인가 중요한 걸 알게 된 느낌.
아무튼 나샛이 마당극 속의 광대를 보며 느낀 그 때의 기분을 한줄 요약을 하면
'마름 달, 사흘에 느꼈던 그 강렬하고도 아련했던 감동은 자유'였어.
내가 덕후 이기 때문에 느낀 감정들이었나? 하며 돌이켜 생각해 봤는데, 글쎄다. 덕심 때문만은 아닐 것 이다.
갤주횽의 덕후인, ‘진.횽’이 갤주를 존경하고 찬양하는 감정으로 느낀 것이 아닌 한 인간이 느낀 ‘소중한 것’ 이였음.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극에 몰입했던 관객으로 느끼는 모든 시간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그 걸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이 소중한 존재로 느껴질 정도‘로.
갤주횽 덕분에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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