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다시쓰는리뷰 : 타협할 수 없는 가치

이응(119.204) 2020.02.11 20:11:22
조회 471 추천 1 댓글 2




8
타협할 수 없는 가치




-여전히 섹시합니까? 수술실에서?


모연은 그 말을 당신은 여전히 그런 사람이죠, 라는 뜻으로 듣고 그렇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했지만 시진은 굳이 그런 뜻으로 물은 것이 아니었어.


그는 모연이 방송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예전처럼 수술에만 집중할 수는 없을 거라는 짐작도 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정의까지 꺼졌으리라곤 한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예전처럼 수술실에서 살진 않아도 그녀의 의사로서의 뜨거운 가슴은 여전히 그대로일 거라 시진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어.
실제로 그가 본 모연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어.


당장 그날 아침에도 자신의 믿음이 옳았음을 목격했어. 오전에 있었던 산악도로의 차량 사고가 바로 그것이었지.


그 사고에 대한 모연의 가장 첫 번째 물음은 다친 사람은 없는지 그것이었어.

그녀는 의사가 필요한 상황은 아닌지 그걸 가장 처음 물었고, 마땅한 도움을 주고 싶어 했어.

응급이 일상이라며 모연은 그 일상에 아직도 많이 익숙해보였지.


그가 보기에 모연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이었고 바른 의사였지.


그는 다만 그 대화를 주고받았던 첫 데이트 때처럼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던 거야. 모연의 변한 모습을 꼬집은 게 아니라.


그런 건 전혀 염두에 둔 물음이 아니었지.

근데 그 물음이 모연에게는 그녀의 변한 모습을 꼬집은 것과 같았던 거야.

너무도 변한 것 같은 자신을 시진이 알고 들춰내기라도 할까봐 자기가 먼저 고백했지.

난 이미 변한지 오래라고.


그녀가 아픈 만큼 시진 또한 그랬어.

이미 오래전 그를 떠난 그녀에게 다가가기엔 그에게도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그 어려웠던 고백을, 용기를 시진은 외면당한 거야.

그는 몹시 실망했고, 상처받았고, 자존심이 상했어.


두 사람은 말 한 마디 주고받지 못하고 조용히 중대로 돌아왔어.

그리고 그들 앞으로 쓰러진 아이를 안고 뛰어가는 치훈을 보았지.

둘은 이렇다 할 이야기 없이 치훈을 쫓았어.


치훈은 아이가 방금 전까지도 괜찮아 보이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어.


“영양실조 같아서 수액 달았어요. 소리는 정상이던데…….”
“폐렴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영양실조에 의한 단순빈혈이라기엔 상태가 너무 안 좋아. ……간과 비장 사이의 통증?”
“납중독은 어때요?”


아이의 병증에 대한 이런저런 케이스를 생각해보고 있는 모연의 사고가 급성 납중독까지 이르기 전에 현지 사정에 익숙한 시진이 먼저 답을 찾아냈어.

모연은 한 발 늦게 아이들이 고철을 물고 빨던 것을 떠올렸어.


모연은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해.

내가 이제는 하다하다 군인보다도 질환 진단을 못하는구나 싶어진 거야.
사실 이렇게 괴로워할 일이 아니야.

시간이 좀 더 필요했던 것뿐이지 그녀도 금방 답을 찾아냈을 텐데 그저 모연은 지금 자신에 대한 경멸감이 너무 커서 다 괴로울 뿐이야.

모연은 애써 덤덤한 척 치훈에게 오더를 주었어.


치훈이 자리를 뜨고 쓰러진 아이를 앞에 두고 둘만 남은 병실의 공기는 싸늘했어.


모연은 시진 앞에서 만큼은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부족함을 들켜버렸다는 게 더 창피스러웠어.

그런데 시진은 정작 이미 다 아무렇지 않아졌는지 혼자만 태연해보였지.


“깨어나면 알려줘요.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되니까.”


벌써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냉담해진 그 모습에 저 사람은 벌써 아까의 그 감정일랑은 다 정리해 넣었는데 나만 아직 휘둘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모연은 뾰족해졌어.

뒤돌아 나가려는 남자에게 모연이 사무적으로 말했어.


“도와주신 건 감사합니다. 근데 앞으로 의료팀 일은 의료팀이 알아서,”
“고마운 건 그냥 고마운 겁니다.”


시진에게 모연의 말은 앞으로 내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말로밖엔 들리지 않아.

충분히 받아 넘길 수 있는 도움도 내가 주는 건 덮어놓고 싫다는 건가 싶어 시진은 화가 났어.

거절당한 상처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 번 가슴을 베어내는 그 말에 시진은 결국 아프다는 표시를 냈어.


“생명은 존엄하고 그걸 넘어선 가치는 없다면서요. 전에 봤던 강선생이랑은 거리가 너무 먼 거 같다는 뜻입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지.

더 아프지 않기 위해 택한 시진의 방법은 상대의 아픈 곳을 들추어내는 거였어.


지금은 당신이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라고.

서로 협조해야할 일이 있다면 얼굴을 보기 불편하더라도 그건 제쳐둬야 하는 문제라고.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던 예전에 당신이 한 그 말에 책임을 지라고.


모연이 이 이상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어두려 했던 선을 시진은 당신의 자존심이 생명의 존엄함보다 중요하냐며 비웃고, 거듭 아프게 꼬집었어.

결코 틀리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말은 너무 적나라했고 냉혹했고 잔인했지.

상처받은 남자의 고통스러운 신음은 그렇게 공격적으로 표출됐어.


“영영실조로 인한 빈혈, 납중독 같은 증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만나기 힘든 질병이에요.”
“이 나라에서는 감기만큼 흔한 질병입니다. 만나기 힘든 질병이라도 알고 있는 의사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


모연이 입술을 단단히 사리물고 한 보잘 것 없는 변명도 시진은 받아 넘겨주지 않았어.

방금 자신의 진심을 차갑게 거절당하고 상심한 남자가 이성적이면 얼마나 이성적이겠어.

아무리 태연한 척 굴어도 그건 겉모습일 뿐이지 그 속은 여전히 아프고 쓰릴 수밖에.


남자는 제 상처를 감추느라 가시를 내뱉었어.


“물론 그렇겠죠. 근데, 이 세상 모든 의사가 슈바이처는 아니거든요.”
“그쵸. 방송하는 의사도 있어야죠.”
“…….”


모연의 말문이 막혔어.

뱉은 말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의 지난 시간에 한 번, 그걸 되짚으며 그녀를 질책하는 시진의 말에 또 한 번…….

모연은 거듭 상처 받았어.

예전의 그 정의를 잃어버린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고, 그것을 질책하는 시진이 원망스러웠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창백하게 질려버린 그녀의 안색에도 아랑곳없이 시진은 차갑게 그 자리를 벗어났어.

그 냉혹한 뒷모습에 모연은 그보다 자신이 더 미웠어.

멈출 때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엇나가기만 한 자신의 어리고 어리석은 오기가, 자격지심이 너무도 싫어서 눈물이 나.


* * *


병실을 나와 계단을 오르는 시진의 발걸음이 점점 느릿해지더니 결국 중간에 멈추어 서서 한숨을 내뱉었어.

시진은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모연의 아픈 곳을 건드리며 상처 준 자신의 경솔함이 후회스러워.


그렇게 쉽게 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여전히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라는 걸 보았으면서도 순간의 분노를 못 참아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모연에게 지독한 상처를 주고 만 자신이 싫어져.

그녀의 하얗게 질리던 낯빛이 떠오르고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어.


하지만 두 사람은 사과도 화해도 시간을 두고 할 수가 없었어.

일은 그들이 후회를 곱씹기도 전에 터져버렸지.


대한민국과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교류를 맺고 있는 아랍 의장이 급하게 의사가 필요해서 메디큐브로 오고 있었어.

국빈 수준의 VIP이기에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지.


총과 탄창으로 가득채운 차림의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둘러싼 가운데 의료팀들과 함께 환자를 기다리는 모연에게 팩스로 전송되어 온 차트를 들고 다가온 시진이 머뭇대며 그걸 건넸어.


“……VIP 주치의가 보낸 VIP 병력기록입니다.”
“네.”


거의 뺏다시피 차갑게 그의 손에서 차트를 받아 쥔 모연은 시진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어.

아주 냉랭한 분위기의 그녀에게 시진은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때가 너무 안 좋았지. 이미 큰일은 터졌고 그 일부터 수습하기 위해 그는 일단 사무적으로 모연을 대했어.


“뭐냐 이게? 이렇게 다 가려놓고 뭘 보고 어쩌라는 거냐?”


모연 주위에 우르르 몰려선 동료 의사들이 한 마디씩 했어.

온통 까맣게 칠해진 차트는 읽을 것도 몇 줄 없었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의사는 이곳에 모연뿐이었어.


“VIP들 차트에는 어차피 진실보단 거짓이 많아요.”
“환자들 차트에 거짓기록을 한다고요? 어떤 미친 의사가 그래요?”
“나 같은 의사?”
“…….”
“가난한 사람들에게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VIP들에겐 또 특별한 의사가 필요하거든. VIP에게 메디컬 히스토리는 곧 약점이니까. 그래서 대통령의 건강상태는 국가 기밀인 거고.”


상현은 같은 의사로서 무슨 뜻인지 알만 하다는 반응을 보였어.

모연이 VIP들을 상대하는 의사라는 것을 아는 주변 반응도 대부분 비슷했지.


“…….”


딱 한 명, 시진에게만 모연의 말이 단순한 차트 설명이 아니라는 게 느껴질 뿐이었어.


그녀의 말은 마치 항변과도 같았어.


내가 지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슈바이처는 못되어도 나 같은 의사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의사예요.

내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해서 의사가 아니게 된 건 아니라고요.


모연은 그렇게 시진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뼈아픈 원망의 말을 내뱉었어.

그녀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걸 느낀 시진도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그는 말없이 바라볼 뿐이야.


쓰린 속으로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에게 헤드라이트가 비추고 응급차가 들어왔어.


당장 환자가 죽어가고 있는 앞, 모연은 의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어.

수술실 안에는 환자측 무장경호팀과, 의료팀 경호를 위한 시진을 비롯한 알파팀 전원이 들어와 진료 과정을 지켜보았어.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진료 분위기에 의료팀은 잔뜩 긴장했지만 그들은 총 든 남자들을 애써 외면한 채로 진료를 보았어.

그러던 도중 환자 측 경호원이 앞으로 나서서 모연에게 약병 하나를 건넸어.


“니트로글리세린?”


차트에 적힌 당뇨와 환자에게 나타난 저혈당 증세를 종합해보면 말이 안 되는 약물이었지만 모연은 이내 납득했어.

이 환자는 차트를 가리는 것으로 모자라 질환에 대한 위장기록까지 해야 하는 환자였던 거야.


“이 환자 당뇨고 인슐린 부작용 아니에요?”
“차트 믿을 거 없다고 했잖아. 진단과 증상을 바꾸면 말이 돼.”


환자의 주치의는 참으로 의심 많은 사람인 것 같았어.

당장 환자가 응급한데도 그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모연에게 모든 걸 공개하고 협조할 마음이 없어 보였지.

주치의는 치료과정 내내 이런 식의 일방적인 방식을 고집할 생각인 것 같았어.


모연은 주치의의 비협조가 안타까웠지만 굳이 그를 책망하진 않아.

어쨌든 이렇게라도 하나하나 해결이 가능하다면 다행인 거니까.


하지만 주치의의 그런 안일한 방식은 결국 한계에 부딪혔어.


“혈압이 갑자기 너무 떨어져요!”
“수액 full drop 해주세요!”


순식간에 모니터가 붉게 껌뻑거리고 경고음이 울렸어.

이 환자의 몸은 심장문제가 다가 아니었던 거야.

주치의의 불신이고 비협조고 간에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어.


“일단 열어봐야 알 거 같아요. 개복수술 합니다. 수술실 준비해주세요.”


몸 밖에서 약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했어.

이제는 배를 열고 직접 출혈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어.


부담스러운 상황임에도 의료팀이 모연의 지시에 따라 수술을 준비하려는데, 그때 환자 측 경호팀장이 위협적으로 그들을 막아섰어.


“/손 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수술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한 시간 안에 주치의가 이곳에 도착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한 시간 못 버텨요.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20분도 못 버팁니다./”
“/아랍의 지도자 몸에 아무나 칼을 댈 수 없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20분 안에 수술 안 하면 이 환자 죽는다구요!/”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아무나’ 같은 소리나 답답하게 늘어놓는 경호팀장에게 모연은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했어.

지금은 이 사람이 아랍의 지도자이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환자가 운명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위험성까지도 언급했지만 그 말에 오히려 자극을 받았는지 경호팀장이 순식간에 총을 꺼내들었어.


철컥대는 소리와 동시에 경호팀장의 총이 모연에게 겨누어졌어.


“/손 뗍니다! 무바라트 의장님 수술은 오직 우리 아랍 의사만 할 수 있습니다./”


모연을 향해 바로 들이댄 하나의 총구.

양복 가슴 안쪽으로 반쯤 들어가 있는 손들 여럿.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어.

내 명령을 무시하고 강행했다간 바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겠다는 협박.


일순간에 전투태세에 돌입하고 경호팀장에게 맞서 총을 겨누려는 휘하 알파팀을 저지한 것은 시진이었어.


총은 뽑기는 쉬워도 도로 꽂아 넣긴 무척 어려운 물건이라는 걸 그는 아주 잘 알아.

지금 상황에 알파팀까지 총을 빼들면 상황은 더는 돌이킬 수 없어져.


일촉즉발의 공포에 굳은 의료팀과 시진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알파팀.

그리고 여전히 모연을 향해 있는 총구.

그녀 앞을 이미 반쯤 막아선 시진의 등.


그 너머로 모연은 당장이라도 발포할 것 같은 아랍인에게 최대한 이성적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이야기했어.


“/알겠어요. 난 세계사를 책임질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 손 떼면, 이 환자는 죽습니다./”


현재 이 환자의 보호자와 다름없는 경호팀장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통고. 보호자에게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고지해야할 의사의 의무.


이것을 듣고도 보호자가 환자의 수술을 원하지 않으면 의사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런 상황은 그녀에게도 처음이 아니야.


모연의 8년간의 의사 생활동안 보호자 혹은 환자 본인이 의사의 치료 방법을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경우는 많았어.

입원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이 퇴원조치 해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환자가 자택에서 위급상황에 빠져서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면서 사망하거나 심각한 중태에 빠진 상황도 있었고, 또 약물치료가 아닌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의사가 돈 벌고 싶어서 환자 등골 빼먹는다고 수술 안 받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사망하는 일도 있었어.


그렇게 보호자 혹은 환자 본인이 치료를 거부할 때에는 그들을 계속해서 설득하는 것 말고는 의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런 일은 부지기수였지.

그런 것을 익히 겪어온 모연에게 무바라트 의장 측의 수술 거부는 그 자체로는 크게 당황스러운 상황은 아니었어.


문제는 보호자가 들고 있는 물건이 총이라는 것.


환자의 바이탈이 심하게 요동치고 모니터의 알람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는 가운데, 알파팀의 귀에 꽂힌 무전으로 대대장 박병수의 목소리가 들어왔어.


+잘 들어. 지금 죽냐 사냐가 문제가 아니야.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게 포인트야. 아랍 애들 하자는 대로 해줘. 그래서 환자 죽으면, 그건 수술 안 한 의사 개인의 과실로 책임 돌리면 돼. 우리 군은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명령이야.+


시진은 귀를 의심했어.


지금껏 무전은 이곳의 모든 소리가 넘어가는 송신상태였어.

박병수는 분명 수술을 강력하게 권하는 모연의 말을 들었고, 그것을 거부하는 아랍 경호팀장의 말도 들었다는 뜻이지.

그것을 다 들어놓고도 박병수는 이후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대한민국 군은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을 거라고 못 박은 거야.


아니, 오히려 마땅히 자신의 의무를 다했던 의사를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이후 곤란해질 수 있는 상황을 모면하기로 결정한 거였지.


이대로 두면 무바라트 의장은 죽을 게 분명하고, 그럼 군은 의사인 모연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채 뒷짐 지고 관망만 할 거라는 게 시진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보였어.


거물 정치인의 죽음은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누군가 책임질 사람을 필요로 하겠지.

그 상황에서 가장 물어뜯기 좋고 편한 그 누군가는 당시 담당 의사가 될 거야.

그 의사가 얼굴이 알려진 공인이라면 훨씬 더 맛좋은 먹잇감이 되겠지.


모연과 함께 그 상황 속에 있던 의료팀의 증언도 모연에게 외교문제를 일으킨 죄를 묻는 대중들의 무수한 비난 속에선 아무 소용없을 거고, 그렇게 모연은 어떤 보호 장치조차 없이 황색저널에 내던져져 방향이 틀린 비난에 시달리고, 재판장에 불려 다니며 인생을 망가뜨리게 될 것이 분명했어.


박병수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한 사람을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버리라는, 살인과도 같은 명령을 내리고 있었던 거야.


시진은 대영과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어.

대영은 이미 상관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어.


시진은 적어도 모연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그저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기로 결정했어.

책임자를 의사 한 명에게서 군인 한 명으로 돌려놓기로…….


“……이 환자 살릴 수 있습니까?”
“네? 확실한 건 열어봐야 알겠지만,”
“복잡한 얘긴 됐고, 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해요. 의사로서.”


+너 이 새끼 지금 뭐하는 거야!!+


“대답해요!”


모연은 필사적으로 생각했어.


이제까지의 수술 경험, 메스를 놓고 있던 시간,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수술, 대처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모든 변수들…….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할 때 두 개의 선택지 중에 고를 답은 없었어.


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하라고?

생명이 살고 죽는 게 의사의 능력으로만 되는 일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장담해!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어.

그 선택지 중엔 내가 할 수 있는 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오만가지의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만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어.


살리려는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잖아.

어떻게 아무 것도 안 해보고 그대로 죽여?

그럼 살인이랑 다를 게 뭐야.

그건 나 스스로 포기하는 거잖아.
살릴 수 있어. 살릴 거야. ‘내’가 살릴 거라고.


“……살릴 수 있어요.”
“그럼 살려요.”


구역질나는 명령이 흘러나오는 무전을 꺼버리고 시진은 총을 뽑아들며 모연을 아랍인의 총구 앞에서 완전히 막아섰어.


그의 눈빛은 이미 굳어졌어.

그는 모연이 설령 무바라트를 살리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수술을 시도해볼 수는 있게 해주기로 했어.

이후 벌어질 끔찍한 일들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아무것도 못해보고 모연을 그 상황 속으로 내던질 수는 없으니까.


모연은 자신을 가려놓고서 대신 총구 앞에 선 남자의 등을 보게 된 이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러워.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가 자신의 수술을 돕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어.

이런 위험한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이 남자가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 짐작도 못하겠어.


하지만 그 모든 의문은 당장은 접어두어야 해.

지금은 시진이 뽑아 든 총의 힘을 빌려서라도 수술을 해야 할 때야.


“베드, 수술실로 옮깁니다.”
“/물러 서! 마지막 경고다./”
“지금부터 의료진과 환자보호가 우리의 제 1임무다. 전 팀원, 총구 앞에 정렬.”


마침내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알파팀은 일사불란하게 방어선을 만들었어.

항상 그래왔듯 무력을 가지지 못한 무고한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전쟁터에서 군인들은 총을 들었어.


“이 시간 이후, 이를 위협하는 누구에게든 대응사격을 허가한다."
“/이봐, 캡틴. 당신 지금 무슨 짓을 벌이는 건지 알고 이러는 거야?/”
“/당신은 당신이 지켜야할 것을 지켜. 의사는 환자를 살리고, 우린 우리가 지킬 것을 지킨다./”


시진에게 무바라트 의장의 생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그의 생명을 살리겠다고 지금 총을 든 게 아니야.

다만 지금 그가 지키고 싶은 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선과 모연의 평안이야.

누군가의 인생이 망가질 것이 뻔한 상황을 모른 척 하지 않는 용기를 그는 갖고 있고, 그리고 그 누군가가 모연이라면 더욱 그는 망설이지 않아.


시진은 이후 벌어질 모든 상황들 속에서 책임자는 자신 혼자만이길 원해.

그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 알파팀도,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수술을 했을 뿐인 의료팀도 모두 그의 등 뒤로 놓고, 시진은 그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질 생각이야.


그의 명예. 그의 영광. 그의 사명감.


그 모든 것을 걸고 시진은 지금 현재 지켜야할 것을 지키기로 했어.

군인으로서의 빅보스가 입은 군복의 의미란 그런 거고, 개인으로서의 유시진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도 이곳에 있으니까.


그리고 그 어떤 이유보다도 그가 지금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이 저 수술실 안에 있기에 시진은 총을 들었어.


* * *


만약 시진에게 모연을 수술실에 들여보내는 것 말고 그녀를 지킬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가 굳이 수술을 강행했을까?


아니. 그건 결단코 아니.

그가 경호팀장을 막아선 건 무바라트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시진은 자신이 결코 이상적이라거나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그는 때로는 현실과 타협을 하기도 하지.


시진은 군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옳지만은 않은 명령도 수행해 왔어.

만약 그가 어떤 부분에서도 부당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으며, 오로지 완벽히 선하기만 한 명령만을 따르려 했다면 그는 지금까지 군인으로 남아 있을 수도 없었어.


당장 오늘 오전 본진에서 받은 명령만 해도 그랬어.

박병수는 무기밀매 문제가 어느 선까지 엮였을지 모르니 들쑤시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했어.

그 놈들의 뒤를 봐주는 누군가가 우리 군이 어쩔 수 없는 수준의 거물일 수도 있다며, 빈대 하나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지 말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애초부터 벌리지 말자는 말이었지.


이것이 과연 완벽히 옳은 명령이요, 옳은 복종이었을까?

시진이 만약 휘어지느니 부러지겠다는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면 이미 이때 한바탕 뒤집어엎었을 거야.

아니, 이미 오래 전에 그와 유사한 다른 명령에 불복했겠지.

아니면 벌써 한참 전 육사시절에 못 견디고 제 발로 학교를 나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시진은 그 명령에 수긍했고 복종했어.

그는 조국의 힘이 우르크의 모든 부정부패를 완전히 쓸어낼 만큼이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평화 재건하러 온 딴 나라의 파병부대가 남의 나라 일에 끼어드는 것도 어느 정도지 그 이상은 월권이라는 것을 시진도 익히 잘 알고 있었어.


마찬가지로 무바라트 의장 수술도 그렇게 군의 명령을 따를 수도 있었어.

인종, 종교, 신념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911테러처럼 수천 명의 목숨도 서슴지 않고 살해하고 자신의 몸에 자살폭탄을 매고 적진으로 뛰어들게도 하는 끔찍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걸 그는 닳고 닳도록 보았으니까.


굳이 아랍 측의 거부 의사를 거스르면서까지 그가 나서서 무바라트의 생명을 구해주려 할 이유가 없었어.

거기다 군에서까지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그에 못 따를 것도 없었지.


수술 시기를 놓친 무바라트는 죽었겠지만 그건 자기네들의 신념과 사상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 크게 애석해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는 군인이지 의사가 아니니까.


이런저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모연 또한 보호자가 수술을 극구 거부하는 상황에서 수술을 강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


그렇게 시진이 그냥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수 있는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그를 불복하게 했던 건 박병수가 했던 말 한 마디였어.


‘의사 개인의 과실로 책임 돌리면 돼.’


모연을 총알받이로 쓰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그 말에 시진은 총을 든 거야.

한 사람의 인생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상황을 쉽게 마무리하겠다는 비열하고 잔인무도한 명령.

기꺼이 할 수 있고 한다고 해서 조국에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일까지도 간단하고 빠른 마무리를 위해서 하지 않겠다는 그 졸렬하기 그지없는 결정.

그 결정에 시진은 반기를 들었어.


만약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이 저들이 수술받기 싫다는데 어쩌겠느냐, 상황 녹음 다 됐으니까 그냥 넘겨주고 말자, 였다면 시진도 그냥 그 명령을 따랐을 거야.

그 결과로 무바라트가 죽고 그 문제가 심각해져 개인 문제를 넘어 국가 간 분쟁까지 되더라도 지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을 얻었으니까.


명분은 충분했어.

해성병원 의료팀 측은 살리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했지만 아랍 측의 반대가 강경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명분과 그것을 증명하는 군의 상황녹취록, 의료적 증거들,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까지 있었어.


군이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해준다면 헛소리를 해댈 아랍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거지.

그럼 국가도 군도 해성병원 의료팀도, 그리고 그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모연의 인생까지도 아무 문제 없을 수 있었어.


그런데 박병수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거야.

그 윗선까지 가기도 전에 박병수부터 그렇게 결정해버렸어.

그래서 시진은 이 명령에 따를 수 없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대로 가면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처참해질지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한 사람의 인생을 위해 이 중대에 있는 더 많은 목숨, 더 많은 생명들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그는 꼭 그래야만 했을까?

도대체 왜?

유시진의 결단은 정말 무모했던 걸까?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의사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의장 경호팀장의 그 극단적인 행동은 시늉이 아니었어.

그는 충분히 의사를 쏘아 죽이고도 남을 인사였지.


경호팀장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어.

정확히는 그러지 못하게 만든 이유 한 가지와 그러지 않게 한 이유 한 가지였지.


첫 번째는 경호팀장 본인이 가진 병력으로 이 중대 내의 무장 군인들 모두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저 이름도 모르는 여의사가 정말로 그의 주인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혹시나 하는 기대.

물론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에 비할 수 없이 작았지만.


만약 아랍 경호팀장에게 시진을 위시한 알파팀과 메디큐브 바깥에 포진 중인 무장군인들 수십을 제압할 병력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협박을 협박으로만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가 의사에게 가진 기대란 자신의 신념과 주군의 목숨을 걸만큼 크지 않았으니까.


그가 결국 발포명령을 내리지 못한 건 그를 막아선 시진을 제압할 수 없는 상황과 주인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본인 손으로 놓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로 인한 작은 망설임 때문이었어.


시진은 그걸 노린 거였어.

그가 막아선 이상 무바라트의 경호팀장이 승산 없는 싸움을 당장 하려 들지는 않을 거라고 계산한 거지.


하지만 이것도 지금 당장의 임시방편에 불과한 방어책일 뿐이야.

만약 수술했음에도 아랍 의장이 죽는다면 그 죽음의 이유가 수술의 성패와 관계없다 해도 주인을 잃은 아랍인은 분노할 거야.

그리고 그 분노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겠지.


그렇다 해도 당연히 경호팀 전부를 제압할 수는 있어.

중대 내에 무장군인이 몇인데 경호팀 다섯을 제압 못하겠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올지 모를 일이야.

군인들뿐만 아니라 의료팀 중에도 사상자가 나올 수 있지.


그 위험을 생각한다면 시진의 명령은 납득할 수 없는 무모한 구석이 있었어.

차라리 아랍의 요구를 들어 주는 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쉬운 길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진은 총을 꺼내들었고 무바라트를 모연에게 맡겼어.


박병수의 그 비겁한 결정으로 희생될 인생이 모연의 것이 아니었다면 시진이 과연 중대 내의 모두가 목숨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아니.

그렇진 않았을 거야.

한참의 후의 이야기지만 후에 사령관이 내린 아구스에 대한 명령에 시진이 복종했던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있지.


‘이번 작전은 정의가 아니라 정치야.’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을 인신매매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구스가 그 이용가치를 다하기 전까진 그가 어떤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모르는 척하라는 사령관의 명령은 어떻게 보면 눈앞에 당장 스러져갈 목숨들을 외면하라는 뜻이었어.

아무리 더 많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분명 그 과정에서 외면 받는 목숨들 여럿이 있었지.

돈에 미친 괴물에게 희생당할 이유가 없는 무고한 목숨들…….


시진은 그 명령에 큰 회한을 느꼈지만 결국에는 따랐어.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여러 방법을 취한다는 점에서 군인은 오로지 생명유지, 생명연장의 목표만을 추구하는 의사와는 또 다른 직업이었으니까.


시진은 그렇게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희생될 목숨들 몇을 외면해야하기도 했어.

그들을 구하고 싶었고 구할 수 있었지만 사령관은 명령이라며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지.


그 이후에 일어났을 일들이 지금과 그 경우가 과연 다르다고 할 수 있나?


의사에게 책임을 지우라는 명령을 내린 대대장의 의도는 ‘문제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옜다 뜯어먹어라 의사 한 명 던져주고 말아!’였지만 그의 그 수치도 모르는 의도는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한다면 모우루 중대의 당장의 안전 또한 도모할 수 있었어.


무바라트의 신병을 아랍 쪽에 넘기면 아랍인들의 총은 도로 양복 안으로 들어갈 테고, 그럼 군인들도 의료팀도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의사 한 명의 멀쩡한 인생을 희생시키고, 한 노인의 목숨을 포기한다면 수십 목숨의 안전을 쉽게도 얻어낼 수 있었어.

그건 사령관의 명령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아구스를 이용 중인 동안에는 그 어떤 마찰도 피해달라는 협조 요청이야.’


아구스의 악행에 희생당할 사람들 몇을 외면하기만 한다면 우르크에 안정된 정권을 세우고, 나아가 나라의 평화를 얻어낼 수 있었어.


두 명을 포기하여 얻는 수십 명의 안전과 기십 명 외면해서 얻어낼 나라의 평화.

두 가지 문제는 작은 것을 희생하여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선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았어.


아니, 과정에서는 뭐가 다른가?

박병수의 명령을 인해 희생되는 모연은 무고하고 아구스의 악행에 희생되는 아이들은 죄가 있었나?


두 가지 문제에는 모두 무고한 사람의 희생이 조건이었어.

하지만 시진은 박병수의 명령에는 불복하고 사령관의 명령에는 복종했지.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잘 아는 사람이 희생당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불복하고, 모르는 사람의 희생은 괜찮아서 복종한 건가?

그것도 답이 될 수 없어.


시진은 대영에게 내려진 부당한 전출명령에도 반발하지 않았어.

대영에 대한 사령관의 부당함은 매번 있어왔던 일이었고, 매번 속상했지만 그렇더라도 그 명령에 이제까지 그는 단 한 번의 반발도 한 적이 없었어.

그 말은 결코 시진이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명령을 가려 받는 군인은 아니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답은 뭘까?


때로는 무고한 사람들을 외면하기도 하는 유시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시진이 대대장의 명령에 죽어도 따를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명령에 희생양으로 낙점된 의사가 강모연이었기 때문이야.

상현도, 치훈도, 그 누구도 아닌, ‘매일같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수술실에서 열두 시간도 넘게 보내는’ 강모연이기에 시진은 믿었던 거지.


그 희생양이 모연이 아닌 다른 의사였다면 시진은 부하들에게 총을 들리지도, 수술실 앞을 막아서게 만들지도 않았어.

비겁하고 부당한 명령이라는 건 알지만 일단은 따른 후에 대대장을 설득하고 사령관을 설득해서 아랍 측의 수술 거부 사실을 밝히는 식의 사후 대책을 마련했겠지.


그녀가 아닌 다른 의사였다면 그랬을 거야.

믿을 수 없었으니까.

실력을 믿을 수 없는 의사의 수술에 그 자신과 팀원들의 사활을 걸 순 없는 일이잖아.


하지만 시진은 총을 들었고 알파팀으로 하여금 경호팀을 저지하게 했어.

그리고 모연에게 무바라트를 맡겨 수술실에 들여보냈지.


그녀의 실력을 믿은 거야. 그녀라면 반드시 무바라트를 살려낼 거라고.


수술실에서 열두 시간도 넘게 보낸다던 사람이라면 잠시 수술실을 떠났었다 해도 잘 해낼 거라 믿었고, 생명의 존엄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살릴 수 있다는 장담을 함부로 하지도 않을 거라고 그는 생각한 거야.

모연이라면 이 모든 상황을 희망적으로 바꾸어 줄 수 있으리라 믿었어.


그래서 시진은 모연을 구하고 동시에 그녀를 통해 무바라트도 살려보기로 한 거야.

무바라트는 모연에게 맡겨놓고 그와 전우들은 그녀를 포함한 의료팀 전부를 보호한다면 누구 하나 희생시키지 않고 모두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단, 수술의 성패와 무관하게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한 딱 한 사람의 책임자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그게 시진의 선택이었어.

딱 한 사람, 자신의 안위만을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모두의 평화.


그 순간, 그 열악한 조건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계산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결론은 그것뿐이었어.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고 그럼으로써 의사의 인생을 구할 수 있었어.

동시에 그것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킴으로써 군인들의 명예와 영광과 사명감을 지키고, 나아가 비무장의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보호할 수 있는 결정이었어.

최선이었지.


시진의 결정은 분명 위험을 감수해야 하긴 했지만 결코 불필요하지도, 무모하지도 않았어.


시진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안위, 탄탄대로 인생을 포기한 거야.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어.

그 결과로 지켜지는 것들은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전부 포함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믿는 선(善)을 지키고, 사람을 구하고,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지켜지길 바랐던 것, 모연의 평화가 그 안에 있었어.


시진에게 있어 모연의 안전과 평안은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여지없는 마지막 보루(堡壘)야.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고 후퇴하다가도 절대 더 이상은 물러날 수 없는 마지노선.


밟고 선 땅에 다리를 박고, 더는 퇴각하지 않을 최후 방어선이자 최후의 성채.

그 성마저 함락되고 내어주게 되면 그냥 끝,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겠지.

망국(亡國)의 백성이 되는 거야.


시진의 인생은 이전까진 조국 외엔 지켜야할 보루 따윈 없었어.

그는 그 자신조차도 조국에게 온전히 내주었으니까.


시진은 조국의 명령을 수행하며 자신의 청춘을 바치고 목숨을 걸었어.

자신이 죽은 뒤에 명예도 찾아주지 않을 조국의 명령을 따르는 데에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이제까지 시진은 그렇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조국을 우선하며 살아왔어.

그의 마음속 저울 한 쪽에 조국을 올려놓으면 그 반대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올려놔도 조국의 무게를 넘을 수는 없었어.

그러했기에 그는 군인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이제 그의 저울에 오를 수조차 없는 대상이 나타났어.

저울에 올려놓고 조국보다 더 무겁고 조국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기는커녕 애당초 저울에 올려놓을 수도 없는 사람이 생긴 거야.


시진의 저울에 모연은 논외의 대상이야.

이것이 더 중요해 아니, 저것이 더 중요해, 하며 재어보고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거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저마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어.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목숨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와 신념이고, 그 외에도 돈, 명예, 자존심, 부모, 자식, 연인 등등 저마다들 다르겠지.

그게 유시진에게는 강모연인 거야.


유시진의 인생에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야 하는 사람. 그 어느 것과도 그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는 사람.


유시진은 강모연을 조국의 명령 때문에 놓아버릴 순 없어.

그는 이미 각오했어.

만에 하나 모연이 설령 무바라트를 살리지 못한다 해도 그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실패한 수술을 강행한 것이 그인 이상 그 책임은 시진이 바라던 대로 이곳의 사람들 모두를 제외한 오로지 그 혼자 지게 될 테니까.

그는 그것만으로도 타협하지 않은 것을 잘한 결정이라 기억할 거야.





이어지는 글 : 각자가 해야 할 몫

수정 전 : 타협할 수 없는 가치




추천 비추천

1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경제관념 부족해서 돈 막 쓸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5/13 - -
공지 ●☆●☆●☆● 태양의 후예 갤러리 통합공지 ●☆●☆●☆● [30] 태양의후예(112.161) 16.10.18 9352 86
공지 ●☆●☆●☆● 태양의 후예 갤러리 단어장 ●☆●☆●☆● [33] 태양의후예(115.23) 16.07.20 15831 85
공지 ●☆●☆●☆● 태양의 후예 갤러리 가이드 ●☆●☆●☆● [35] 태양의후예(115.23) 16.07.18 13051 104
공지 태양의 후예 갤러리 이용 안내 [6] 운영자 16.03.02 32886 28
383026 2016년으로 태갤러(114.206) 05.10 20 0
383025 그립다 태갤러(115.136) 05.09 39 0
383024 오늘 태후 생각나서 왔오 [1] ㅇㅇ(211.234) 04.07 133 1
383023 Dvd [1] 태갤러(120.142) 03.10 185 1
383020 메리 크리스마스 포로리들 [2] (222.109) 23.12.23 315 9
383019 내남편을 드립니다. 두아내 ㄷㄷㄷㄷ [1] 00(175.195) 23.12.01 340 0
383018 송중기 근황 ㄷㄷㄷ [1] 00(175.195) 23.12.01 502 1
383003 레전드 드라마 ㅇㅇ(58.234) 23.10.18 264 3
383002 늦었지만 [2] (59.6) 23.09.30 378 3
383001 ㅡㅡㅡ 태갤러(49.165) 23.09.23 202 0
382999 dd 태갤러(175.210) 23.08.09 262 0
38299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ㅇ(118.235) 23.07.17 16522 0
382995 유튜브 알고리즘이 또 정주행 하게 했다 ㅇㅇ(210.94) 23.07.16 302 0
382994 1차 기습시위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6.15 18098 0
382993 잘지내니? [6] ㅁㅈㅁㅍㄹ(221.142) 23.05.04 686 1
382964 그냥 2016년이 마렵네.. [3] ㅇㅇ(59.16) 23.02.24 831 3
382962 유튭에 클립 하나 떴길래 봤다가 정주행 또함ㅋㅋㅋㅋ ㅇㅇ(112.153) 23.02.06 458 1
382960 태후가 망작이고 졸작인 이유 오스트리아헝가리이중제국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1.26 896 8
382959 새해복많이 안받으면 총쏠거야 [1] ㅇㅇ(118.235) 23.01.23 567 1
382958 빅보스송신 ㅇㅇ(118.235) 23.01.23 513 1
382946 오랜만에 [1] 모모(58.237) 23.01.20 564 3
382934 7년 전이라니 ㅇㅇ(175.223) 23.01.06 473 3
382933 잘 지내? [1] ㅇㅇ(182.212) 23.01.06 597 1
382927 이거 작가가 책임져야 하는거 아니냐? 토마토토(211.48) 23.01.02 845 2
382879 태후를 이틀전부터알았다.. [2] 쎳업(182.220) 22.11.22 942 1
382872 오구오구 [1] ㅇㅅㅇ(14.36) 22.10.23 789 0
382869 맛점하렴 [2] ㄷㄱㅇ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9.15 646 0
382868 포하 [10] ㅇㅅㅇ(14.36) 22.09.14 866 0
382867 우리 오빠 태양의 후예 상위 호환!! 승애기(175.197) 22.08.31 621 1
382864 이거 태후 백상 ㅇ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8.19 860 0
382863 빅보스 송신 ㅇㅇ(112.153) 22.08.18 30654 0
382862 잘지내니? [5] ㅇㅇ(221.142) 22.08.11 990 7
382860 진짜 미쳤나봐 ㅇㅅㅇ(14.36) 22.07.21 1171 2
382859 미친 이거 보니까 ㅇㅅㅇ(14.36) 22.07.21 830 0
382857 그럼 살려요 ㅇㅅㅇ(14.36) 22.07.21 729 0
382856 태후는 진짜 ㄹㅈㄷ다 태후보다 명작인 드라마는 없다고봄 내기준에서 ㅇㅇ ㅇㅇ(123.213) 22.07.21 698 4
382854 강태영 off~ ㅇㅇ(114.30) 22.07.15 507 0
382853 아구스 디씨 광고에 나오길래 오랜만에 와봄 [1] ㅇㅇ(106.101) 22.07.08 838 0
382851 포롤들 ㅌㄴㅇ [5] ㄷㄱㅇ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6.28 736 0
382850 오랜만에 모과주 [1] ㅇㅅㅇ(14.36) 22.06.27 914 1
382849 오랜만에 정주행했는데 ㅇㅇ(114.206) 22.06.23 711 1
382848 이거 재밌음? ㅇㅇ(218.239) 22.06.21 576 0
382846 오랜만에 이 짤 보니까 ㅇㅅㅇ(14.36) 22.06.12 778 0
382844 5월 마지막날 [7] ㅇㅇㅅㅌ(223.38) 22.05.31 937 2
382841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2] ㅇㅇ(58.224) 22.04.15 1004 3
382840 오랫만에 [3] 토깽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2.04.12 1073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