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twt님의 <흑심> 읽기

진돗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5.11.22 20:52:43
조회 310 추천 4 댓글 14



 어떤 의미에서는, 글쟁이가 표현하는 모든 것은 보조관념이다. 그것의 원관념은 글쟁이의 마음이나 생각이다. 비단 글쟁이만의 문제일까. 과장을 보태 확대하면, 언어란 보조관념이요 기표(記表)이다.


  사람들은 보조관념보단 원관념을, 기표보단 기의를 더 중시한다. 언어보단 마음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말은, 작품은 원본의 모사(模寫)다. 글쟁이는 이 모사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본질, 그 원천은 무엇인가. 시인은 무엇을 모사하는가.



<흑심, 오늘 저녁은 흑심에 대해 말해야겠어 누나, 내 흑심이 반응하는 지면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 이건 비쩍 말라가다가 흑심을 품고 살 수밖에 없게 된 한 활엽수의 변명이랄까 헤픈 편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야 사랑은 항상 너무 노골적이거든 이번엔 좀 더 은밀한 이야기로…>



  이 시 <흑심>의 작자는 그것을 ‘흑심(黑心)’이라고 보는 듯하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시적 발화의 원천이 되는 모든 것은 흑심이다. 그것은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 것, “좀 더 은밀한” 것이라 한다. 사실 모든 흑심이 그렇지 않을까. 막차 시간이 넘도록 교묘하게 일정을 짜놓는 오빠의 흑심은 너무 노골적이어선 곤란하지 않은가. 출발도 하기 전에 “우린 오늘 밤 자고 올 거야.” 해버리면 어떤 여자가 넘어오겠는가.


  그런데 이런 흑심의 교묘하고 은밀함은 시 쓰기에도 적용되는 것 아닐까. 문학이란 결국 ‘돌려 말하기’니까. 중등 국어과정에서 은유법의 대명사로 인용되는 “내 마음은 호수요” 하는 시 구절도 ‘나는 마음이 넓다’를 돌려 말한 게다. 이런 돌려 말하기, 이런 교묘함과 은밀함, 이런 흑심이 없다면 시는 다른 언술양식과 차별화되지 않을 게다.



<우리는 점점 야위어가는 거야 물기 없이 메말라서는 버석버석 갈라져버려 어쩌면 자주 물을 흘리는 것들의 운명일지도 몰라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한 페이지씩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미적지근하게 물을 흘리며 말라가는 거야 다시 젖을 뿌리도 없으니 그렇게 멸종할테지 그러니까 누나, 이건 그날 흘렸던 흑심에 대한 각주야 요절하지 않으려면 수많은 각주들부터 먹고 살 수 있어야 해 바스러지는 잎사귀 대신에>



  1연의 “내 흑심에 반응하는 지면”, 2연의 “페이지” “각주” 등의 표현은 이 시가 시적 발화 또는 ‘글 쓰는 행위’와 유의미한 관계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의적 의미로, 연필 내부에 들어있는 흑심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마음 안에 들어 있는 흑심을 “흘리는” 것이다. 따라서 글 쓰는 행위는 “운명”적으로 “야위어가는” 것이며 “말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 시에서 “멸종”으로 표현된 내면의 망실(亡失) 혹은 흑심의 소모로 귀결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시적 발화는 “요절하기 않”기 위한 “각주” 달기이기도 하다. 시에서 말했듯 삶이란 결국 “어쩔 수 없”이 망실로 귀결되는 것이고, 이를 “깨달을 때마다” 글쟁이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면의 “흑심”을 소모하면서 글 쓰기에 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언젠가 썩어 없어지겠지만 그저 홀연한 소멸보다는 “각주”와 같은 흔적이라도 세상의 “페이지” 어디에다 남겨 보겠다는 몸부림일 게다.




<거리가 너무 선명한 날이면 겁이 나 무심한 윤곽선에 베여버릴 듯, 안 그래도 부르튼 살갗을 문지르며 말을 더듬곤 해 말라 부서지기 전에 스케치를 지울 수 있을까 누나, 그렇게 진한 몸짓으로 걷지 말아줘 너무 제정신으로 살면 그늘이 없어져버려 내 흑심은 그늘을 좋아하거든 아무렇게나 몸을 섞어 대니까 우리는 날카로운 칼날의 세상에서 기껏해야 피부밖에 비빌 수 없는데>



  3연의 첫 문장은 최근 시 쓰기에서 내 관심사, 내 세계관과 유사한 점인 듯해 반가웠다.



  시는 필연적으로 언어를 도구로 사용한다. 언어는 마음의 불명료함과 달리 “선명한 ~ 윤곽선” 안쪽의 세계다. 자음과 모음 사이의, 단어나 구 또는 문장들 사이의 경계는 너무나 명확하다. 그러나 언어가 모사하는 바, 즉 원천으로서의 내면 의식은, 마치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전자의 위치처럼 불명확하다. 여러 개의 의식이 하나의 채널에서 완벽하게 겹쳐져 존재할 수도 있고, 채널 자체가 여러 개의 하위 채널의 혼합체로 존재할 수 있다.



  엄밀하게 볼 때 의식은 a와 b로 양분되지 않는다. 언어의 “선명한 윤곽선”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우리가 그렇게 착각할 뿐이다. 시를 쓰는 많은 이들이 시를 쓰는 과정에서 이런 괴리와 맞닥뜨리게 된다. 본질적으로 뿌연 안개일 수밖에 없는 원관념을, “선명한 윤곽선”이 구획해 놓은 문자의 체계로 치환해야 될 때의 괴리 말이다.



  애초에 “흑심”이라고 표현되었듯, 시인이 진정 쓰고자 했던 바, 즉 시적 의도는 논리와 이성의 양지보다는 “그늘을 좋아”한다. 수학 풀이식처럼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세계다. “너무 제정신으로” 쓰면 잘 해야 평론일 것이고 대개는 칼럼이나 논문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내면, 흑심을 드러내는 데에는 반쯤 나간 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칼날의 세상”이 아닌가. 그런 정신은 이제 썩어빠진 낭만, 찌질맞은 궁상으로 취급된다.




<그러니까 누나, 지금까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이야기야 그게 없으면 정말로 말라죽고 말거야 절대로 적분될 수 없는 호기심 그게 내 까만 천성 뿌리도 없이 떠다니다가 그늘을 찾는 날이면 재수가 좋아 스케치가 다 지워지고 세상에 없는 색이 가득한 바닥에 흑심은 반응해 누나, 그건 사실 말해줄 수 없는 거야 흑심에 혀가 있어도 말을 해 줄 수는, 없는 거야 그래서 자꾸 내가 말을 더듬는 거야>




  그렇게 우리네 글쟁이들, 수많은 습작생들은 ‘말더듬이’로서 존재한다. 숨 가쁜 디지털 시대, 시간을 나노 단위로도 나눈다는 이 시대에 어버버 말을 더듬는 우리의 언어를 진중하게 들어줄 청자는 갈수록 줄어든다. 그들은 답답해하며 재촉한다. “뭐라고? 좀 알아듣게 선명하게 말해봐, 이 멍충아!”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은 “사실 말해줄 수 없는” 것. “흑심에 혀가 있다 해도” 그것은 불문율이자 이 세계의 자연법칙이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꺼먼 수작! 말했지 사랑은 너무 노골적이라고 차라리 관음이 좋아 음침하게 흑심을 품고 있다가 그림자가 질 때마다 거리로 나갈 거야 말할 수 없는 색들에 각주를 달고 그 각주에 각주를 달고 해가 질 때까지 하루를 먹고 살 만큼 각주에 각주에 각주를 달고 어떻게 해 보려고는 하지만 결국 무엇도 해볼 수 없는, 매 순간 실패를 직감하며 입맛을 다시는 한 페이지를 채우고 그렇게 십수 명에게 집적대도 이 흑심은 닳지를 않아 어차피 세상에는 칼날밖에 없고 나는, 노골적으로,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훔쳐보거든 각주를 달 본문이 이 세상에 없는 건 문제가 아니야 지금까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 그 야한 빛깔들이, 문제야>




  하여 글쓰기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꺼먼 수작”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쓰려는 것이고 “세상에 없는 색”을 칠하려는 “수작”. “매 순간 실패를 직감”하는 “각주” 달기이다.



  나는 이 시에서 특히 각주 달기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각주란 필시 “본문”에 의존하는 존재다. 서두에 모든 글이 내면 또는 마음의 보조관념이라고 했듯, 각주는 본문의 보조관념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어디에 있는가. 시인은 “각주를 달 본문이 이 세상에 없는 건 문제”도 아니라고 한다.




<흑심, 앞으로도 나는 흑심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 누나 계속해서 각주를 달 거야 이 세상에서 사랑에 빠질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 스케치에 베이고 싶지 않아 이미 손가락 끝이 트고 있어 너무 아프다고


그러니까 흑심, 앞으로도 흑심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




  세상의 모든 시, 모든 말의 본적지는 없거나 있다 해도 영원히 확정할 수 없는 확률적 존재가 아닐까. 시 쓰기란 데리다의 기표놀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시 쓰기가 본문에 각주 달기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본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본문인가, 어느 것이 원전(原典)인가를 엄밀하게 따져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데리다의 말처럼 기표와 기의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상호간의 끝없는 반사 작용이다. 어느 것이 원천이고 어느 것이 끝인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서로 반사작용하는 현재의 순간, 그 놀이의 현재를 받아들이면 된다.



  비슷한 맥락(이 아닐지도 모르지만^^;)에서 시인은 가상의 청자 “누나”에게 “계속해서 각주를 달 거”라고 강조한다. “스케치”에 잡히지 않는 존재로서, “선명한 윤곽선” 바깥의 존재로서, 시적 의도에 종속되지 않는 기표놀이 식 “각주 달기”로서, 이 시인의, 그리고 우리네 습작생들의 시 쓰기는 계속 될 것이다.




추천 비추천

4

고정닉 0

3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시세차익 부러워 부동산 보는 눈 배우고 싶은 스타는? 운영자 24/05/27 - -
103072 l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5 46 0
103071 아버지 [4] ㄴㅇㄹ(1.227) 15.12.05 81 0
103070 만약 올해 한 신문사 신춘문예에 떨어진 작품을 [2] ff(121.159) 15.12.05 389 0
103069 외로운 사람 ff(121.159) 15.12.05 2114 0
103068 5.. ㅇㅇ(14.33) 15.12.05 35 0
103067 아무리 써봐 니들이 될거같아? [1] 해협의빛(114.205) 15.12.05 104 0
103066 형들 나 시 입문자에요 응디(118.42) 15.12.05 68 0
103065 문돌이들 모여있는데가 여기냐? [4] 예비평가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5 102 0
103064 디씨일보에는 신춘문예코너 없나 아이유를보면설레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5 89 0
103062 인간성은 훼손 되는 중이다. 이건 부정 할 도리가 없다. [8] 시대(118.221) 15.12.05 200 3
103061 문갤일보 신춘문예 응모작 [9] 진돗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5 550 4
103056 김지하 시인이 정선아리랑에 꽂힌 까닭은? dotory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97 1
103055 동아, 한국, 조선 끝났구나. [3] ㅇㅇ(175.124) 15.12.04 353 0
103052 핵전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52 0
103051 인생은 전쟁이야 [12]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127 0
103050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것들을 머금은 [2] 124123123123(210.91) 15.12.04 75 0
103048 그래 피아노 치듯이 글을 막 써내려가고 [2] 124123123213(210.91) 15.12.04 89 1
103047 조용히 춤추는 것들을 봐 혼자서 기쁜 그들을 보면 [3] 124123123(210.91) 15.12.04 70 0
103046 첫사랑은 내 가슴속에 남아 절대 잊혀지지 않을 어떤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3] 124124123213(210.91) 15.12.04 100 0
103043 수어사이드.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51 0
103042 덥다.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35 0
103039 허물 l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34 0
103037 얼룩 [1] l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58 0
103036 앞으로의 시대 [2] 도담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84 0
103034 내가 쓰는 시 시대(118.221) 15.12.04 76 1
103033 나 남잔데 손이 예쁘다 [4] ㅇㅇ(112.214) 15.12.04 151 1
103032 죽어요 도담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55 0
103031 이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어 [11] ㅁㄹㄱ(223.62) 15.12.04 111 2
103030 문창과가 망나니인 이유 말해준다 [3] ㅇㅇㅇ(1.176) 15.12.04 386 0
103029 스펙트럼 [3]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112 3
103026 결국 자존감 낮은 사람이 지는 겁니다 [1] ㅇㅇ(222.112) 15.12.04 113 0
103025 글 좀 싸주세요 ㅁㄴㅇㅇ(121.159) 15.12.04 57 0
103024 실기 준비하면서 끄적여본 시인데 어떤가 싶어서 올려봅니다 [2] ㅇㅇ(39.115) 15.12.04 160 2
103022 우리는 너무 거대한 끄트머리 어디쯤에서 표류 중이다 [4] 시대(118.221) 15.12.04 114 2
103021 그대 [1] 도담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68 0
103020 철학하는 이유가 뭐죠? [2] ㅇㅇ(5.254) 15.12.04 81 0
103019 안녕하세요 자작 시를 한편 낭송해보려 합니다 평가좀 부탁드립니다. [4] 불알이탱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239 0
103018 . [3] 나쁜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115 0
103017 . [2] 나쁜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141 0
103014 논쟁은 말이에요 [3] ㅇㅇ(107.167) 15.12.04 78 1
103011 자랑할게 없어서 섹스맨 부심ㅋㅋㅋㅋㅋ [2] ㅇㅇ(107.167) 15.12.04 111 2
103006 초예,니그라토,ㄹㅎ [2]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166 0
103004 호접지몽 [5] ㅇㅇㅇ(175.223) 15.12.04 280 2
103003 오늘은 [6] (183.99) 15.12.04 167 0
103002 여자가 문갤은 왜 옴? [4] ㅇㅇ(39.7) 15.12.04 174 2
103000 나 남잔데 생일이 다가온다 [1] ㅇㅇ(211.36) 15.12.04 95 0
102999 링딩동 링딩동 11(121.169) 15.12.04 193 0
102996 니들은 절대 등단 할 수 없다 [4] 해협의빛(211.36) 15.12.04 269 0
102995 내가 하는 게임 [5]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04 203 0
102994 sjgmlsms dkseho gkgkgkkgkgkg 77(62.116) 15.12.04 94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