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문학에 미치기 좋은 계절

진돗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5.12.26 23:07:23
조회 444 추천 0 댓글 16

대학교 동아리 카페에 남겼던 글입니다. 

아마 2000년이나 2001년쯤이었을 겁니다...




  1학년 때까지 내가 시를 쓴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 었다. 시화전에 출품하고 싶었으나 뽑아 주지도 않았다 (150 명중 30명을 뽑는데 이중에 끼지도 못했다). 2학년 때 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러다가 2학년 2학기 때 어느 선배 가 우연히 내 노트를 뒤지다가 시 한 편을 보더니 "감각이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즈음부터 나는 하루에 한두 편씩, 일주일에 보통 서 너 편씩 썼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옷을 털면 먼 지처럼 시가 막 쏟아졌다. 


  그렇게 95년 가을부터 96년 여름 까지 나는 약 백여 편에 가까운 시를 썼다. 시집도 많이 읽었다. 정확한 건 아니나 내가 읽은 시집 의 수는 대략 7-80여 권이다. 결코 많이 읽은 건 아니다. 나는 특히 맘에 드는 시집의 경우에 백 번이고 이백 번이 고 끊임없이 읽는 편이다. 서정주 시집이 대표적인 예로서 6년 동안 꾸준히 읽고 있는데 대충 따져 보면 이백 번은 족 히 읽은 것 같다. 


  근데 읽은 시집 중 3분의 2는 95년 가을 과 96년 여름 사이에 읽은 것들이다. 7-8개월 간 약 5-60 여 권의 시집을 읽었던 것이다. 지금에 비하면 참으로 왕성했던 습작 활동이었다. 전공 공부 고 나발이고 나에겐 오로지 시밖에 안 보였다. 어떤 때에 는 서정주 시집 달랑 한 권 들고 학교에 가 수업을 들었 다. 수업은 안 듣고 대가의 절창에 감탄하면서 하루를 보냈 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이 시기에 완성 되었다.


 '00학번 후배들한테 선배랍시고 주절주절 가르쳐 주 지만 나는 이론 공부한 적이 별로 없다. 내가 읽은 이론 서 적은 "현대시론" 교재 한 권을 포함해 서너 권 정도다. 어 쩌면 나는 사이비일지도 모른다. 사이비라고 몰아세우지 말 기 바란다.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문학적 지식은 대개 작품을 읽 는 과정에서 얻어진, 감각적 체험의 지식이다. 군대 갔다 오고 세상사는 짬밥도 좀 늘고 하다 보니 그게 좀 명료해지 고 체계화되어서 제법 강의 비슷한 것도 할 수 있는 수준 이 되었다. 


  내가 왜 이런 얘길 늘어놓느냐... 우리 시인학교 후배들 대개가 어떤 문학적 경지에 오르고 싶어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을 써 본 사람은 누구나 자타가 공인할 만한 ‘작품’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근데 이게 도무지 쉬운 일 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발버둥치고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다. 때문에 이런 말 한다는 게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해야겠다. 


  우리 후배 들 대개가 아직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기나긴 레이스(?)의 출발점에도 못 미치고 있다. 출발점에 서 있다는 건 결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적의 말대로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시인학교 활동도 그러하지만 습작 활동에 있어서 도 그다지 열심인 후배는 몇 안 되는 것 같다. 오히려 동아 리 활동에 있어서는 대단히 열심인데도 궁극적인 목적인 '글쓰기'의 측면에 매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냥 취미 생활이라고 여긴다면 할 말 없지만, 그게 아 니라면 좀 미쳐(?)주기 바란다. 


  말이 좀 이상한데, 본래 문학이란 게 확 미쳐 버리지 않고는 잘 읽히지도 않고 잘 써지지도 않는 것이다. 평생을 미쳐서 발광하라는 게 아니 다. 세상에서 문학에 평생을 미쳐 사는 사람은 1%가 안 된 다. 대개는 조금 그러다 만다. 근데 한 달이 되든 일 년이 되든 일단 미쳐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경험에 의하면 미침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가장 확실 한 방법은 짝사랑 할 만한 자기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 다. "적" 문학의 원형은 김수영이었고, 본 교장의 원형은 서정주였다. 자기 모델을 심하게 짝사랑하다 보니 여기까 지 오게 된 것이다. 


  두서없이 장황한 글이 되었는데, 요점은 우리 후배들 문학에 좀 미쳐 보라고 권하는 말이다. 빨리 자기 모델을 찾아서 미친 듯이 짝사랑하고, 미친 듯이 읽어 내고, 미친 듯이 쏟아 내기 바란다. 모델은 어떻게 찾느냐고? 


  나의 경 우다. 서점에 간다→시집을 고른다→마음에 안 든다→다른 걸 고른다→또 마음에 안 든다→또 다른 걸 고른다→마침 내 마음에 든다→읽을수록 마음에 든다→미친다. 


  이때 읽을 수록 마음에 들다가도 미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 또다 시 서점에 가라. 될 때까지 해라. 그래서 한 번만 미쳐 봐 라. 어떠한 평론서적, 이론서적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모 든 것이 한 편의 감동적인 작품 속에 죄다 녹아 있다. 한 번 미쳐 보고 예전에 내키지 않던, 이른바 난해한 시를 읽 어봐라. 느낌이 한결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엔 김종삼의 시가 그랬다. 예전엔 무슨 소린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는 데 언제부터인가 시집 한 권이 통째로 감동의 도가니더라. 


  우리...문학에 확 미쳐 버립시다. 머리로 이해하려 들 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 가슴으로 느끼는 대가의 작품은 확 미쳐 버릴 지경의 그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미치다 보면 시가 보일 겁니다. 아지랑이처럼 묘연하던 실체의 윤곽이 차츰 드러날 겁니다. 진짜라니까요, 일단 한 번 미쳐 보시라니깐요... 



-ps. '적'이라는 이름은 당시 저와 동거생활을 했던, 학번은 한 해 밑이나 나이는 저보다 오히려 한 살 많았던 친구의 카페 닉네임입니다. 돗개와 적은 각각 94학번과 95학번을 대표하는 문청이었습니다. 결국 둘 다 등단은 못했습니다만, 대학을 떠날 때까지 그것을 붙들고 있었던 마지막 2인이었습니다. 당연히 21세 초엽 당시, 학부생들에겐 우리 두 사람이 꽤 많은 영향력을 미쳤었지요. '적'은 이미 90년대부터 굉장히 시니컬하고 논쟁 방식에서는 심하게 공격적이었습니다.  당시엔 보기 드문 캐릭터였는데, 디시에 와서 보니 그런 스타일이 꽤 많더군요. 혹시나 그 친구가 문갤에를 눈팅이나마 스쳐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후배들도...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연예인 안됐으면 어쩔 뻔, 누가 봐도 천상 연예인은? 운영자 24/06/17 - -
105765 아무것도 아닌 [1] (221.157) 16.01.10 63 0
105764 시란? [5]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10 153 1
105763 카스트로는 최고다.. [8] 나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10 163 0
105761 세계 어디에도 나를 만족시키는 소설,시는 없었다 [6] ㅇㅇ(117.20) 16.01.10 193 0
105760 꿈은 [1] Elkaras(218.148) 16.01.10 65 0
105757 예전 것들. [1] 김멍멍(211.36) 16.01.10 247 2
105755 도도새의시 [1] ㅇㅇ(115.137) 16.01.10 86 0
105754 무섭네요 단순(121.169) 16.01.10 60 0
105752 인생의 고민을 들어 주세요. [9] 결심(210.106) 16.01.10 223 0
105751 . 김멍멍(211.36) 16.01.10 89 0
105749 짐 싸는 것을 딱히 돕는 것도 아니면서 [2] 음대(182.160) 16.01.10 243 1
105744 ㄹㄹㄹㄹㄹ [2] 나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10 96 0
105741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순회열차]이번역은 '문학 갤러리'입니다. [4] 갤러리 순회열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10 162 0
105740 . [6] 나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10 134 1
105732 제목지우개 mm(115.137) 16.01.09 58 0
105731 본인도 쪽팔렸는지 [1]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98 0
105728 쓰자고 일어났다 11 시쯤이네 (183.99) 16.01.09 61 0
105727 글을 잘 쓰려면 결국 많이 써보는게 제일 좋을까요? [2] 늙은침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109 0
105726 내가 등단할 수 있을까 [3] ㅇㅇ(114.205) 16.01.09 166 0
105722 대한민국 청춘들은 스펙을 쌓기 보단 풍류를 즐겨야 된다 ㅁㄴㅇㄹ(112.154) 16.01.09 67 1
105720 또다른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3] 늙은침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93 0
105719 문학갤에 질문이 있어서 왔습니다 [9] 늙은침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182 0
105714 이곳에 등단한지도 꽤되었군 [14] 1241231234(210.91) 16.01.09 208 4
105713 솔까 내 진짜 작품들 공모했는데 [6]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627 7
105711 나는 '국수주의자' 이다. [2]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87 2
105709 자작시 ㅇ비 [1] zea(121.64) 16.01.09 73 0
105705 면면, 이병률 [16] 이수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280 1
105704 주동자, 김소연 [1] 이수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109 0
105703 너무 오래된 이별, 김경주 [3] 이수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202 2
105702 근데 이름 알아서 뭐함? [1] 너너(107.167) 16.01.09 77 0
105701 인제 완성 여기 기집애들 다 죽었어 이름 셋 다 파악 [41] (183.99) 16.01.09 287 0
105700 아놔, 시발 술 핑게 좀 대려 치면 막 화가 끓어오른다. [6] StartDust(121.143) 16.01.09 83 0
105699 둘씨네아dulcinea 앞에서 [17] (183.99) 16.01.09 144 0
105698 고등어 넣고 끓인 물 잘 안 식네 [4] (183.99) 16.01.09 92 0
105697 캐나다 박스 공장에 취직하고 싶다.. [11]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195 0
105695 건배. [8] (183.99) 16.01.09 94 0
105694 어둡다. [3]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85 0
105693 건배. [33] X.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230 1
105692 낙주종생(작성 중) [3] StartDust(182.214) 16.01.09 88 0
105691 흑단나무야 [8] StartDust(121.143) 16.01.09 109 0
105690 잘까 [2]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65 0
105685 꼬치붕알 °U° [1] 1241243124(66.249) 16.01.09 93 0
105684 김연수 너무 좋다 잘알못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1.09 97 1
105680 짧게 소설써봄 ㅡ아다의 꿈 [1] 방청객(58.232) 16.01.09 134 0
105679 니땜에 끈김 ㅡㅡ 1241243124(66.249) 16.01.09 53 0
105676 엄마가 일터에 돈 벌러 가면 1241243124(66.249) 16.01.09 48 0
105673 야이 씨발년아 1241243124(66.249) 16.01.09 63 0
105672 겨울논 타작한 까까머리 [1] 1241243124(66.249) 16.01.09 62 1
105671 개목줄을 목에 걸고 [1] 1241243124(66.249) 16.01.09 70 1
105670 떠들자 [1] 1241243124(66.249) 16.01.09 50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