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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알코올, 알몸 그리고 수면(睡眠)
—바타유에 대한 중얼중얼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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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은 동일하다. 알코올, 격동의 순간들(격동하는 알몸 상태), 고통스러운 수면(睡眠).” 이것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의 문장이다. 좀 더 추적해보자. 이는 1962년 4월 1일 미뉘 출판사에서 재출간된 『불가능』에 수록된 문장이지만, 그보다 15년 전인 1947년 9월 『쥐 이야기(디아누스의 일기)』란 제목으로 출간됐을 때부터 수록됐던 문장이었다(물론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제목을 바꾸고, 추가적인 내용들을 수록하며 반복해서 출간했다). 참고로 『불가능』은 바타유가 처음 출간을 시도했던 갈리마르 출판사에서는 ‘윤리상’의 이유로 출간을 보류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윤리상의 이유라? 어용소설을 적는 게 아니고서야, 문학이란 본디 저 통념덩어리에 갖다 붙이는 고매한 이름인 ‘윤리’라는 것을 도발하기위한 전위(前衛)였다. 또한 통념이란 구조적인 기반 위에서 만들어지는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이기에, 바로 이런 점에서 문학이란 좋든 싫든 정치적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추가로 덧붙여 그 어원을 풀자면, 통념의 통(通)은 예로부터 곡식의 분량을 헤아리는데 쓰는 그릇의 하나인 ‘휘’ 또는 ‘섬’을 뜻하는 대롱 동[甬]자로부터 연원했다. 도량형은 곧 중앙집권적 국가의 주된 사업이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진시황과 대립하는 사(士)들의 결사체인가? 진시황이 행했던 악명 높은 사업, 즉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했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떠올려본다면, 문학은 본디 권력과 불화하는 정치성을 지녔다는 걸 추론해볼 수 있을 듯하다(그런데 유학이 소설이냐고? 그건 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다).
다시 바타유로 돌아오자. 문학의 반(反)윤리성과 정치성을 받아들인다면—물론 이건 정치적이지 않은 것들을 정치화시키는 의미에서의 정치성이겠지만—바타유의 저 “알코올, 격동의 순간들(격동하는 알몸 상태), 고통스러운 수면”이라는 세 가지 요소역시도 어딘가 시대와 불화하는 반골적인 기질이 있다고 추론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여기서 우선적으로 프로이트의 냄새를 맡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가령 모든 사회적 억압은 성(性)에 대한 억압이라는 그의 정리를 따라간다면, “알코올”은 예로부터 금기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충동질하는 보조제였다는 점에서 꽤나 혁명적이었다(젊은 헤겔이 튀빙겐 맥주집의 단골이었다는 걸 떠올려보도록 하자). 물론 알코올 중독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생활과 건강의 파탄을 초래하지만, 때로는 고흐의 압생트처럼 불멸의 무언가를 끄집어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자아를 흐릿하게 만들며 억압된 본질을 이끌어내는 신비주의적 원리일지도 모른다. 이백(李白)이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이렇게 적었던가?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그 다음으로 “고통스러운 수면”란 것도 프로이트적 맥락으로 풀어볼 수 있다. 대표작인 『꿈의 해석』에서 잘 풀어졌듯 프로이트에게 꿈이란 무의식을 보여주는 극장임과 동시에, 그 무의식을 억누르고 싶은 의식에 의해 끊임없이 검열 당하는 프라우다(Pravda)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구소련의 인민들이 프라우다에 적힌 내용들을 정반대로 해석함으로써 진리를 획득했듯, 꿈의 해석자 역시도 “전도(顚倒), 즉 반대로 변화하는 것은 꿈-작업이 아주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고, 또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묘사 수단 중 하나이다. 먼저 그것은 꿈-사고의 특징요소가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따라서 꿈의 의미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을 때는, 외현적 내용의 어떤 부분을 거꾸로 뒤바꾸어 볼 수 있다. 그러면 대개 즉시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물론, 이렇게 글라블리트(Glavlit)의 노선을 역행하는 자에게 기다리던 건 강제노동수용소였기에 꿈의 극장을 엿보는 건 언제나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알코올과 수면 사이에 있는 “격동의 순간들(격동하는 알몸 상태)”는 단순히 프로이트만으로는 환원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오는 “성공적인 성행위는 그 자체가 반역 행위였다. 욕망은 사상죄였다”란 문장을 인용하면서, 단순히 섹스야말로 가장 반역적인 상태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으로 끝맺음 할 텐가? 정신분석의 13번째 사도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좀 더 정확히는, “그러고도 남겠지만”), 나체의 이미지엔 성(性)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지점들이 다분하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가령 유신시대의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영장도 없이 마구잡이로 이뤄지는 구금(하지만 ‘구금(拘禁)’은 피고인 또는 피의자를 구치소나 교도소 따위에 가두는 법률적 용어라는 점에서, 이 경우에는 ‘납치’라는 보다 노골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게 더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과 고문을 허용했다. 여기서 고문은 전통적으로 고문대상의 인격적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알몸으로 벗겨버린 상태에서 자행됐다는데 주목해보자. 이는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 유신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이라고 지정된 자는 인신보호영장을 비롯한 일체의 법적 권리를 말소당하며, 동시에 모든 일반시민들 역시도 언제라도 이런 알몸상태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그렇다면 긴급조치 하에 시민사회는 언제라도 벗겨질 수 있다는 점에서 “벌거벗은 백성들”이 된 건 아닐까? 물론 여기서 문학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어야만 하리라.
끝으로,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바타유가 음주-알몸-수면의 순서로 문학적 조건들을 나열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듯싶으니, 어쩌면 이는 권력에 대든 자가 겪게 될 진행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불만을 느낀 작가는 진리충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기보존본능을 관장하는 자아를 정지시킬 필요가 있고, 이 과정에서 충동과 숙취의 자기파괴를 실현해주는 알코올에 기대게 된다(단순히 주정뱅이로 끝나버릴 위험을 무릅쓰면서 말이다). 그러다 유도된 우연을 통해 진리를 표출시켜버린 작가는 당국의 고문실로 끌려가 알몸상태로 벗겨져, 프로이트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트라우마를 심어주는 초자아를 각인 당하게 된다. 여기서 평생 동안 이어지는 고문후유증은 카프카가 「유형지에서」에서 적었던, 신체에 새겨진 결코 잊을 수 없는 법의 준엄함이 되겠고. 어쩌면 고문자들은 욕조와 곤봉 그리고 몇 볼트 전기들을 통해 희생자의 신체에 이런 문신을 새기는 건지도 모른다: 법은 엄격하기에 법이다(Dura lex sed lex). 그리고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진리를 다시 되뇌어보려는 작가는, 매순간 꿈의 서스펜스 극장을 휘어잡는 검열자로부터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수면”이 된 불면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고, 이 시간들은 자살충동 및 글을 써내려갈 조건이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여기서 진정으로 강조점이 찍혀야할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다는 사실이다. (바타유가 자신의 책제목을 ‘불가능’이라고 정한 이유를 이로부터 추론해내는 것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지나친 비약일까?) 문학이 피로 쓰인다는 말은, 어쩌면 비유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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