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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예술 - 김규항

(14.34) 2015.04.21 11:28:51
조회 349 추천 2 댓글 3



예나 지금이나 하드록을 주된 취향으로 클래식, 재즈, 국악 따위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이지만 현대음악은 가까이한 적이 거의 없었다. 최근 테리 라일리,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 같은 미니멀 음악이나 올리비에 메시앙, 리게티, 크세나키스 등이 음악 듣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건 그런 나로선 이례적인 일이다.나는 ‘좋은 글은 불편하다’라는 명제를 글의 가치에 대한 지표로 삼아왔다. 이 사악하고 기만적인 세계에서 불편함조차 없는 글이란, 체제를 미화하고 타성에 젖은 삶을 위무하는 아편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 어느 순간 음악 쪽에 이어졌고 조화로운 조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현대음악의 불편함에 대한 자발적 대면을 만들어냈다.

30여년 전 한 시기에 나는 국악에, 농악이나 민속악이 아닌 정악에 빠졌더랬다. 옛 지배계급의 수행음악이던 영산회상이나 왕을 위해 연주되던 음악들을 탐닉하고 배우러 다니는 건, 혁명과 계급의식에 한창 몰입한 좌익 청년에겐 어울리지 않았고, 참으로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쓸모없는 음악이 나에게 없었더라면 그 시간이 북이나 쇠를 배우는 좀 더 쓸모있는 시간으로 모두 대체되었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좌익 청년에게 쓸모없는, 전혀 좌익적이지 않은 그 음악은 좌익 청년이 오래도록 좌익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술이란 묘한 것이라서, 쓸모없음의 상태에서 그 본디 힘과 가치가 드러난다.

마크 로스코 전시에 나붙은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이라는 홍보 문구는 오늘이 예술의 쓸모가 얼마나 중시되는 세상인가를 보여준다. 문구에서 스티브 잡스는 더 이상 자본가가 아니라 예술가다. 예술가 스티브 잡스에게 예술적 창의성과 혁신적 태도는 기존의 세계가 아니라 기존의 산업과 충돌한다. 예술은 기존의 산업과 차원이 다른 부가가치와 이윤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다. 스티브 잡스는 또한 창의성과 혁신의 기반이 인문학이라고 설파하곤 했다. 왕의 말씀은 ‘CEO 인문학’ 등의 바람으로 이어지고, 잘나가는 광고 카피라이터들이 인문학 멘토를 자처하거나 심지어 ‘광고가 세상을 바꾼다’고 주장하는 희한한 장면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런 바람과 풍경은 예술과 인문학이라는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장 의미있는 두 가지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기반으로 한다. 예술이 제 본디 힘과 가치를 가지는 조건은 쓸모가 아니라 ‘쓸모와의 거리’다. 인문학의 힘은 인문학적 사유와 통찰로 최대한의 쓸모를 뽑아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제 정신적 고양을 쓸모에만 바치거나 그런 태도에 함락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요약하자면 예술과 인문학은 인간이 돈 되는 일보다는 돈 안 되는 일을 위해 살도록, 돈이 아닌 다른 소중한 가치에 좀 더 정신을 팔고 용감하게 좇도록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 시민은 현실적 쓸모에 관련한 일은 노예에게 맡기고 철학이나 예술 같은 쓸모없는 일에 몰두하는 걸 인간적인 삶의 태도라 믿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고 쓸모있는 일에만 제 시간과 능력을 바치는, 노예적 삶의 태도가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대두되고, 자본주의의 후기에 이르러선 그런 삶의 태도로 무장한 노예들이 영웅으로 추앙되고 지배계급으로 군림한다. 급기야 예술과 인문학은 그런 노예적 삶의 효율과 경쟁력을 높이는 도구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그런 흐름을 충직하게 따르면서도 문화적 기지촌의 추레한 풍경들이 덧붙여진다. 로스코 전시에 맞춤책을 의뢰받은 스타 철학자는 ‘비정규노동자들이 이 전시를 보고 위로받길 바란다’는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급기야 전시장엔 ‘이건 단지 그림이 아니라 위로야!’ 윽박지르는 문구가 내걸린다. 스타 철학자는 책 의뢰를 받기 전엔 로스코를 몰랐다고 했다. 한 예술가에 대해 책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신체적/물리적 시간이 있는 법이다. 과문한 소재도 ‘구라’의 기술로 쓰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팔아먹을 수 있지만, 인문 정신이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런 쓸모를 거부하는, 쓸모없음의 영토에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태도다.

예술의 쓸모와 관련하여 근래 한국에서 가장 대대적인 위력을 발휘해온 건 한류다. 한류의 가치와 지향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건 문화적 수구꼴통으로 전락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한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풍경은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화려한 무대와 환호에 휩싸인 한류스타만이 아니다. 한류가 총력 동원된 지난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세계적 망신으로 끝났고, 바로 이 순간 좀 더 높은 임대수익을 위해 ‘테이크아웃 드로잉’이라는 근사한 예술 공간을 용역을 동원해 내쫓으려는 건물주는 다름 아닌 ‘문화대통령’ 싸이다.

예술의 쓸모를 강조하고 쓸모의 도구로 삼는 일이 예술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예술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삶이란 또한 얼마나 황폐한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목도한다. 오래전,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 ‘창의성과 혁신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걸 보여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와 애플이 바꾼 건 세상이 아니라 단지 이윤이었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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