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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장군 협주곡. 황병승.

나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5.08.02 21:42:18
조회 363 추천 1 댓글 5

1

나는 선언의 천재

사계절을 저지르며 거듭 태어난 포 스타(four star)

침묵과 비명의 일인자인 철문이여

얼음으로 만들어진 찬 변기여

그리고 너 속 검은 의자여

나의 실패담이 그렇게 듣고 싶은가


첫 번째 계절은 H로부터 시작합니다

H는 유에프오를 세 번 본 사내

한 번은 옥상에서 주근깨 여자와 키스할 때

또 한 번은 주근깨 여자를 그리워하며

새로 사귄 갈래머리 여자와 산책할 때

유에프오는 단 한 번 H에게 신호를 보낸 적이 있는데

(쓰르륵 쓰르륵 하루치의 목숨을 대패질하는 귀뚜라미 소리)

삼 년 전 갈래머리 여자가 죽었을 때였습니다


H는 울지 않았습니다

산에 들에 진달래 개나리 피거나 말거나

봄을 선언하고 나는 봄 속에 갇혔습니다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고양이 같은 하늘빛

빈 벤치에 앉아 올려다보는 붉은 지붕의 뾰족함


2

뜨거운 세상이 소년을 달구었는지

소년이 세상을 뜨겁게 달구려 했던 건지 어쨌든

세상을 조금 알 것만 같던, 솜털 수염이 막 나기 시작하는

한 소년이 야구를 합니다

소년의 아버지의 머리통이 담장을 넘어가고

소년은 배트를 던지며 퍼스트 베이스를 향해 달려갑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그러나 퍼스트 베이스는 어디에


나는 두 번째 죄의 계절을 맞았습니다

더 이상 태어나기 싫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지만

(주근깨 여자는 어디로 간 걸까 지난밤 태내의 쌍둥이처럼 친밀했던)

나는 사방에서 자꾸만 태어났습니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차창의 불빛 환한 밤 기차처럼

이렇듯 나는 너무 빤하고 선언은 늘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선언의 천재

모든 것을 선언한 뒤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겠습니다


……결국 빛이 빛을 찾아 헤매는 슬픈 시간입니다


주근깨 여자의 행방을 물으며 H에게 피 묻은 야구공을 선물하던 밤

술에 취한 H는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거만한 말투로 내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오늘 밤이군.


……결국 빛이 빛을 모른 체하는슬픈 시간입니다


소년은 여전히 퍼스트 베이스를 찾아 달려가고

몇 개의 담장을 넘고 넘어 늙은 남자의 머리통이

보건소 쓰레기통에 처박히자,

소년의 어머니는 다리는 소년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칩니다


빠울 빠울


나는 노래를 잊었습니다 댄스를 잊고 비행기

접는 법 잊었습니다 팔 걷지 않습니다 뜀뛰지 않습니다

그리나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잠들 수 없는 시간


3

H의 종교는 유에프오나 다름없습니다

H는 자신을 데려갈 원통형의 광선을 기다립니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H의 찡그린 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H의 머리칼

아- 아- 그 순간 아름다운 목소리가 존재했다면

H의 낡은 외투는 곧장 흐느끼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기는 잡탕찌개야 온갖 것들이 끓는군

지구의 한쪽 그리고 도시 한구석의 허름한 술집

H의 말대로 온갖 것들이 끓는 잡탕찌개

나는 그 온갖 것들이

부글거리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끓고 싶은

가랑잎 범벅으로 보였습니다


삼 년째 암울한 H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사 년째 암울한 자가?


가을! 나는 가을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가을비 오던 밤

추적추적 소년은 H를 찾아갔습니다

이부자리를 펴기 위해 그가 장롱 문을 열었을 때,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빗물 뚝뚝 흐르는 젖은 손으로

H의 멱살을 쥐고 울부짖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살려내, 이 빌어먹을 자식아!


H를 찾아가기 전날 밤,

소년은 나에게도 왔습니다

그리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선언의 천재 나는 빠울의 천재

곧장 담장을 넘기는 것만이 나의 꿈

홈런을 치고 제자리에 있으면 아웃인가요


……결국 빛이 빛을 찾아 헤메는 슬픈 시간입니다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고양이 같은 하늘빛

빈 벤치에 앉아 올려다보는 붉은 지붕의 뾰족함


4

그녀의 이름은 으나입니다

으나는 인사의 천재

달에게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으나예요

별에게도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으나랍니다

오줌을 누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으나는 인사합니다 안녕 으나야

까마귀에게도 안녕

속옷을 벗기는 사내 녀석들에게도 으나예요

따귀를 갈기는 아주머니에게도 안녕 안녕

으나는 인사의 천재

사랑하는 나의 누이동생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갈래머리 으나는 H의 집 근처 하수처리장에서 숨진 채 발견됩니다


H는 울지 않았습니다

(쓰르륵 쓰르륵 하루치의 목숨을 대패질하는 귀뚜라미 소리)

H는 유에프오가 보내오는 신호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빛이 빛을 외면하는 슬픈 시간입니다


나는 앨범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

소년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막 시작될 즈음 H가 보내온 엽서.


오랜만이군 나는 잘 지내고 있고 자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와 있다네 이곳에서 우연히 소년을 만났네 소년은 나의 멱살을 잡지도 비에 젖어 있지도 않았네 우리는 모든 것을 잊기로 했지 그리고 으나도 만났네 으나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인사하더군 내가 혹시 자네에게 얘기한 적이 있던가 불안해 보일 정도로 조심스러워 보이는 여자에 관한 얘기 나는 그런 여자를 만나면 금세 불길한 생각이 든다네 아주 조심스러워 보이는 여자는 헤어지기 전에 꼭 한 번쯤 크게 소음을 내거든 단단히 감춰진 마음의 소란스러움은 그러나 재킷 호주머니 속의 동전으로 와르르 쏟아지든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놀랄 만큼 커다란 비명으로 터져나오든지 말일세 으나는 소음을 내는 대신 인사를 하는 거라네 안녕 안녕하세요 으나 으나예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향해, 나는 으나를 불쌍히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네 손을 그릴 때 꼭 다섯 손가락을 모두 그려야 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자네 때문에 새끼 손가락이 싫네 자네를 영영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나를 용서하길 바라네


ps.

그런데 혹시 자넨, ‘노 워먼 노 크라이’*라는 말을 해석해본 적이 있나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네 ‘여자가 없으니 울지도 못하겠네’ 잘 있게나 친구 아직도 오늘 밤이군


으나는 인사의 천재

사랑하는 나의 누이동생입니다

나는 H의 엽서를 찢었습니다

창밖으로 소년의 머리통이 날아갑니다

담장을 넘어 곧장-


5

이제 연주는 끝났습니다

나는 선언의 천재

사계절을 저지르며 거듭 태어난 포 스타

침묵과 비명의 일인자인 철문이여

얼음으로 만들어진 찬 변기여

거리고 너 속 검은 의자여

연주는 이미 끝이 났습니다

이 겨울의 철문을 나서며 날두부를 먹으리라

그러나 덜컥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

더 큰 죄를 짓기 위해……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고양이 같은 하늘빛

빈 벤치에 앉아 올려다보는 붉은 지붕의 아찔함.


*밥 말리의 노래제목


- 황병승, <사성장군협주곡(四星將軍協奏曲)> 전문, <<여장남자 시코쿠>>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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