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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플) Sweet Dream 4

oooo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2.16 07: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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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서울, S전자 디자인 경영 팀 사무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송이의 머릿속에서 정리 되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어떤 사람이 벼락같이 저를 끌어안았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다.

그 남자가 이제 저를 부둥켜 안고 키스를 하고 있다.

 

어이없지만 송이는 이른 아침 사무실에서 어떤 미친놈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건물이 떠나갈 듯 소리를 치며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이 미친놈을 붙잡아 경찰에 넘겨야 한다.

일단 제 입술을 마구 유린하고 있는 개 자식을 떼어내야 했다.

발로 차고 따귀를 때리고 머리채라도 잡고 늘어져야 했다.

 

그런데...

왜 그 중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걸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다. 제 몸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너무 두려워서 몸이 마비된 걸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속수무책으로 격렬한 키스를 당하고 있던 송이는

젖 먹던 힘을 동원해 미친놈의 등을 붙잡고 제게서 떼어낸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몸은 한치의 틈도 없이 더 가까이 밀착된다.

 

쿵쿵쿵 쿵쿵쿵

부서질 것처럼 저를 끌어안고 있는 낯선 남자의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다.

그 와중에 치한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있는 송이.

미쳤나?

 

그녀는 자꾸 멍해 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있는 힘껏 그를 밀어낸다.

 

이 미친 자식아!! 이거 놔!!!” 분노에 찬 송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진다.

 

하아 하아,.. 하아...

새파래진 얼굴로 민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송이.

화난 표정으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그 여자를 보는 민준의 눈동자가 금세 슬퍼진다.

 

그래, 너는 나를 모르지....

너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지...

 

그의 검은 눈동자에 엷게 들어차는 물기를 송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바라본다.

이 남자 지금 뭐하는 거야?

 

그의 눈동자에 넘실대는 황폐한 슬픔이 송이의 가슴을 무방비로 훅 치고 들어온다.

갑자기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가슴의 통증에 그녀는 고운 얼굴을 찡그린다.

 

말없이 마주 보는 두 사람.

 

빨리 비명을 지르고, 경비를 부르고, 이 자식을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을까?

비현실적인 기분에 휩싸인 송이는 방금 전의 격렬한 키스를 떠올린다.

이상하고 기묘한 침묵이 지속되는 동안 두 사람은 미동도 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송이야!!”

사무실 입구에서 들려오는 휘경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든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미안 미안, 늦었지?”

송이 옆으로 달려온 휘경은 그녀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는 동시에 낯선 남자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한다.

 

... 왔어?” 더듬거리며 휘경에게 인사를 건네는 송이.

 

그런데... 누구..?”

송이에게 묻는 것인지 민준에게 묻는 것인지 애매한 말투로 휘경이 질문을 던진다.

 

누구야 이 남자..?

못보던 얼굴인데, 외부인인가? 외부인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왜 사무실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송이와 민준을 번갈아 보던 휘경은 이번에는 송이를 보며 묻는다.

 

누구셔?”

? 아니... 나도 잘 몰라...”

몰라? 방금 얘기 나누고 있던 거 아니었어?”

 

눈을 둥그렇게 뜨는 휘경.

 

저 오늘부터 베네치아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도민준입니다.”

정신을 차린 민준이 먼저 자기 소개를 하자 그때서야 휘경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 이탈리아에서 온 학생이에요?”

.”

짧게 대답하는 민준을 잠시 응시하던 휘경은 다시 송이에게 고개를 돌린다.

 

어제 오리엔테이션은 잘했어?”

아니, 나 다른 일정이 있어서 오리엔테이션 참가 못했어.”

그래애...?”

 

휘경의 말끝이 미심쩍은 듯 늘어진다.

프로젝트를 지휘할 책임자인 송이는 어제 오리엔테이션에 참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 도민준이라는 이 남자와는 오늘 처음 만난 건가?

방금 전 사무실에 들어설 때 마주보며 서있던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던 뭔가 이상한 분위기.

표현하기 힘들지만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 묘한 기류.

 

원래 잘 알던 사이야, 두 사람?” 휘경의 음성이 약간 긴장된다.

 

아니, 오늘 아침에 처음 봤어.” 건조하게 희경을 향해 대답한 송이의 시선이 이번에는 무심하게 민준을 향한다.

 

반가워요, 나 이번 프로젝트 책임자 천송이 팀장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민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려 사무실 밖으로 걸어나간다.

 

어 천송이! 같이 가!!” 허겁지겁 송이를 따라가는 휘경.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송이와 달달한 데이트를 즐기려고 정신없이 달려온 그는

계획을 망가뜨린 예상치 못한 남자의 등장에 울화가 치민다.

 

도민준??

뭐 저런 기분 나쁜 샛기가 다 있지?

아무튼 넌 프로젝트 시작도 하기 전에 내 눈밖에 났어!!!

 

----------------------------------------------------------------------------------

 

송이가 나간 후에도 민준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한다.

 

꿈은 아니겠지... 그래, 분명 꿈은 아니다..

망연한 눈빛으로 제 양 손을 내려다 보는 민준.

 

이 손으로 분명히 만져봤잖아? .. 꿈이 아니야.

민준의 긴 손가락이 그녀가 짚고 서 있던 창틀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내 사랑.

이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여자.

 

각오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저를 몰라보는 그 여자를 만나니 마음 한 구석이 비참하게 무너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니 무덤 앞에서 운명과 거래를 하고 죽음을 택한 날로부터

빈소에서 서글프게 웃고 있던 니 영정을 바라보던 날로부터

부산으로 떠나는 너를 잠깐 보기 위해 신 새벽에 너의 집 앞으로 찾아갔던 날로부터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녘에 내 차 안에서 너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지.

한 달 후에 보자며 웃는 너를 껴안으며 키스한 것이 마지막이었어.

그게 1982년 가을이었다.

 

34년이 지나서야 너를 다시 만났는데...

천송이가 되어 있는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사랑했던 시간도, 지난 생의 기억도 오로지 나 혼자만이 기억하고 있을 뿐.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천송이.

아무 것도 모르는 내 여자.

 

----------------------------------------------------------------------------

 

? 설마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정말 널 몰라보니 좀 서글퍼?”

 

특유의 억양이 들어간 서늘한 음성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민준.

운명이라는 작자가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새하얀 모습으로 서서 한 쪽 눈을 찡긋거린다.

 

당신.... “

뭘 그렇게 놀라? 설마 내가 누군지 까먹은 건 아니겠지?”

여긴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니가 하도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또 여기서 뛰어내리기 라도 할까 봐 왔지!”

여기서 뛰어내려요? 장난합니까?”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있는 민준을 운명은 재미있다는 듯 마주 본다.

 

,,, 넌 나름 심각한데 장난해서 미안해 풉!!”

 

이 자는 그동안 단 한번도 민준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운명과의 만남도, 그 여자와의 전생도 혹시 모든 게 꿈은 아니었는지 민준은 수없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여자를 만나자마자 느닷없이 나타나서 킬킬대고 있는 운명이라는 작자.

 

여긴 뭐 하러 왔어요?”

퉁명스럽게 묻는 민준에게 운명은 눈부신 웃음을 지으며 하얀 속눈썹을 깜빡인다.

 

너네 둘이 드디어 만났으니 이제 좀 스토리가 흥미진진 하잖아? 아후 솔직히 그동안 지겨워서 혼났지...”

흥미진진? .... 지겨워?? 당신...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마!”

, 아니 왜 열을 내고 지랄이야? 그럼 니 사랑에 나까지 끙끙대야 돼?”

 

하도 가가 막혀서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팔짱을 끼며 턱을 완강하게 치켜드는 민준.

 

여긴 갑자기 왜 왔어? 나 지금 당신하고 말싸움 할 기분 아니니까...  어서 꺼져!”

오우, 물론 알지! 꿈에서도 못 잊던 여자를 드디어 만났는데 막상 그 여자가 널 알아보지 못하니 완전 미치겠지?”

운명이 깐죽거리며 약을 올린다

 

그래, 맞아! 미치겠어..”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 제자리로 걸어가는 민준.

 

지정된 책상 앞의 의자에 앉으며 프로젝트의 책임자 라던 그 여자의 하얀 얼굴을 떠올린다.

천송이가 되어 있는 그녀는 예니콜 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짙은 마스카라와 화장을 하고 얼굴을 가리듯이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던 예니콜.

오늘 만난 천송이는 화장기 없는 투명한 피부에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 얼굴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찾아낸 게 어디야, ? 너무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해 봐, 오케?”

어느새 민준을 따라온 운명이 그의 책상 모서리에 냉큼 걸터앉으며 종알댄다.

 

하나 물어봐도 돼?” 민준의 목소리는 어느새 그의 눈빛만큼 우울해져 있다.

 

그럼 그럼!! 두 개나 세 개 물어봐도 돼!!” 다리를 까딱거리며 깨 방정을 떠는 운명,

 

천송이를 찾아온 저 남자는 누구야? 혹시.. 그 남자가...”

맞아! 그 남자가 천송이의 인연이야! 바로 하늘이 정해준 배필이지...”

 

민준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잽싸게 대답을 한 운명은 다음 질문이 무엇인지도 다 안다는 듯 덧붙인다.

 

당연히 니 옆에 있는 유세미가 이번 생의 니 인연이고!”

 

단군 왕검의 베프였던 시절부터 늘 실패했다는 우리의 사랑.

민준의 마음이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워진다.

 

하늘이 정해준 인연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여자를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한층 어두워진 민준의 음성에 운명도 웃음을 거두며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건 나도 몰라. 난 약속대로 너희 일에 개입하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하지만....?”

전에 말했잖아? 내가 방해하지 않는다 해도 절대 너희들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한다는 거!

순리라는 게 있거든. 너희가 사랑하게 된다면 너희는 또 다시 정해진 순리를 거스르는 게 되니까..

정해진 운명과 인연을 거부하면 그만큼 보답과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지..”

“...........”

쯧쯧. 그러게 왜 꼭 그 여자 여야만 하냐고? 아니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잔데....

좀 쉽게 살고 싶지 않아? 유세미랑 사랑하고 결혼하면 그렇게 살 수 있어.

그 여자는 이휘경과 이루어지고 넌 니 사랑 유세미와 이루어지.....”

됐으니까 이제 그만 가봐!”

 

차갑게 제 말을 잘라버리는 민준을 보며 운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긴 내 말을 들어먹을 인간이 아니지, 니가.... 암튼 난 이만 가볼게!”

저기... 잠깐만!”

?”

돌아서던 운명은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민준에게 고개를 돌린다.

강렬하게 들이치는 햇살에 운명의 길다란 눈이 한층 더 가늘어 진다,

 

약속 지켜!”

?”

우리 방해하지 않기로 한 약속... 꼭 지키라고!”

아니, 어딜 봐서 내가 약속도 안 지킬 인물로 보여? 기분 나쁘게...”

됐어, 그럼... 가 봐!”

내참! 어디다 대고 건방지게 명령이야?? 약속 지켜라! 가봐라! 너 내 성질 건드리면.. 확 다 엎어버리는 수가 있어!!!”

엎긴 뭘 다 엎어?”

뭐긴 뭐야? 너네들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다 엎어버린다는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해? 분명히 약속 했잖아?”

흥 그깟 약속 따위!! 계약서에 사인한 것도 아닌데 알게 뭐야?”

차아...”

그러니까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라고, 오케이?”

 

눈싸움을 하듯 운명을 노려보던 민준은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깐다.

지금 이 자와 싸워서 이득이 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알았어, 미안해.”

흐흥,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암튼 잘 해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운명은 금세 호들갑스럽게 웃는다.

눈 앞에 섬광이 번쩍이는 듯 하더니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지는 운명.

 

민준은 눈을 깜빡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지만 이미 운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대 회의실>

 

자 여러분, 프로젝트 책임자이신 천송이 팀장님을 소개합니다! 어제 오리엔테이션은 사정이 있어 참석을 못 하셨어요.”

강복자 대리의 소개에 송이가 고개를 까딱하며 웃음을 짓는다.

 

안녕하세요? 천송이입니다. 배네치아 공대와 교환 연수를 하는 이번 프로젝트는 저희도 처음 진행해 보는 방식의 협업이라 회사 차원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이번 3주간의 일정을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유창한 영어로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송이.

세미와 함께 두 번째 줄에 앉아있는 민준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앉는다.

 

우선 이번 주는...”

송이는 학생들과 디자인 경영 팀 직원들 틈에 섞여있는 남자를 힐끗 곁눈질 한다.

 

도대체 저 자식은 뭘까?

프로젝트를 시작도 하기 전부터 정신병자를 만났다.

기습적인 키스를 당한 것도 어이 없었지만 제대로 대응조차 못했다는 건 더 어이없는 일이었다.

설명을 하는 중간중간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올 때 마다 송이의 얼굴이 화끈거린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지만 그 남자와의 키스는 꿈결처럼 황홀했다.

황홀함과 익숙함, 그리고 깊은 슬픔이 함께 어우러진 이상한 키스였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제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올 때 마다 송이는 당황한다.

 

미친 자식....

 

---------------------------------------------------------------------------------

 

저 미친 놈의 이름은 도민준이다.

 

학생들이 한 명씩 자기 소개를 하던 중 그 남자의 차례가 되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저를 도민준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겉으로 봐서는 멀쩡하다.

연수 첫날, 사무실에서 팀장에게 기습 키스를 할 만큼 정신 나간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기가 막히게 당한 것이 억울해서 입술을 꼭 깨무는 송이.

덕분에 죄 없는 휘경에게 성질을 내며 화풀이를 하고 말았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달콤한 데이트를 꿈꾸며 달려온 휘경은

뭔가에 화가 잔뜩 난 송이를 달래다 결국 회의 시간이 다가와 올라가야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송이는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이번 프로젝트는 왠지 시작도 하기 전부터 기분이 이상하다.

학생들의 소개가 끝나자 송이는 강대리와 함께 학생들을 데리고 신제품 쇼룸으로 이동한다.

복잡한 속마음과는 반대로 그녀의 겉모습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하다.

 

앞장 서서 복도를 걷는 내내 저를 쫓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송이는 무시한다.

손끝에 힘을 주며 마음을 다잡는 송이.

만약 다시 한 번 그런 짓을 한다면 저 자식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

 

긴 하루가 끝났다.

 

첫날 일정을 마친다는 강대리의 외침을 들으며 민준은 마치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 아침 그 여자를 만나고, 그리웠던 그 입술에 키스하고, 하루를 그 여자와 보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내내 학생들과 함께 있던 그 여자는 전무님이 찾는다는 여비서의 연락을 받고 올라간 후 내려오지 않았다.

 

민준아, 오늘 첫날이라 환영회 겸 회식 있대! 삼겹살 먹으러 간다는데 애들이 잘 먹으려나? 저녁 먹고 노래방도 간대!!”

세미의 목소리는 무엇 때문인지 잔뜩 들떠있다.

 

여기 팀원들도 다 가는 거야?”

, 강 대리님 이랑 서 과장님, 그리고 아까 봤던 상무님도 온대!”

팀장은?”

팀장?? ..팀장님은 나중에 노래방으로 온다 던데?”

 

세미는 그답지 않게 세세한 질문을 하는 그를 의아한 표정으로 힐끔 바라본다.

 

---------------------------------------------------------------------

 

<회식 후 노래방>

 

회식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 여자가 노래방으로 왔다.

그런데 그 여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침에 만났던 남자가 그녀와 함께 나타났다.

강 대리는 수선을 피우며 천송이와 함께 온 그 남자에게 일행들을 일일이 소개한다.

민준은 S전자 기획팀의 이휘경 전무와 악수를 나눈다.

 

뇌를 갉아먹을 듯 죄어오는 엄청난 두통.

천송이는 정말 내가 찾고 있던 그 여자가 맞는 걸까? 혹시 다른 사람은 아닐까?

지치도록 찾아 헤매던 그 여자를 드디어 찾았는데 왜 모든 게 허상 같을까?

 

분명히 내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그 여자가 혹시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 그 입술의 느낌, 손 끝에 닿던 살의 감촉까지.. 분명히 그 여자가 맞는데...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까 만났던 운명도 분명히 그 여자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내가 아까 운명을 실제 만나긴 만났던 걸까? 어젯밤에 꾸었던 꿈은 아니었을까?

 

혼란해진 머릿속에서 윙윙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난다.

 

------------------------------------------------------------------------------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온 민준은 낯선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그의 뺨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간다.

한참 만에 안으로 다시 들어온 민준은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이층에 올라 와 노래방 입구로 걷던 그는 마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던 송이와 정통으로 마주친다.

그녀의 등뒤로 닫히는 유리문 안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음악 소리.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자 심장이 내려앉을 듯 놀랐지만 송이는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다.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를 무시하고 화장실로 향하는 송이.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민준은 갑자기 후다닥 그녀를 따라가 송이의 팔을 잡아챈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분노로 달아오른다.

이 자식이 정말....

 

뭐야, 이거!” 제 팔을 붙잡고 있는 그를 보며 어금니를 무는 송이.

 

하지만 넋이 나간 듯한 그의 얼굴은 송이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송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민준.

그녀의 목덜미로 민준의 손이 다가온다.

 

그를 밀쳐내려고 송이가 팔을 뻗는 순간 낮게 깔린 우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들려온다.

 

머리 좀.... 내려 봐...”

...?”

순간 어리둥절해진 송이의 어깨를 꽉 잡으며 그가 힘겹게 다시 말을 잇는다.

 

이 머리카락... 좀 풀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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