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올린 미담상플 '숨겨야 하는 말' 후속이야.
미비덕이라지만 여기엔 새주가 안 나옴ㅎㅎ
비담 마음이 어땠을까 싶어 써봤어. 잘 읽어줘!
ㅡㅡㅡㅡ
서고문을 박차고 나온 비담은 무작정 뛰었다. 제 마음을 미실에게 들킨 것도, 그 마음을 조롱당한 것도 다 싫었다. 이런 마음으로 공주의 처소에 갈 수는 없었다. 비담은 덕만의 처소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나무를 골라 타고 올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백년은 족히 된듯한 나뭇가지가 비담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본 궁은 평화로우면서도 분주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궁녀, 시위부 등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디로 향하는 걸까. 모두들 불러주는 곳이 있었다. 나는 늘 불러주는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온 인생인 걸까, 비담은 자조했다. 그래서였을 거였다. 덕만이 자신을 부르고 필요로 했을 때 도저히 떠날 수 없었던 것이. 비담은 먼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의 햇살과 바람이 뺨을 간지럽히자, 오랜만에 궁 밖에 나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제 숨이 돌아왔다.
눈을 감고 얼마간 나무에 기대어 있다보니, 어느새 처소 앞에 다다른 덕만이 보였다. 비담은 날랜 야행성 동물처럼 가볍게 몸을 날려 나무에서 내려왔다. 한손에 공주의 필사본을 꼭 쥔 채 비담은 처소 앞에 섰다. 유화 한 명이 덕만에게 비담이 왔음을 고했다. 흘긋 비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비담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공주의 방으로 들어섰다.
- 왔느냐. 네가 먼저 와 있을줄 알았는데. 서고에 오래 머물렀던 모양이구나.
- ...... 예, 공주님. 늦어서 송구합니다.
- 무슨 소리냐. 네가 그리 공부하고 익히니 내게 큰 힘이 된다. 앉거라.
덕만은 비담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사실 화랑에 대한 것이야 알천과 유신이 더 빠삭했다. 하지만 서라벌 귀족 집안에서 나고 자라 생각의 틀이 확고히 잡혀 있는 두 사람에 반해, 비담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비담 그 자신처럼 유연하고 신선하고 거침 없는 생각들이 쏟아졌다. 황실이 아닌 사막에서 나고 자란 덕만과 쿵짝이 잘 맞았다. 무엇보다도 비담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풀기에 마음이 편했다. 검열당할 걱정 따위는 접어두어도 좋았다. 그래서 비담과 덕만이 먼저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친 후, 알천과 유신이 동참하여 생각을 다듬는 편이 훨씬 수월했다.
덕만은 진흥제가 처음 창립할 당시의 화랑도와 그 변천을 비담에게 보였다. 어제 밤새 그림으로 정리한 내용이었다. 몇 번의 조직도 편제가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었는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한참을 얘기하던 덕만은 의아했다. 왜 비담이 아무 말도 없지? 덕만은 고개를 들어 비담을 바라보았다. 비담의 눈동자가 전혀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다. 덕만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낯설고 먹먹한 표정이었다.
- 비담. 안색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 ......아닙니다, 공주님. 제가 잠시 딴 생각을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 혹시 서고에서 새주와 안 좋은 일이 있었느냐.
- 그럴 리가요. 설사 그렇다 해도 당하기만 할 제가 아니란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그래. 알겠다. 그럼 잠시 바깥바람을 쏘일까? 나도 잠을 푹 자지 못해 머리가 맑지 않구나.
어느새 해가 머리 위에 거의 다다른 시각이었다. 덕만과 비담은 작은 후원을 함께 거닐었다. 멀리서 바라보기에 그림 같은 한 쌍이었다.
- 그런데 비담.
- 예, 공주님.
- 아직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은 모양이구나. 비재 때 다친 것이 여직인 것이냐?
- ...... 어찌 아셨습니까? 그저 오래 걸으면 조금 시큰거리는 정도입니다. 평소처럼 산도 타고 수련도 계속 하고 있는걸요.
- 그냥. 보인다. 원래 네 걸음보다 보폭이 좁다. 발자국 소리도 다르고.
덕만이 저를 이렇게 유심히 살피고 있었던가. 제 속을 헤짚기나 하는 어미를 방금 만나고 온 비담은, 덕만의 말에 온 마음이 일렁거렸다. 덕만은 언제나 환한 빛으로 제 마음을 비춰주는 해와 같은 여인이었다. 따르지 않을, 연모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 서고에서 새주를 또 만나 놀랐다. 그리 통찰력이 깊은데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다니 참 무서운 사람이다.
- 제가 보기엔 공주님이 훨씬 더 영민하고 대단한 분입니다. 심지어 백성을 가여이 여기는 마음까지 가지셨으니, 가지신 것 자체가 이미 다릅니다.
- 너는 나를 늘 칭찬해주는구나. 다른 이들은 입바른 소리만 하는데.
- 저만큼 입바른 소리를 하는 이가 또 어디 있다고요. 저는 사실만 말합니다, 공주님
- 그래, 고맙구나. 네 덕에 내가 웃곤 한다.
덕만이 봄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연모란 지독한 투쟁이라고 했던가. 이런 투쟁이라면 해볼만 하다고 비담은 생각했다. 저 웃음을 내가 평생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투쟁보다도 값지고 의미 있지 않겠느냐고, 비담은 마음 속으로 미실에게 물었다. 비담도 덩달아 해실 웃으며 후원의 꽃 몇 송이를 날래게 꺾었다. 그리고 덕만 앞을 막아서더니 공주의 윤기 나는 머리칼 사이에 꽃송이를 꽂아주었다. 검고 부드러운 비단 위에 고운 색색의 꽃을 수놓은 듯 했다. 덕만은 잠시 얼어붙은듯 서있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지난번에도 꽃 선물을 주더니. 이러다 후원의 꽃이 남아나질 않겠구나.
- 공주님이 좋아하신다면 후원의 꽃이 대수입니까. 온 서라벌 꽃도 꺾어올 수 있습니다.
- 모르는 이들은 너더러 비정해 보인다 하나, 내가 보기에 너는 참 다정한 사람이다. 훗날 네 내자가 될 사람은 참으로 복 받은 여인일 것이야.
내자, 그 말에 비담이 멈칫했다. 산으로 들로 스승을 따라 떠돌던 시절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옆자리, 그러나 덕만을 만난 이후 감히 꿈을 꿔보게 된 바로 그 자리. 제 옆자리를 누구로 채우고 싶은 것인지, 공주께서는 짐작이라도 하십니까. 비담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고백을 누른 채, 공주의 곧고 정갈한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덕만이 고개를 돌려 비담의 시선을 올곧이 받아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비담이었다.
- 예. 아마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인으로 아껴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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