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번역] Argos Ch.8

치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2.21 19:59:15
조회 1020 추천 22 댓글 11

아르고스


[원문링크]


[번역링크모음]


Argos Ch.1 (텍본)

Argos Ch.3 - 1 (텍본)

Argos Ch.3 - 2

Argos Ch.4 - 1

Argos Ch.4 - 2

Argos Ch.5

Argos Ch.6 - 1

Argos Ch.6 - 2

Argos Ch.7 - 1

Argos Ch.7 - 2

Argos Ch.7 - 3









The Archer – Part I



“엄마, 제발요. 네?”



“메리다, 이 얘긴 이미 끝났잖니. 마상 경기에 참여하는 건 공주가 할 일이 아니야. 제정신으로 대체 누가 감히 너와 붙으려고 들겠니? 경기에서 이기는 게 큰 명예이긴 하지만, 왕족에게 수치심을 주는 건 큰 불명예잖니.”



“엄마, 제가 창피를 당할 일은 없어요. 대담하게 활에 실을 매는 궁수란 궁수는 전부 꺾을 거라구요!”



“메리다,” 엘리노어 여왕은 한숨지으며 책을 내려놓았다. 여왕은 선실 창문 바깥을 노려보며 우울하게 있는 제 딸에게 걸어갔다. “난 네가 이 땅 위의 어떤 궁수보다도 뛰어난 재능과 기술을 가졌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우승자에게 걸린 상금이 얼마가 되었든 간에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공주에게 온 힘을 다해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 상대는 전부 일부러 져줄 거다. 거기에 무슨 명예가 있겠니?”



“그 새가슴들이 제가 이기도록 해 줄 거란 말씀이세요? 그것참 용감하네요. 자기 부인이 자랑스러워하게 하지도 못 하는 훌륭한 전사들이 분명해요.”



“성급하게 판단 내리지 말거라, 메리다. 일반 사람들의 삶은 공주의 삶과 달라. 게다가, 네가 금화 이만 냥을 쓸 데가 어디 있다고?”



“제가 엄마한테 새 드레스나 하나 사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메리다는 환하게 웃으며 창문으로 향했던 고개를 엄마에게 돌렸다. “그러니까, 마녀의 저주로 찢어진 멋진 녹색 드레스는 제가 빚진 거잖아요.”



“바보같이 굴지 말거라, 아가. 넌 그 낡은 옷을 대체할 옷을 사는 것보다 더 나은 곳에 돈을 쓸 게 분명해. 새 활을 주문할 거니? 새 화살? 그 돈이면 향나무로 만든 화살을 살 수 있을 거다.”



“엄마, 향나무 화살까진 필요 없어요. 물푸레나무면 충분할 거라구요. 마호가니 화살도 거의 부숴 먹었잖아요. 향나무 화살을 사는 건 낭비에요.” 메리다는 다시 수평선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냥 저축해 둘거에요.”



“글쎄다, 금화 만 냥만 지참금으로 가져가도 넌 분명 가장 매력적인 신부가 될 텐데.”



“엄마!” 메리다가 짜증 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엘리노어 여왕에게로 다시 몸을 돌렸다. “말했죠, 전 결혼 안 한다고요. 결혼한다 하더라도 절대 지참금을 내어주진 않을 거예요.  전 공주에요! 세상에, 쪼끄만 나라 군주를 데려가는 수고를 해주겠다는데. 돈을 내야 하는 건 그 사람들이에요.”



“부족장들과 그 아들들이 들으면 아주 실망할 소리를 하는구나.” 엘리노어 여왕은 평소답지 않은 웃긴 목소리로 답했다. 메리다는 위엄있는 어머니가 빈정댈 줄도 알고 있었던 건지 확신하지 못한 채 의아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넌 언젠가 아주 외로운 여왕이 될 거야.”



“칫. 별 일 없을 거예요! 시대는 변한다구요, 엄마. 지금 시대엔 엄마에게 왕족 남편이 필요하진 않아요. 그러니까, 에르싸라는 이 아렌델의 여왕은 혼자서 멋진 일을 하고 있잖아요.”



“엘사 여왕 앞에서는 ”에르싸“라고 칭하지 말거라, 아가. 아마 아렌델 시민들 곁에서도 그러지 말아야 할 게다. 그리고 그건 똑같이 비교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엘사 여왕은… 말했듯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요? 전 활이 있잖아요. 분명 화살 한 발도 얼음송곳만큼 치명적일 거예요.”



“메리다, 엘사 여왕은 왕국을 통째로 얼렸어. 궁수 한 명과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단다. 솜씨나 재능이 얼마나 되든 간에 말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엘사 여왕에 대해 들어 보니 너와는 한참 다르더구나. 엘사는 올바른 공주였고, 지금은 올바른 여왕이지.”



“저도 들은 건 있어요, 엘사 여왕은 마녀라고.” 메리다는 중얼거리며 쿠션 모서리를 꼼질거렸다. “곰으로 변하는 저주를 걸든 말든 엘사 여왕은 아무튼 아주 상냥한 여왕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 말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렴, 메리다. 엘사 여왕은 마녀가 아냐. 엘사는 그냥… 말하자면, 축복받았달까? 엘사 여왕이 그… 대관식을 힘겹게 치렀다 해도 그게 아렌델이 어떤 지역인지를 보여주는 건 아니란다.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 중엔 좋은 이야기도 많아. 모든 마법이 위험하진 않단다, 메리다. 듣기로 시민들은 여왕을 대단히 좋아하는 모양이더구나. 능력 있어, 위엄있어, 능숙해, 외교술도 좋아, 게다가 공손하지, 우아하지, 여왕이 갖춰야 할 그 외 모든 것까지 가졌잖니. 엘사 여왕을 롤 모델로 삼아 직접 수업이라도 들어보지 그러니?”



“엄마, 앉은 자세 선 자세 먹는 자세까지 다 고쳐주는 위풍당당하신 여왕님이 필요하진 않아요. 엄마한테 다 배운걸요.”



“그 말이 나와서 말인데, 메리다. 아렌델 왕궁에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구부정한 자세로 있지 말아주렴. 넌 던브로치의 대사고, 하이랜드는 생각만큼 야만적인 곳이 아니라고 우리가 세상에 보여줘야 하니 말이다.”



바로 그 순간에 퍼거스 왕이 한 손에는 거대한 클리버 나이프, 한 손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피를 뚝뚝 흘리는 고기 몇 조각을 들고 선실로 쳐들어온 건 당연한 순서였다. 던브로치 부족장이자 하이랜드의 지배자이자 영역의 수호자이자 곰의 왕으로 여러 지역에 알려진 퍼거스가 독특한 외향을 드러냈다. 6피트는 족히 넘는 키에 몸집은 자신이 사냥하는 맹수들만 했으며, 근육으로 가득 찬 거대한 허리는 마치 대식가의 괴물 같은 식탐을 자랑하는 배처럼 보였다. 얼굴에 돋아난 북슬북슬한 턱수염과 매력적인 콧수염은 집 뒤의 붉은 폭포만큼이나 붉었으며 흉포한 행색을 더해주기까지 했다. 그 호전적인 힘의 기운은 등에 매인 양날 전투 도끼 때문에 더욱 부각되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퍼거스가 애처럼 징징대며 엘리노어에게 달려드는 걸 막지 못했다. 핏빛 곱슬곱슬한 턱수염 아래로 부루퉁한 표정을 아주 빛내면서 말이다.



“엘리노어! 방금 통지가 왔소! 우리가 항해하는 속도대로면 사흘 후에 망할 바이킹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거라는군! 솔직히 이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야? 그 자식들은 버크에서 출발했다고. 버크에서! 그 빌어먹을 섬은 희망 없는 북쪽으로 12일에 얼어 죽을 서쪽으로 조금 더 가야 있는 곳이라고. 창피해 죽을 지경이군! 그 뿔모자 녀석들이 대체 어떻게 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단 건지 모르겠는데?”



“아빠, 공연히 속태우지 마세요.” 머뭇거리며 말하는 메리다의 눈은 퍼거스의 손에서 툭툭 떨어지는 핏방울과 연골을 거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바이킹들은 몇십 년 간 우리 영토를 침범한 적이 없어요. 더는 우리의 적이 아니라구요.”



“메리다, 그 악마들이 힐랜드를 쑤시고 다닐 때는 네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단다. 부족들을 던브로치 깃발 아래 결합하는 데 내가 애썼기 때문에 우리가 그 전투에서 간신히 이길 수 있었던 거야. 크으, 그 날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그 어두운 밤에 모든 족장이 내 전투용 천막에 모여 있었단다. 누가 어디에 설 것인지, 어느 부족이 선두에 설 것인지 케케묵은 수칙에 별 시답잖은 이야기 왕창으로 모두 논쟁을 벌이며 싸우고 있었지. 두 시간을 거기서 죽치고 앉아있던 끝에 적들이 우리의 집 주위에 왕창 모여들면서 팬지꽃이 사박대는 소리를 들은 난 충분히 기다렸단 결단이 섰고-”



“-도끼를 뽑아 들어 탁자에다 아주 세게 처박으셨지요. 도로 뽑지 못하셨을 정도로. 그 얘긴 알아요, 아빠. 제 말은 그냥 바이킹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렇게 나쁠 일은 아니란 얘기였어요.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거대한 도마뱀이나 타고 다니는 야만족 놈들, 전 지역의 모든 왕국 앞에서 던브로치를 욕보이기만 해봐라. 미쳐 날뛰어줄 테니!” 퍼거스는 꽥꽥 소리치며, 마치 신더러 자기 주장을 반박해 보라는 듯 생동감 있게 팔을 흔들어댔다.



“퍼거스. 여보, 대장부 명예를 그렇게 살리고 싶으면 그 돼지 창자부터 내려놓으세요.” 엘리노어는 이젠 지쳤다는 듯이 말했다. “바이킹들이랑은 마상 경기 때나 많이 투닥거리시구요. 그땐 원하신다면 난투 구경이라도 꼭 같이 해 드릴 테니까. 바이킹이 아주 쓰러지라고 하이랜드 사람이 워해머로 두들겨 패는 구경은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거잖아요.”



“엘리노어!” 퍼거스가 아연실색하며 말했다. “적어도 당신만은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상님이 부끄러워하실 평판은 가질 수 없단 말이오! 아무튼, 그 어떤 바이킹도 하이랜드 사람을 이긴 적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요! 당장 선장에게 가서 말해야겠소! 속도를 높이라고! 모든 돛을 활짝 펼치라고!”



그 말과 함께 퍼거스는 발꿈치로 홱 돌아서서 선실을 뛰쳐나갔고, 쿵쿵 내려찍는 발걸음이 바닥을 세게 뒤흔든 탓에 퍼거스가 폭풍처럼 지나간 자리의 랜턴이 달가닥거렸다. 엘리노어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고, 하얗게 세어가는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메리다, 곧 돌아오마. 네 아버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영영 가버릴까 걱정되는구나. 아버지는 항상 배 타는 걸 싫어하셨어. 배만 타면 불안해하셨거든. 넌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엄마, 이미 갑판 온 천지에 토했는걸요. 첫날에 두 번이나 그랬잖아요.”



“얘야, 그건 곰이 겨울잠을 자도 될 만큼 고기를 네 주둥이에 쑤셔 넣고 있어서 그랬을 뿐이잖니.” 엘리노어가 키득대며 메리다의 코를 귀엽게 비틀었다. 메리다는 입을 삐죽거리며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 코를 감싸고 매만졌다. “곧바로 돌아올게. 말썽부리지 말고 있거라. 시간이 남으면 네 소개랑 인사법을 점검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튼 타국의 왕가에게 공주로서 좋은 첫인상을 남겨야 하잖니.”



“공주니까 이건 해야 한다, 저건 하지 말아야 한다, 왜 이렇게 많은 거예요?” 메리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엄마, 솔직히 전 엄마가 어떻게 견뎌내는지 모르겠어요.”



엘리노어는 그 말에 웃으며 우아하게 입을 가렸다.



“다 연습한 결과란다, 메리다. 모든 게 연습에 달렸어.” 왕비는 선실 문을 닫으며 딸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얌전히 있거라, 메리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흥.” 메리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부루퉁하게 팔짱을 낀 메리다는 천장을 노려봤다. “연습이라니. 꼭 연습만 하면 개나 소나 올바른 공주가 될 것처럼 말야. 새 여왕이라는 사람도 엄마처럼 별거 없을 게 분명해. 갑자기 여왕처럼 행동할 수 있을 리 없다구. 대관식을 치른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잖아. 오히려 내가 완전 공주다워야 했을 때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서툴고, 말도 더듬고. 온갖 귀족들과 나라들의 혼을 쏙 빼놓는 거지. 누가 알겠어?”



한숨지으며 배를 깔고 몸을 뒤집은 메리다는 텅 빈 엄마 자리를 우울하게 쳐다보았다.



“엄마는 잘 알지만, 엄마는 엄마야. 엄마는 몇 년간 왕비였어. 도와줘야 할 아빠도 있구. 엘사 여왕은 여왕 엘사일 뿐이고, 나이는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아. 여왕다울 리가 없잖아?”







------------







메리다는 여태 만난 사람 중 엘사 여왕이 단연코 가장 따분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누군가가 명성으로 여왕을 앞선다면 그 명성은 진실성을 의심받았다. 아렌델의 신비한 여왕을 둘러싼 소문은 각양각색으로 일관성이 없었지만, 온 지역을 통틀어 엘사 여왕이 단연코 가장 흥미로운 통치자라는 부분은 모든 이야기에 꼭 들어가 있는 듯했다. 여왕은 왕국을 통째로 얼렸었고, 충동적으로 얼음과 눈을 이용해 골렘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듣기로 여왕의 힘은 전문 암살자 집단을 붕괴시킬 만큼 강했다고도 하고, 그 두뇌는 머릿속으로 성채 하나를 그려낼 만큼 영리했다고도 한다. 듣기로 여왕의 미모는 너무나도 찬란해서 여왕을 바라본 남자는 누구든지 서리로 만든 의복을 입고 보기 드문 겨울철 햇살로 머리를 땋은 차가운 여왕에게 마음을 빼앗길 거라나.



메리다가 부모님과 함께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허락받았을 때, 왕좌에 앉아 있던 여성은 메리다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초자연적인 여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의를 표하며 찾아온 모든 왕국의 고위 관료들과 함께 입장한 그들이 왕좌에 다가섰을 때, 메리다는 작년부터 온 지역에서 입에 오르내리던 여왕을 쳐다보았다. 여왕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혼을 쏙 빼놓는 마력이라기보다는 그냥 여성에게 걸맞은 어여쁜 품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드레스도 비록 얼음으로 장식되었다고는 하나 그 짜임은 단순했고, 어깨와 팔이 드러났지만 나이 든 이모 코이라가 휙 생각날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여왕의 머리칼은 정말 금사처럼, 궁수에게 내려지는 금처럼 생겼… 는데 뭐, 잘 보이진 않았다. 그 유명하신 머리칼은 대부분 뒤로 당겨져 단단하게 묶여 있었고, 위에 얹혀진 왕관이 시야에서 금발을 가렸다.



물론 메리다는 이 모든 걸 깨끗하게 용서했을 것이다. 엘사 여왕이 듣던 명성대로 신비하고 마법 같은 모습을 보여주어 실망감을 싹 날려버리기만 했다면 말이다. 안타깝게도, 아렌델의 여왕이 입을 열자마자 메리다는 제 어머니가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불편한 위치에 자신이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렌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퍼거스 국왕님, 엘리노어 왕비님.” 여왕은 우아하게 말했다. 엘사는 왕좌에서 일어나 메리다의 아버지 앞에 서려고 계단을 내려갔고, 그 아버지는 빌어먹을 뻣뻣함을 정중하게 보이도록 애쓰고 있었다. “시간을 내어 마상 경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셨길 빌어요.”



“뭐, 음, 고맙소, 아주 친절하신 아가씨, 아니 미안하오, 여왕님. 여행은 나쁘진 않았고, 모든 게 예상한 바였소. 사실,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별문제는 없었잖소, 에?”



좌절한 엘리노어는 퍼거스의 콧대를 꼬집어버리고 싶단 충동을 꾹꾹 참아내고 있었지만, 메리다는 웃음을 참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너무 어색해 보였던 것이다. 아버지 나이에 절반도 채 안 되는 데다 아버지가 간신히 끌어모을 만한 격식과 존경을 지닌 여왕에게 아가씨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제 늙은 아버지는 왕에 걸맞게 진심으로 동맹국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한 손에는 널찍한 칼 한 손에는 둔기를 들고 적을 향해 돌진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는 걸 메리다는 알고 있었다.



역시나 엘사 여왕은 분위기를 다 망치려 드는 퍼거스의 억지 예절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실제로 여왕은 얼굴에 우아한 미소를 그대로 띠고 있었으며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메리다는 여왕의 얼음 마법이 여왕의 얼굴을 고정시키기 위해 얼굴 근육을 늘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이지요. 편안하게만 도착하셨다면 다 괜찮답니다. 여행이 즐거웠던 만큼 이곳에서 머무르면서도 즐거우시길 바랄게요. 이번 마상 경기의 목적도 결국에는 즐거움이니, 이번 경기를 통해 방문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즐거움을 얻어가시길 빕니다. 하이랜드 경기자들의 실력을 기대해도 될까요?”



“음, 물론이오, 당연한 것 아니겠소. 경기를 위해 소수 정예를 뽑아왔다오! 가장 뛰어난 창기병에, 궁수에, 창지기에 싸움꾼까지! 하이랜드의 그 어떤 남자에게도 싸구려 대장부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해주겠소! 사실,” 메리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얼굴을 찡그렸다. 퍼거스의 목소리가 고함 수준에 접어들고 있었다. 공주는 왕의 남성 호르몬을 분출시키는데 전투에 관한 이야기나 다른 나라의 청중만 한 게 없다는 걸 떠올렸다. “사실, 이렇게 말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아까 말은 모든 왕국들에 까발려버리시오. 어차피 저놈들 부족이 가진 창은 제아무리 길어봐야 좆-”



퍼거스,” 엘리노어가 이 악문 소리를 하며 남편을 조심스레 꼬집었다.



“조, 좋질 않으니 말이오.” 퍼거스는 어눌하게 말을 끝냈다. 자기 귀족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야한 농담을 이 교양있으신 분들은 잘 못 받아들인다는 걸 머리에 새기면서 말이다. 퍼거스는 헛기침하며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고, 옆에 서 있던 엘리노어는 죽을 준비를 마친 듯했다.



이 광경은 메리다가 (거의 있지도 않은) 자제력을 온통 끌어모아 표정을 굳히고 여느 나라 공주들 같은 자세를 취하게 하였다. 바닥을 구르며 숨을 못 쉴 정도로 웃는 것만이 메리다가 원하는 전부였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엘사 여왕은 시선에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사실, 알현실에 있던 대부분의 왕족과 귀족들과는 달리 여왕은 특히나 침착해 보였다.



“그렇게 호언장담하신 게 사실인지는 퍼거스 국왕님의 전사들이 증명할 거라 믿어요. 그래도, 제 말이 실례가 될진 모르겠지만, 국왕님께서 몸소 겨루러 나오지 않으신다니 놀랍네요. 국왕님처럼 유명한 전사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거나 난투에 참여하지 않는 건 드문 일인데요.”



“아아, 뭐어, 그거는, 이름 올리는 걸 심각하게 고려해 보긴 했지만, 그 뭐냐, 토론을 오래 한 후에, 난 말이오,” 퍼거스는 왼손을 슬쩍 내려다봤다. 자신의 투박한 화법을 고치기 위해 엘리노어가 시킨 대로 단어 몇 개를 골라서 적어놓았던 것이다. “난 내 위치를 재고해서, 청년들에게 자신을 갈고닦을 기회를 줘야겠다고 판단을 내렸소. 모든 영광을 나 혼자서 독차지한다면 내가 무슨 왕이 되겠소, 에? 우리 전사들은 전부 힐랜드와 왕관을 대표할 능력이 있소.” 퍼거스는 침을 꿀떡 삼키고는 알현실의 다른 모든 이를 의식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숨을 깊게 들이쉰 퍼거스는 마치 입으로 말하지 못한 것을 덩치가 말해주길 바라는 듯 몸을 똑바로 폈고, 그 순간 메리다는 엘사가 아주 작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확실히, 퍼거스는 거대한 사내였고, 메리다 자신은 숲에서 가장 키가 크진 않지만 그래도 이 스코틀랜드 공주의 외형에는 몇 년간의 궁술로 일궈진 탄탄한 근육선이 잡혀있었다. 엘사는 퍼거스의 거대한 덩치에 정말로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메리다는 여왕의 늘씬한 허리를 보며 자신이 손으로 못할 일은 고작 그림 그리기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날씬한 자신의 몸은 궁술에 입문할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머스킷이나 석궁이 당신을 노린다면 체구가 조그만 게 유리할 것이다), 메리다는 5살 때 자신이 연습하던 활을 과연 엘사가 당길 수 있을지 큰 의문이었고, 하이랜드 사람에게 받은 비거리가 자랑인 큰 활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또다시 엘사는 마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녀는 외형만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메리다의 경험이 그걸 입증했었다. 자기 대신 싸우도록 불사의 곰을 소환할 수 있는데, 자기가 노파라거나 등이 굽었다거나 뼈가 다 도드라져 보인다는 게 무슨 문제일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메리다를 공상에서 끌어내었다. 항상 외교관이었고 항상 믿음직스러운 아내였던 엘리노어는 앞으로 나와서, 엘사 여왕의 시선을 전장보다는 집에서 업무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던 자신에게 맞춤으로써 퍼거스를 난처한 상황에서 구해냈다.



“물론, 첫 번째 이유는 아렌델의 새 여왕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였지요. 애도와 축하의 편지를 보내드리긴 했지만, 저흰 불행히도 여왕님의 대관식에 참가하지 못했답니다. 그런데도 저희를 이 마상 경기에 초대해 주셨고, 그럼으로써 저희가 여왕님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으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엘사 여왕은 엘리노어에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 여유롭고 우아한 태도란 메리다에게 없는 것이었으나 제 어머니에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메리다는 마치 어머니에게서 오래전에 사라진 모습을, 똑 닮은 금발 쌍둥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왕비님의 편지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사려 깊고 친절한 편지를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왕비님의 지지에 대단히 감사드리고, 왕비님께서 이곳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칭송받으시는 엘리노어 여왕님을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왕비님의 외교술을 당할 상대가 없다고들 하던데, 이제야 직접 뵙게 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이곳에 와 주실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엘리노어는 품위 있게 살짝 고개를 숙였고, 메리다는 두 사람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여왕이 닮았다는 것에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전사들의 왕이시여, 제발 제가 자라서 저렇게 된다고 말하진 말아주세요.”



“오히려 제가 영광이지요, 엘사 여왕님. 혹시 여동생인 안나 공주님이 어디 계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희는 오늘 두 분 모두 뵙기를 바랐거든요.”



“제 여동생은 불행히도 다른 쪽으로 일이 있답니다, 엘리노어 왕비님. 안나는 제 옆에 서서 하이랜드 왕족분들과 다른 고위 관료분들을 뵙고 싶었던 만큼 부루퉁해 있지요.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그 말인즉슨,” 메리다가 생각했다. “다른 년들보단 약삭빨랐던 공주는 이 지루한 접견에 참석을 안 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기로 작정했단 거군.”



“이해합니다, 여왕님. 진심으로요. 나중에 안나 공주님을 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이참에, 괜찮으시다면 저희 첫째 딸 메리다 공주를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하이랜드의 후계자입니다.”



그리고 메리다는 어머니가 방금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두 부모 사이에 서게 되었고, 갑작스레 아렌델의 여왕과 얼굴 대 가슴으로 마주 보고 있는 (하이힐은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메리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엘사 여왕의 눈을 마주 보려고 턱을 들어 올렸다. 어머니의 손이 자신의 조그만 등을 부드럽게 미는 느낌이 들었는데, 허리를 곧게 펴라는 의미였다. 금발 여성은 메리다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거리고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아렌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메리다 공주님.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시길 바라요.”



메리다는 항상 자신이 아버지의 소녀가 되는 걸 상상했었다. 그랬다. 메리다는 어머니처럼 되길 열망했다. 외교술에 아주 능통하고 박식하며, 복잡한 단어를 여럿 섞어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말을 듣고 싶어 하도록, 자신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언변술을 지닌 어머니 말이다. 하지만 진심에 진심을 더해서, 어머니는 퍼거스의 아내였다. 엘리노어 왕비의 인도가 사라지자 메리다는 완전히 얼어붙었고, 항해하는 동안 힘들게 준비해 온 말과 인용구는 요정처럼 뿅 하고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뵙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메리다가 불쑥 말을 꺼내며 넘어지듯이 인사를 올렸다.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에 메리다는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고,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해야 했던 것 같다고 갑작스레 기억해냈다. 번개처럼 몸을 일으킨 메리다는 드레스 끝자락을 꽉 잡고는 팔을 확 꺾으며 서투르게 절을 올렸다. “그러니까, 뵙게 되어서 제가 좋 - 기쁘다구요, 여왕님. 여왕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엄청, 그러니까, 많이 들었어요.”



끈 모자는 필요 없다고 어머니를 설득시켰던 걸 메리다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에서 얼렁거리는 야생의 곱슬 갈기 덕분에 발갛게 상기된 볼을 남에게서 가릴 수 있었다. 메리다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얼굴에서 핏기를 빼려고 애를 썼다.



“위대한 스코틀랜드 전사는 사랑에 빠진 계집애처럼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소녀여, 정신 차리고 남들 곤란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거라!”



엘사 여왕과 엘리노어 왕비가 닮았다는 가져본 적 없는 의심을 메리다가 하였더라면, 여왕의 반응을 들었을 때 그 의심은 차츰 사라졌을 것이다. 달랑거리는 붉은 곱슬머리 사이로 눈의 마녀를 슬쩍 올려다본 메리다에게는 인간이기 충분할 정도로만 미소 짓는 마녀의 얼굴이 보였지만, 여전히 정중한 태도만큼 우아했다. 여왕은 손을 들어 알현실 곳곳에서 터져 나온 웃음을 침묵시키고는 왕족으로서 타국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여왕의 절과 함께 인사를 올렸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소녀의 서툰 솜씨와는 다르게 아렌델 여왕은 물 위에 내려앉는 백조처럼 우아했으며, 연습한 것 치곤 동작이 물 흘러가듯 부드러웠다. 엘리노어 그 자체인 모습에 순간 메리다는 불쾌한 질투심이 번뜩이는 걸 느꼈다.



“바보 같은 꼬맹아! 이참에 말 좀 하자, 그냥 엄마처럼 하는 걸 저 얼음 여왕이 너보다 더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선비가 될 작정이냐? 안 되지이, 메리다. 넌 저거보단 잘할 수 있어!”



“저 역시도, 메리다 공주님께서 대단하시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답니다. 칭송받는 궁수라고 하던걸요. 위대한 힐다나 신의 아이라는 다비나가 환생한 여전사라고요. 국왕님께서 아주 자랑스러워하시겠네요. 국민과 왕좌를 대표하기 위해 명단에 이름을 올리셨겠죠?”



“과찬이세요, 여왕님.” “애초에 난 신의 아이라는 다비나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이 아렌델 아가씨가 어떻게 나보다 힐랜드 역사를 잘 아는 거지?” “그리고 아니에요 저는, 어, 전 마상 경기에도 참여를 안 해요. 제 아버지 말씀대로, ‘이건 청년들이 자기 가치를 보여줄 기회니까’요.”



“아아, 그렇군요. 앞서나가서 죄송합니다. 그저 공주님 같은 분이라면 경기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랍니다. 주제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갈고닦으신 그 멋진 재주를 볼 기회가 없다니 유감이군요.”



“젠장맞을, 이 아가씨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째 안 화려한 게 없냐?”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여왕님.” 메리다는 인정하며 어머니를 홱 째려봤다. 헛기침을 하고 다시 아렌델의 여왕을 돌아본 메리다에게서 승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은 내 미모에 정신이 팔려서 내가 얼마나 서투르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걸. 이래서 공주는 예뻐야 해, 맞지?” “나중에 단둘이 만나서 보여드릴 순 있을 것 같은데요?”



메리다는 순간 자신이 말을 잘못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말은 직격으로 추파를 던지는 듯했으며, 메리다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말은 그렇게 전달되었다. 아버지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고, 메리다는 뒤통수에 꽂히는 엘리노어의 못마땅한 눈초리를 느끼고는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사람들이 물어보기 시작하면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로 알현실이 숨쉬기 시작했고, 엘사 여왕의 굳건했던 예의 바른 표정은 그 노골적인 말투에 못 믿겠다는 듯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일순 흔들렸다. 메리다는 빠르게 엘사의 시선을 피했고, 여왕이 보이지 않는 아무 곳에나 시선을 두려 하면서 메리다의 눈이 알현실을 휙 훑었다. 메리다는 사람들이 앉은 자리에서 붉은 머리 아가씨가 허리에 칼집을 맨 채로 자신을 한껏 째려보는 걸 발견했고, 구두를 신은 그 아가씨는 주위에 모여든 관료들을 비집고 사라져버렸다. 갈색 단발머리에 예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던, 아가씨의 친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화난 붉은 머리를 뒤쫓아갔다. 이번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던 메리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 호의는 감사드립니다.” 엘사 여왕의 말투는 딱딱했으며, 여왕의 정중함은 이제 날카롭고 불안정해졌다. 여왕은 수군거리는 무리에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이 입을 닫고 제 말을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을 생각해보면 제게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네요. 마상 경기를 준비하자면 할 일이 많답니다. 공주님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그래도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렌델에서 즐겁게 지내시길.”



여왕의 목소리는 대화를 끝내려는 느낌이었고, 퍼거스와 엘리노어는 그걸 깨달은 게 싫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얼른 앞으로 나아가 메리다를 뒤에 두고는, ‘감사합니다, 여왕님’, ‘신의 미소가 여왕님께 내릴 겁니다’ 하는 말과 함께 절을 올렸다. 그 후 두 사람은 메리다를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며 홀의 한쪽으로 빠졌다.



이들이 하이랜드 대표들 자리 한쪽에 무사히 앉자마자 엘리노어는 낮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 “무슨 짓거리야?”



“전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메리다는 괜찮을 만큼만 소리 지르며 항변했다. 메리다는 깊은숨을 내쉬며 여왕답게 앉아있으려 왕좌로 되돌아가는 엘사 여왕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수군거리던 군중은 이젠 웅성거리고 있었다. “전 그냥 여왕님께 제 궁술을 보여드리려고 아주 정중하게 제안한 것뿐이에요! 우리가 우호적이고 잠재 동맹국이란 걸 보여드리려고 했다구요!”



“얘야, 넌 우리가 잠재 동맹국이라기보단 잠재 구혼자에 더 가까운 것처럼 말했어.” 퍼거스가 투덜거렸다. 퍼거스는 턱수염을 긁적거리고 있었는데, 불안해하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였다. “메리다, 얘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 유혹하는 말처럼 들리게 할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유혹하는 것처럼 말했어. 약소국 군주들이나 할 말을 공주가 하다니? 안 좋은 생각이야, 메리다.”



“너무 화내지는 마렴, 메리다.” 엘리노어는 아주 괴로워 보이는 딸의 얼굴을 보고는 얼른 말을 꺼냈다. “그렇게 나쁜 말은 아니었단다. 단어를 잘못 골랐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는 걸 내보이고만 있으면 비난받지 않을 상황이야. 사람들이 좀 떠들기야 하겠지만, 그들은 금방 잊을 거란다. 너는 조심하기만 하면 돼, 알았니? 예의와 정중함을 지키고, 남을 존중하렴.”



“알았어요, 엄마.” 메리다가 말했다. “좋아. 할 수 있다구요.”



“착하지, 우리 딸.” 엘리노어가 안심시키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기억하렴, 가장 중요한 건, 절대-



메리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었건 간에, 거대한 문이 다시금 열리며 다음 대사 무리가 도착했다는 것과 그들이 누구인지 알린 그 순간엔 스코틀랜드 공주는 엘리노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터였다.



문이 갈라서며 쉰 명에 가까운 남성과 여성이 알현실로 들어섰고, 이들의 발은 붉은 카펫을 밟아댔다. 왕실 근위병처럼 보이는 남성 스무 명가량은 판금과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펄럭이는 붉은 망토 위에는 흰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이들의 가슴에 그려진 문장은 메리다에겐 생소했다. 세 마리 푸른 사자가 금색 방패 위에 그려져 있었고, 방패 위에는 왕관이 얹힌 형태였다. 무장한 남성들은 중심에 선 사람들 양쪽에 열 명씩 일렬로 섰으며, 서른 명가량의 남성과 여성은 부유한 귀족과 귀부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선두에 선 남성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턱수염만큼이나 구레나룻도 단정히 다듬어져 있었다. 옷에 갖가지 훈장과 별이 달린 것을 보니 남성이 입은 옷은 군복이었으며, 적어도 제독 정도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는 복장으로 보였다. 외모마저 잘 생긴 그 남성은 지적으로 보이는 갈색 눈에다 멋진 코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체격도 엄청 좋고 근육질인 데다, 퍼거스 왕만큼 거대하진 않아도 떡 벌어진 어깨는 마상 창기사나 검사를 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메리다가 생각할 정도였다.



“망할,” 퍼거스가 모여든 남성과 여성들에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왕궁 사람들을 아주 다 데려온 것 같은데. 저놈들은 대체 누구야?”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이, 사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아렌델 왕국의 정당한 통치자이자 존경받는 엘사 여왕에게, 이에로 국왕과 브리냐 여왕의 대사를 서던 제도에서 정중히 보내나니, 그들에게 신의 가호 있으라. 고란 가문의 디르 경, 무어 가문의 말렉 경, 웬델 가문의 야누스 경, 스트롱우드 가문의 델리아 부인, 펜달 가문의 에스더 부인, 그리고 이들의 신하와 고문을 그대 앞으로 보낸다. 서던 제도의 왕족, 왕좌의 후계자이자 이에로 국왕과 브리냐 여왕의 맏아들 데인 왕자가 왕가의 근위병을 대동하고 그들 앞에 설 것이다.”



데인 왕자는 앞으로 나아가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는데, 그야말로 기사도의 완벽한 표본이었다. 왕자의 뒤쪽으로 귀족, 하인과 병사 모두 똑같은 행동을 했다. 자신들의 왕자님을 똑같이 흉내 내 무릎을 꿇으면서 말이다. 귀부인들은 큰절을 올렸다.



“엘사 여왕님, 마침내 직접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제 대사를 통해 여왕님 이야기도 물론 많이 들었고 여왕님이 보내신 서신도 자주 읽었지만, 여왕님과 제가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나는 건 정말 중요한 기회니까요. 초대해주신 여왕님의 큰 자애에 감사드립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지요, 데인 왕자님.” 엘사 여왕은 왕좌에 딱딱한 자세로 앉은 채 대답했다. 아까 전의 따뜻함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여왕은 정중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예절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여왕은 데인 왕자를 마치 짓밟아버리고 싶은 벌레처럼 여기고 있었다. “아렌델은 그대와 그대가 대동한 귀족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말 즐겁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데인 왕자는 일어서서 여왕 앞에 섰다. 메리다는 왕자의 제복이 장식이 아니라는 걸, 왕자의 출생만으로는 아무런 지위도 주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걸 왕자의 자세만 보고 알 수 있었다. 왕자의 자세를 판단의 근거로 본다면, 왕자는 그곳에 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터였다.



“엘사 여왕님, 저는 돌려 말하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마상 경기를 통해 여왕님의 시민과 왕국을 축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기만적인 제 남동생으로 인해 아렌델과 서던 제도 사이의 관계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한스는 정말 끔찍한 음모를 꾸며냈고, 저는 서던 제도 전체를 대표하여, 그건 저희에게 있어 수치였다는 말과 여왕님과 안나 공주님, 그리고 여왕님의 시민들에게 닥치게 된 모든 위해에 대한 사과를 올리는 바입니다.”



“사과는 이미 오래전에 받았습니다. 데인 왕자님.” 엘사 여왕은 차가우면서도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전 왕자님의 아버지이신 이에로 국왕님과 주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한스 왕자가 정당한 처벌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모든 걸 용서하기로 합의를 내렸습니다. 서던 제도는 이미 모든 피해에 배상했으므로, 더는 용서해야 할 게 없습니다. 안심하고 편히 지내세요, 데인 왕자님. 친구와 동맹국을 위한 마상 경기이고, 관계의 지속과 굳건해진 결속을 축하하는 자리니까요. 지금은 즐거워할 때이지, 후회할 때가 아니에요. 즐겁게 지내시고, 기쁨을 만끽하세요.”



“여왕님, 여왕님의 호의와 친절함에 감사드리지만, 전 제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데인 왕자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걸 용서받았지만, 저는 제 남동생이 저희 왕가에 가져온 불명예에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한스의 대리인을 자처한 것은 두 왕국 사이의 손상된 결속을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으로 결속이 있다고 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제가 그 결속을 치료하고 이전보다 더 단단하게 만들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상 경기가 끝나고 제가 대동한 사람들과 함께 아렌델을 떠날 때면, 전 저희가 동맹국이 아닌 친구가 되어 떠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왕자의 눈빛은 따뜻했고 목소리는 솔직했으며, 표정은 밝아져 있었고 말에는 진심이 어려있었다. 알현실에 있던 모두가 데인 왕자의 타고난 듯한 매력과 품위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두 왕국 사이에 남아있는 어떠한 갈등이라도 회복시키려는 그 열망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퍼거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엘리노어는 스스로 작게 미소 지었는데 이는 왕자가 기량이 뛰어난 정치가로서 상대에게 훌륭한 외교술과 솜씨를 보여주었다는 걸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왕자가 진실한 의지로 모두를 완전히 설득시키면서 데인 왕자는 이곳에 모인 모든 관료를 꺾은 듯 보였다. 메리다마저도 사람들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는 이 남성에게, 그것도 제 나이의 두 배 가까이 되는 남성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넋을 빼앗겼다.



모두가 그런 것 같았는데 엘사 여왕은 아니었다. 메리다가 간신히 데인 왕자로 향한 눈길을 떼어내어 아렌델의 여왕을 쳐다보았을 때, 여왕이 왕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까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메리다의 눈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지, 여왕의 손가락 끝에서 얇은 서리까지도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엘사 여왕은 데인 왕자의 진실함과 카리스마에 아무런 감명도 받지 않은 듯했다. 사실, 여왕의 차분하고 정중한 그 완벽한 외관 바로 아래에 끓고 있는 감정을 보건대, 메리다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이게 가능한 일인가?



여왕은 왕자를 증오하고 있었다. 엘사 여왕은 온몸으로 데인 왕자를 증오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번역 뒷얘기

* 이번편은 번역을 깽판쳐놨다. 아..

* 힐랜드도 나오고 하이랜드도 나오는데 둘다 같은 건가?

* 4챕에 이에로 경(Lord Eero)이 나오고 8챕에 이에로 국왕(King Eero)이 나오는데... 뭔지 난 모르겠다. 동명이인인건지... Lord에 국왕이란 의미가 있었던건지.

* 몰라 암튼 늦어서 미안. 2개월만이네

* 늦은데다 아처 편은 전부 비빔면얘기ㅎㅎㅎㅎㅎ 어휴

* 이후로도 늦을거같음

추천 비추천

22

고정닉 7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공지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63] 운영자 14.08.29 167262 509
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6 286
1123714 ai힘을 빌리면 개쩌는 픽썰 쪄지냐 [1] ㅇㅇ(223.38) 11:41 13 0
1123713 이 음란한 갤 [1] ㅇㅇ(223.38) 11:39 8 0
1123712 안녕 털복숭이들 [1] ㅇㅇ(112.157) 11:26 8 0
1123711 청정한 헬요일 ㅇㅇ(223.62) 00:18 12 0
1123709 뒤조심)아 되게 충격적인 짤 봫는데 얘기할데가 여기밖에 없어 [7] ㅇㅇ(110.47) 06.09 68 0
1123708 디시 이미지 왜 깨져... ㅇㅇ(223.62) 06.09 12 0
1123707 누가먼저 보내나 시합! [1] ㅇㅇ(223.62) 06.09 25 0
1123706 일편단심 안개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7 0
1123705 넘쳐나는 go간 [1] ㅇㅇ(223.62) 06.09 31 0
1123704 축 늘어진 흰 옷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아기 [1] ㅇㅇ(223.62) 06.09 24 0
1123703 설갤 단점 ㅇㅇ(223.33) 06.09 17 0
1123702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3 0
1123701 그런가 [2] 설갤러(118.43) 06.09 16 0
1123700 아니 69라고 설갤러(118.43) 06.09 15 0
1123699 크 69가 와버렸다!!!! 설갤러(118.43) 06.09 15 0
1123698 엘산나를 만난게 행운이야 [5] ㅇㅇ(223.62) 06.08 32 0
1123697 배거파 [1] ㅇㅇ(110.47) 06.08 19 0
1123696 오늘막글 ㅇㅇ(223.62) 06.08 16 0
1123695 어 내일이 69잔아 ㅇㅇ(223.62) 06.08 14 0
1123694 쥬미 영화 보러옴 ㅇㅇ(211.234) 06.08 18 0
1123693 안탄절 지나면 엘탄절도 금방 ㅇㅇ(223.62) 06.08 17 0
1123692 모험가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20 0
1123691 싯발 언제 비 그친거냐 [1] ㅇㅇ(223.62) 06.08 22 0
1123690 수상하게 칼을 잘쓰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2 0
1123689 뭐지? 결혼식인가? [5] ㅇㅇ(211.234) 06.08 57 5
1123688 정령을 잡아다 예쁘게 묶어 공물로 바치기 ㅇㅇ(223.62) 06.08 23 0
1123687 혐퀘후식사 [2] ㅇㅇ(211.234) 06.08 20 0
1123686 오늘은 자동으로 실내활동 [1] ㅇㅇ(223.62) 06.08 19 0
1123685 자연스레 깊어가는 둘의 관계 ㅇㅇ(223.62) 06.08 22 0
1123684 아찜글 ㅇㅇ(211.234) 06.08 16 0
1123683 새벽글 [1] ㅇㅇ(115.138) 06.08 17 0
1123682 다다음주가 안탄절이네 곧 [2]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4 1
1123681 안나가 엘사를 [1] ㅇㅇ(223.62) 06.07 32 0
1123680 엘산나의 금요일 ㅇㅇ(223.33) 06.07 16 0
1123679 여전히 존버중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27 0
1123678 안나vs안나는 기존쎄 대결일듯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36 0
1123677 애틋하게 뺨쓰담 ㅇㅇ(223.62) 06.07 22 0
1123676 눈 깜짝할 새 킹요일 ㅇㅇ(223.62) 06.07 22 0
1123675 원하는 초능력을 얻는 대신 댓글이 부작용을 정해줌 [18] ㅇㅇ(115.138) 06.07 87 0
1123674 크으 모닝갤먹 [1] ㅇㅇ(223.62) 06.07 23 0
1123673 [그림] 원치 않은 신앙 [10]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108 10
1123672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창작물 [6]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14 11
1123671 세명이서 서로 아래 핥으려면 원을 그려야하냐 [3] ㅇㅇ(223.62) 06.06 53 0
1123670 프로즌 ost는 언제 들어도 좋아 [2] 설갤러(118.43) 06.06 26 0
1123669 크읏 이러다 울룩불룩 설줌이 돼버렷 [1] ㅇㅇ(223.62) 06.06 29 0
1123668 엘사만 만나면 움츠라드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6 0
1123667 태어날 때 부터 얀데레 엘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49 0
1123666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4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