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바른은 아직 고등학생 같다. 뭐든 솔직히 물어보고 애교도 있다. 바른의 엄마에 대한 묘사가 참 좋다. 이상을 쫒는 사람과 결혼을 해 복닥거리며 현실적인 돈 문제로 고생하고 살지만 남편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반면에 바른은 돈 많고 대단한 집으로 장가가 이런 구질구질한 꼴을 보지 않고 살았으면 한다.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의 부모는 대부분 속물적이다. 물론 완전히 착하고 헌신적인 경우도 있다. 부모란 것은 다 그렇지 않은 가 싶다. 내 새끼를 안전한 둥지에 두고 싶은 마음이 말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둥지를 벗어나 날아야 한다. 더 크고 안전한 둥지란 없으니 위험한 세상을 향해서!

오름의 무릎은 베고 잠든 바른은 어린아이 같다. 너무 일찍 철이 들었지만, 그래서 어른인척 단단하게 이성으로 싸인 부분을 걷어내 버리면 아직 순수하고, 오히려 순진한 구석이 많은 사람 같다. 아이처럼 잠든 바른의 머리카락을 오름은 가만히 쓸어본다. 맨 정신이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을 바른도 오름도 그렇게 서로를 풀어놓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 끝, 비틀거리는 바른의 팔을 잡고 오름이 가고 있다. 괜찮다며 혼자 갈 수 있다면서 바른은 자꾸 더 흔들리고, 결국 오름은 바른의 오른 팔을 어깨에 걸고 옆구리를 안으며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바른은 오름의 부축을 밀어내며 말한다. “폐 끼치면 안되는데.” 남자동료라면 어땠을까? 좋아하지 않은 여자동료라면? 바른은 아마 어떤 누구라도 타인의 부담이 되는 걸 극도로 싫어했을 것 같기는 하다. 하물며 어린 시절 열병을 앓는 것처럼 좋아했고 다시 만난 지금도 단 하루도 곁에 없으며 허전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인데 말이다. 다만 우배석으로서(?) 할 수 있는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걸로 만족하는 사람에게 지금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폐 좀 끼쳐도 되요. 가끔은. 저 한 테는요.”라고 오름이 말한다. 바른은 술에 취해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다. 무슨 뜻일까? 지금 그녀가 뭐라는 걸까? 이건 특별한 의미인데? 그런데 또 몸이 비틀거린다. 그녀가 다시 자기 어깨에 바른의 오른 팔을 두르고 옆구리에 손을 받쳐 기대게 한다. ‘그럼 나는 그녀에게 조금은 몸을 기대도 되는가?’ 몸 중심을 오름에 기대며 바른은 그녀를 응시한다. 고백을 한 후 움찔움찔 자기 눈치를 보기에 불편하지 않게 해 주려고 가능한 한 발짝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해 왔는데 지금은 소용이 없다.

술이란 게 무슨 죄가 있을까? 마신 사람들이 잘못이지. 인간의 나약함도 죄라면 죄지. 그러나 보왕의 말처럼 가끔은 그런 술이 인간들을 가까워지게도 한다. 그리고 나약한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도 한다. 바른이 지겹게 느끼는 그 많은 사건들의 피고처럼 바른은 술에 취했다. 그날 밤, 바른은 최소한 외롭지는 않았다. 오름이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