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결혼을 했어.
이방자여사도 팔자가 기구했지만...일단 넘어가고.
지금도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대사면령을 내리자나. 광복절 특사 같은거.
그때도 축하하는 의미로 사면령이 내렸어.
나이는 18세. 죄명은 소요와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922년 3월까지 살아야했던 소녀는 1920년 9월 말 출소로 감형되었어.
친구들은 그 소녀의 출소를 축하하려고 십시일반해서 구두도 사고 머리핀도 샀어.
출소 이틀전인 9월 28일.
소녀는 방광이 터지고 온 몸에 골절상을 입은 채 사망했어.
그로부터 14일 뒤 유해는 소녀가 다녔던 이화학당으로 운구되었어.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누나라 부르는 유관순열사와 이태원에 관한 이야기야.
유관순의 유해가 이화학당에 왔을 때 친구들은 냄새가 나는 시체 앞에서 통곡했다고 해.
유관순과 같은 기숙사에 있었던 보각스님의 증언이야.
그 유해는 먼저 이화학당으로 갔어.
당시 이화학당이야.
지금의 정동 이화여고자리야.
그 옛날 한옥건물은 없어졌고, 이런 기념관이 남아있어.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야. 안에 들어갈 수 있는거 같던데....여고에 들어갔다가 감옥에 갈까봐 무서워서....정동에 축제할 땐 맘 편하게 들어갈 수 있어.
그리고
우리가 정동에 가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제일교회에서 시신을 인수했어.
그리고 시신이 묻힌 곳은....
서울에 사는 사람이면 한번쯤 가봤던
이태원 이슬람사원 근처 어딘가야.
예전에 쓴 적이 있지만
조선시대 한양, 혹은 서울이라 부르던 곳은 사대문 안쪽이야.
그렇지만 동으론 강북구, 성동구 서로는 은평구, 서대문구, 남으로는 용산 여의도일대를 성저십리라 불렀어.
즉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 비슷한 역할을 한 곳이야.
그리고 그 지역은 나무도 벨 수 없고 무덤도 쓸 수 없었어.
서울을 둘라싼 용마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 서울 안에 있는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은 건들면 안된다고 표시한게 사산금표야.
원래 기둥이나 비석으로 표시한걸 나중엔 이런 지도를 만들었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 후 나라는 안정을 찾아가.
그러면서 한강 근처에는 포구가 생겨. 우리가 아는 용산, 마포, 서빙고 등등
당연히 포구가 생기면 일대에 마을이 생기겠지? 그 중 하나가 현재의 이태원이야.
마을이 생겼으니 죽는 사람도 나올꺼고 그러면 어딘가에 무덤을 만들어야지?
그런데 사대문 밖 돈 없는 사람들은 명당이네 뭐네 엄두도 못내. 그냥 동네 뒷산에 묻었어.
그래서 현재 이슬람사원 아랫동네에 공동묘지가 들어서.
사산금표고 뭐고 그냥 썼어.
이런 일은 일제시대까지 이어져.
빨간 동그라미가 이슬람사원이야.
그리고 중앙박물관 뒷쪽 녹색이 미군기지야.
일제는 지금 미군기지 자리에 조선주차군 사령부를 만들어. 그리고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을 쫒아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동네는 둔지미마을이야.
처음 쫒겨난 곳은 박물관 옆에 용산가족공원자리야.
그런데 기지를 확장하면서 또 쫒아내.
그 자리가 파랑 동그라미를 쳐 놓은 보광동이야.
당시 이름은 신보광리. 이태원공동묘지 아랫동네야.
당시 기록을 보면 보광리로 이주한 사람들은 유골을 파내면서 집을 지었다고 해.
일제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성의 인구는 급증해.
사산금문이니 성저십리니 그런건 의미가 없어졌어.
도시가 팽창하니까 성곽을 철거했어.
그리고 1933년에 지금 홍제동, 강북 신사동, 미아리에 있던 공동묘지를 이장하기로 했어.
현재의 면목동, 망우리, 동구릉쪽으로.
가장 큰 문제는 이태원공동묘지야.
다른 곳에 비해서 규모도 크고, 바로 앞엔 군사요충지야.
총독부에서는 유골을 수습하라고 신문에 광고를 하고 통지서를 보냈어.
문제는 수백년동안 이어져 온 공동묘지라 연락이 잘 되지 않는거야.
그 중 하나가 유관순이야.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3.1운동때 사망했거든.
1937년 이태원공둉묘지는 망우리로 이전했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비석이야.
여기엔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라고 쓰여있어.
즉 이태원공동묘지에서 이장하면서 연고가 없는 유골은 화장을 하고 합장을 한거야.
3만기 이상이 여기에 합장되어 있어.
아마 유관순의 유골도 저기에 합장되어 있을꺼야.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했던 곳은 아우내장터, 현재 천안이야.
그래서 천안에 초혼묘, 즉 혼을 부르는 묘를 만들었어.
유관순 누나의 혼백은 고향으로 갔을까? 모르겠어.
단지 누구나 아는 유관순 누나지만 또 잘 모르기도 하는거야.
그러면 이태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1937년에 공동묘지 이전이 끝나고 이태원은 택지로 개발되었어.
해방이 되었고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쟁이 끝났을때 상경한 사람들이 다시 살기 시작했어.
미군들에게 구걸을 하더라도 미군기지 근처에 있어야 벌이가 좋으니까.
당시에 집을 지을때도 해골이 끝없이 나왔다고 해.
지금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지역 중 하나인 이태원은 사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공간이었어.
또 기독교학교를 다녔던 유관순이 유교식으로 매장되었고 지금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는 곳이야.
전 세계의 문화가 공존하는 이태원을 생각해보면 그럴싸하기도 해.
또 하나.
망우리 공동묘지에 저 비석은 모두에게 잊혀졌어.
그러다가 1993년 동네 사람들이 비석 주변을 정비하고 봉분을 정비했어.
뭐라고 끝내야 될까??
이태원에 가면 얄구진 나라 겁나 비싼 음식만 있는걸로 아는데 이태원시장 뒷골목에 구질구질한 실내포차가 많아.
가격도 별로 안비싸고.
그런데 거기 가려고 이태원을 가느니 그냥 동네근처에서 먹는게 나을꺼야.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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