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겅대며 미끄러져가는 피난선의 항적航跡 뒤에 정들었던 인연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며 회한으로 마음을 적신다

동포들이여! 천민賤民의 낙인이 찍혀 오도가도 못한 채 억겁의 시간동안 다시금 고통받아야 할 조선인들이여!

가슴이 아리는 슬픔이 숨구멍을 비집고 들어와 목이 메이는 한편으로

이 간사한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비겁하게도 은밀하고 달콤한 안도감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오! 되놈들도 영문모를 방언으로 지껄이는 이들도 이제 없소! 편의 증진이니를 말하는 무뢰배들과도 작별이오! 미국이란 말이오! 미국!"

갑판에서 약속이나 한듯 저마다 고향땅을 응시하던 이들 중에서는

진심인지, 자기합리적인 보상심리에서인지 저 멀리 항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가련한 피난민들에게 노골적으로 부르짖는 사람도 있었다.

아아, 그러나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스스로와 대조하며 위안을 얻는 너절하고 한심한 인간이기는 나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홀로 자괴감을 곱씹는 와중에 목청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남자를 주변 사람들이 보다못해 제지했다.

"저 사람들인들 떠나고 싶지 않았겠소? 조용히 떠나면 되지 않소?"

"이것 놓으쇼! 저 사람들이 못 떠나는게 내 탓이오? 누가 본인 인증이니 연동이니를 하라고 꼬드기기라도 했소? 누가 조선회사를 믿고 스스로 족쇄를 차라고 강요라도 했단 말요?"

되려 버럭 역정을 내는 사내를 사람들이 아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몇몇은 혀를 차며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당신들 모두 진작에 스스로 본관을 버리고 호적을 파내서 이 배에 오른 것 아니오? 그것이 현명한것이지! 그것이 옳은 것이지! 백리를 두고 마주앉아 의미없는 저격전狙擊戰이나 일삼는 과거를 버리는것이 잘못된 일이란 말요?"

옷자락을 잡는 만류의 손길을 단호하게 떨치며 남자가 발악하듯 외치자 삽시간에 웅성이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우리는 선진한 땅의 선진 국민이 되는 것이오! 저기 남아있는 비루한 이들을 보시오. 실로 바보같은 작자들이 아닌가.. 그깟 석유기름이 아쉬워서.. 통신속도가 아쉬워서.. 벗을 버리고 동료를 버리고 나라를 버리지 못해서.. 참으로 바보 천치들이 아닌가 말이요..!"

그새 목이 쉬었는지 쇳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사뭇 떨려왔다. 맞은편에 서 있던 나는 군중을 외면하며 돌린 남자의 핏발선 눈매에 어느새 옅게 물기가 배인것을 알아챘다. 그는 무엇을 버리고 온 것일까... 나는 주제넘는 동정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간 현장에서 사람들은 침묵했다. 간혹 어깨를 들먹이며 소매로 눈가를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 누구도 흐릿해져가는 항구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부질없게 이제는 의미 없어진 접속 단추를 연신 눌러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요에 놀라 뛰쳐나왔던 미국인 선장이 내게 다가와 다소 짜증섞인 표정으로 접속 불가 통지를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몰랐던 척 연기를 했다.

통지서를 주머니에 넣자 바스락거리는 것이 손에 잡혔다. 미국에 가면 유용하게 쓸 것이라며 구락부 동료가 쥐어준 쪽지였다. 종이 위에는 서투른 알파벳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Cap C' 'DD spot' ...나는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람아, 아시아라고 이것을 모른다던가...

팔락대며 나부끼는 그 '회화 노트'를 그러나 나는 왠지 바닷바람에 날려보낼 수가 없었다. 쪽지를 꼭 쥔 손이 문득 섧게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