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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버그로 하여금 일빠가 되게 만든 사건

올드보이(211.222) 2007.04.01 20:37:24
조회 2041 추천 0 댓글 164


스티븐 스필버그............80년대 태양의 제국에서 "제로기는 증말
훌륭한 전투기야""거기 탑승하신 분들은 본좌야"
이런 소릴 나이어린 아메리칸 싸이코로 하여금 나불거리게 시킴.

현재 영감탱 클린트를 허수아비삼아 이오지마라는 영화를 일본에 헌납.
로마인이야기를 끝낸 시오노 할망구는 우리 신문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참으로 훌륭한 영화다, 일본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
"정신대 문제는 우선 사실확인이 우선이다"
요렇게 나불나불..............



스티븐 스필버그로 하여금 독까일빠로 타락하게 만든 사건이 아마도
이게 아닐지................................어디까지나 "아마도"




걍 통째로 펏소. 네이년지식인에서.



 일본판 쉰들러 \'스기하라 치우네\'

<U>나도 평가하기</U> good10225

집필자 <U>spartacus2</U> (2005-02-13 17:58)집필한 지식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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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유대인</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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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U>

지난 해 백수생활 와중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접한 책인 "전쟁속의 여인들"(사오도메 가쓰모토 지음, 지명란 번역,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72, 2003년 8월 8일 초판)에 나와있었던 "스기하라 치우네 & 스기하라 유키코 - 육천명의 목숨을 위한 비자"에서 보았던 내용을 이제야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노트에는 아주 단편적으로...

1938년 12월 고노에 내각 - 유태인 대책 요강.
"전쟁의 수행, 특히 경제건설 상 외자를 도입할 필요와 대미관계를 악화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을 \'배척\'하는 일은 피하라."

1940년 7월 -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영사 스기하라 치우네는 3차에 걸쳐 유태인들에 대한 비자발급허가를 요청하였으나 그에 대한 본국의 답변은 없었음.

이후, 전쟁 종료 2년 뒤, 귀국한 다음 외무성에서 쫓겨남.
(왜 쫓겨났는지야... 뻔한 일일 듯 하니 두말하면 잔소리일듯... ㅡㅡ;)


이에 대한 스기하라 부인의 주장.
"그러나 나치 독일과 연결된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역사의 흑암(黑暗 : 어두운 면)이 그것(스기하라 부인의 남편이 6천명의 유태인들에게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영사의 자격으로 비자를 발급한 사건)으로 조금이나마 엷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용이 이렇듯 적은 관계상 인터넷에서 찾은 내용을 소개합니다.
글의 내용을 보면서 기억을 더듬으니, 분명 제가 소개한 그 책에서 나온 글 그대로 인 것 같기도 한데?

ps. 고바야시 선생의 만화 "게르만의 전사"에서도... 베를린 공방전에서 싸우던 핀란드 병사들이 일본 대사관에 몰려들자 일본 대사관원이 나오더니만 "우리 일본은 지금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다. 그러니 핀란드 병사들은 속히 나가주기 바란다!"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나오던 것을 생각한다면... ㅡㅡ...  

 

 



=====================================================

 



스기하라 치우네, 그는 누구인가?

[출처 -  <U>http://myhome.naver.com/senpo03/301who.htm</U>]

기무라 노리코(木村典子)

               연극기획자



 1940년 7월27일 이른 아침, 고풍스러운 집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조용한 도시 카우나스(Kaunas)에 있는 리투아니아(Lithuania) 일본영사관 앞에는 이상한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영사관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밖으로 200∼300명쯤 돼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밀려오고 있었다. 밖의 소란스러움을 알아챈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는 부하에게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영사관 앞에 모인 사람들은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폴란드에서 빌니우스(Vilnius)를 향해 대이동을 해온 유태인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의 의하면 몇 일 이내에 몇 천 명의 유태인들이 더 물려올 거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폴란드에서는 <유태인 사냥>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유태인들의 가게가 습격을 받거나 유태교 교회가 불태워지거나 나치스의 손에 의해 많은 유태인이 남녀노소 구별이 없이 잡혀서 어딘가로 끌려간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이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 진행되고 있던 나치스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이었다는 것을 스기하라 치우네가 알게 된 것은 제2세계대전이 끝난 후였다. 나치스에 의한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한 것은 1935년, <뉘른베르그 법>이 공포되고 독일에서 유태인들의 시민권이 박탈되면서부터이다. 1938년에는 1만 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독일 국내에서 추방되었고 나치스의 선동으로 유태인들에 대한 습격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졌다. 독일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은 국외로 피난하기 위해 각국 대사관으로 비자를 구하려고 쇄도했다. 하지만 유태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곳은 거의 없었다. 폴란드에서도 나치스 독일이 점령과 동시에 유태인 배척하는 폭풍이 세차게 불었다. 당시 폴란드에는 350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수단을 써서 나치스의 손길을 피하려하고 있었다. 그 중에 운이 좋게 도피에 성공한 사람들이 독일의 세력이 아직 미치지 않은 북쪽의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 당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이곳에 있는 일본영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소련·시베리아를 경유해서 일본을 통과한 다음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의 제3국으로 가는 방법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일본영사관 앞에 모인 유태인들의 요구는 제3국으로 도피하기 위한 <일본 통과 비자>를 발급해달라는 것이었다. 스기하라 치우네는 유태인 대표 5명을 불러 그들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유태인들 앞에 놓여진 참상을 고려하면 인도적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일본정부가 그들에게 일본을 통과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해준다면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스기하라 치우네는 고뇌 끝에, 일본 외무성에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외무성 회답은 그러한 비자의 발급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유태인들이 놓여있는 상황을 설명한 두 번째 전보를 보낸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전보에 대한 회답도 거부였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운 내각이 탄생하고 육군장관으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취임했으며 내각, 외무성, 그리고 군부 모두가 <일독이(日獨伊/일본, 독일, 이태리)삼국동맹>으로 향하는 레일이 깔린 직후이었다. 외무성도 독일, 이탈리아와의 협조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독일에 대한 적대행위를 허락을 할 리가 없었다. 또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의해 정식으로 합병되었고 카우나스에 있던 각국의 대사관은 국외로 퇴거당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상황 속에서 일본영사관도 소련 쪽으로부터 퇴거명령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외무성으로부터 비자 발급을 거부하라는 회신에 스기하라 치우네는 고민했다. 고민 끝에 그는 그의 아내인 유키코(幸子)와 영사라는 자신의 권한으로 비자를 발급해주겠다는 자신에 결심에 대해 상의를 했다. 외무성의 회답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영향이 미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기하라 부부의 결단은, 영사관 앞에 모인 유태인들의 목숨은 모른 채 하고 자신들만이 국외로 도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가족의 안전을 생각하면 즉시 국외로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며, 외무성의 명령을 무시한 채 비자를 발급하면 자신과 가족의 목숨조차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내린 결단이었다. 스기하라 치우네는 이 결심을 가슴에 안고 세 번째 전보를 외무성에 보낸다. 그러나 이 전보에 대한 회신도 “내무성(內務省)은 많은 외국 사람들이 일본국내를 통과하는 것에 대해 그 치안을 우려해서 반대한다. 비자의 발급은 허가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1940년7월29일 이른 아침, 스기하라 치우네는 영사관 밖으로 나가 사증을 발급할 것이라는 것을 전한다. 순간의 침묵, 그리고 그 후의 술렁거리는 군중의 소리. 서로 껴안고 키스를 나누는 모습, 하늘을 향해 팔을 펼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 아이를 안아 올리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 유태인들의 안도와 기쁨의 광경이 펼쳐졌다. 그 날부터 침식을 잊고 사증을 작성하는 스기하라 치우네의 일이 시작됐다. 처음엔 하루에 300 장의 사증을 쓰고 각각 사증에다가 발행번호를 부쳐, 사증 발행매수를 매일 외무성에 보고하고 수수료를 징수하고 있었지만 2000장을 넘은 지점에서 일일 보고와 수수료 징수는 중단이 됐다. 사증을 발급하는 일은 아주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비자는 한 장, 한 장을 손으로 써야 되고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 그 이름을 틀리지 않게 써야 했다. 날마다 그 수가 늘어가는 영사관 앞의 유태인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증을 쓰는 것 이외의 일은 줄일 수밖에 없었다.



 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한지 20일 정도 지날 무렵, 소련 측으로부터 퇴거명령이 몇 차례 더 있었고 일본 본국에서도 영사관 퇴거명령이 내려왔다. 그러나 스기하라 치우네는 그것을 무시하고 비자를 계속 발급했다. 그리고 드디어 1940년8월28일, 한 달 정도 계속된 사증발급 작업이 그 날로 중지됐다. 외무성으로부터 “카우나스의 영사관을 폐쇄하고 즉시 베를린으로 떠나라”라는 지급전보가 왔기 때문이다. 카우나스는 벌써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다. 국경이 폐쇄되면 국외로 탈출할 수 없게 된다. 이 전보를 받은 스기하라 치우네는 사증발급을 단념하고 카우나스를 떠날 결심을 한다. 짐을 꾸리고 영사관을 떠난 그와 그의 가족은 잠시 호텔 메트로폴리스로 피난했다. 스기하라 치우네의 피로는 한계를 넘고 있었고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호텔까지도 유태인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스기하라 치우네가 비자를 써주고 싶어도 영사의 도장이나 서류 등은 벌써 베를린으로 보내버린 후였으므로 정식 비자는 발급할 수 없었다. 그는 여기서 정식 비자를 대신하는 증명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치명타를 가하는 듯이“리투아니아는 정식으로 소련영토가 됐다. 이제 독립국이 아니다. 즉시 떠나라”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1940년9월5일 이른 아침, 스기하라 치우네와 그의 가족은 카우나스 역에서 베를린 국제열차에 탔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몇 명 유태인들이 비자를 구하려고 달려왔다. 그는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증명서를 써줬다. 출발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용서해주세요. 저는 이제 못 씁니다. 여러분들이 무사하길 빕니다” 스기하라 치우네는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카우나스를 떠났다. 그렇게 해서 발급된 <생명의 사증>은 유태인 6천 명을 구한 것이다.



 전후인 1946년, 스기하라 치우네는 귀국한다. 동시에 갑자기 외무성에서 면직 명령이 내려졌다. 외무성에서 면직 된 후, 생활을 위해 동경PX 총지배인, 미국무역상의 지배인 등을 거쳐 니콜라이 학원 교수, NHK국제국 등에서 일한 다음 1960년에 가와카미 무역(川上貿易) 모스크바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1968년8월, 모스크바에서 일시 귀국한 스기하라 치우네는 갑자기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연락을 받았다. 카나우스에서 비자를 발급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니슈리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대사관 참사관으로 일본에 부임했던 것이었다. 니슈리는 카나우스에서 스기하라 치우네가 만난 5명의 유태인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그 때부터 2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스기하라 치우네에게 비자를 받아 무사히 카우나스에서 탈출한 유태인들은 계속 그를 찾았었다. 일본 외무성에 문의해도 “해당자 없음”이라는 대답 밖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 치우네라는 이름은 외국 사람에게는 아주 어려운 발음이어서 이름을 “센포”라고 했기 때문이기로 했다. 또 비자를 받아 일본으로 온 유태인 중의 한 명인 조세프 심킨과의 만남도 있었다. 심킨은 잠시 상해로 건너갔다가 전후에는 일본에 남아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스기하라 치우네와 유태인들의 재회가 계속 이루어졌다.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 있던 유태인들은 그래도 상황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스키하라 치우네에게서 비자를 받은 후, 돈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곧바로 카나우스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에서 몸 하나만 겨우 도망쳐온 유태인들도 많았다. 그 중에는 제3국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나치스에게 다시 잡혀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미국의 유태인협회가 난민구제회를 조직하고 일본과 소련의 여행사와 협의를 해서 그들을 제3국으로 보냈다. 2주 이상을 사람이 가득 찬 기차를 타고 소련국토를 지나 블라디보스톡까지, 거기에서 일본의 우편선으로 갈아타고 배멀미와 추위를 견디며 쓰루가(敦賀)항까지. 이렇게 해서 유태인 난민의 제1진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1940년 10월6일이었다. 그 다음해인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된 1941년 6월까지 10개월 사이에 1만5천 명의 유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오고 거기서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갔다.



1969년9월, 스기하라 치우네는 근무지인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도중, 이스라엘에 들렸다. 거기서는 역시 유태인 대표 5명 중 한 명었던 발파딕이 그를 마중했다. 발파딕은 이스라엘 종교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 때, 스기하라 치우네는 예루살렘 서부 언덕에 있는 <야드 바쉠(Yad Vashem)>에 동양인으로서는 처음 초청되어 자신의 손으로 기념식수를 하고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 <야드 바쉠>은 나치스에 의해 살해당한 유태인들을 추모하고 유태인들을 구해준 이방인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렇게 유태인들과 재회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깊어져도 스기하라 치우네는 카나우스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아무도 그의 공적을 알아주지 않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도 유태인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고, 그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5년1월18일, 동경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스기하라 치우네는 <세계 속의 정의의 사람·야드 바쉠 상>을 수상한다. 이 상은 이스라엘 정부가 유태건국에 기여한 외국인에게 주는 훈장이다. 세계 각국에서 8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수상했지만 일본 사람으로서는 처음 수상이었다. 이 날, 수상식장에는 방송이나 신문 기자들이 많이 몰려왔고 스기하라 치우네라는 이름이 크게 보도됐다. 또 독일, 미국, 프랑스 등, 해외에서도 많은 취재진이 찾아왔다. 그는 그런 보도에 대해 “신문이나 방송에서 크게 화제 삼을 일이 아니다. 내가 한 일은 외교관으로서는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를 찾아온 몇 천 명의 사람들을 못 본 체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옳은 행동이었다……내가 한 일은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라고 아내인 유키코에게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 보도를 계기로 일본에서도 스기하라 치우네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 이스라엘 예루살렘 언덕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스기하라 치우네는 심장병이 악화해서 참석할 수 없었지만 헤브라이 대학에 국비유학생으로 초청되어 있던 아들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이 제막식에 참석한 유태인은 70에서 90명 정도였다. 그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구한 사람들이다. 그 유태인들 중에는 지금도 당시의 비자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1986년 7월31일, 많은 유태인들에게 사랑을 받은 스기하라 치우네는 86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일본정부가 그에 대한 공식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1991년, 나카야마 타로(中山太郞) 외무장관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하고 한 것이 처음이다. 또 그 해,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 외무부 정무차관이 스기하라 치우네의 아내인 유키코를 외무성 공관에 초대해서 그의 면직에 대해 사죄를 했다. 1992년에는 국회중의원 예산위원회 자리에서 구사가와 소조(草川昭三) 위원이 스기하라 치우네 면직 이유에 대해 질문을 하고 국회차원에서 정부의 사죄와 표창을 요구했다. 이렇게 그의 명예회복에 대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참고자료 <六千人の命のビザ>杉原幸子 著: 朝日ソノラマ社

인터넷: Vechi Home Page:
<U>http://www.twin.ne.jp/~uetti</U>   

       八白津町(ヤオツ) Home Page: Sugihara Chiune 記念館

                             
<U>http://www.town.yaotsu.gifu.jp/spot/sugihara/sugihara.html</U>  

 

 

ps. 스기하라 치우네씨가 조선인을 돕지 않은 것이 "불만이신" 그래서 "역시 일본X들은 나쁜 X들"로 결론을 내리시고 싶으신 분들께는 여기 오픈백과사전에 또 하나 올린 [<U>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1890-1953)의 사상</U>]을 보아주십시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 자신은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기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십시오.

 

 

 

ps-2. "개인으로서는 괜찮지만 집단으로서는 얼마든지 잔인해 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라고 하신 분들께...

그 분들의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김질 해보다보니...

왜 그렇게 우리나라 학교에 "집단폭력"(이른바 "왕따")이 무성한지 알 듯 하군요. 허허허...

아무튼, 남을 욕하기 전에 나는 욕먹을 짓 안하고 사는지... 이런 분들은 반성 좀 하시고 사셔야 할 듯 합니다. 그 후에나 스기하라님 같은 분들을 욕하시거나 돌을 던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정 스기하라님보다 나은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이 땅에서 학대받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탈북난민들 등을 구호하는 단체에서 이번 여름방학 오면 활동해보도록 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왕따당하는 급우를 보면 무시하거나 혹은 자기도 그 "집단"에 속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우라!... 그 말을 넣겠습니다.








오옷....................펌글 죽이게 뜨네. 유식대장 돈좀 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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