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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오해

ㅇㅇ(223.39) 2017.08.03 20:28:14
조회 2407 추천 45 댓글 9
														

까칠한 하나가 보고 싶어서 끄적였던 낙서





오늘도 게임에서 졌다.
얼마 전에 다친 왼팔 때문이다. 힘을 주려고 하면 짜릿한 통증이 느껴져서 움찔거리게 되는데, 그 탓에 게임기를 제대로 쥘 수가 없다. 결과, 오늘로써 벌써 3일째 지고 있다. 90%가 넘던 내 승률이 80%대로 떨어진 것을 생각하자 짜증이 솟구친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게임으로 풀어야하는데 팔이 요모양이니 이기지도 못하고 도로 스트레스만 쌓인다. 그렇다고 딱히 스트레스를 풀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하니 결국 게임기를 다시 잡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유로 스트레스가 자꾸만 쌓여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쿵쿵 머리를 울려대는 음악을 듣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풀릴 정도는 아니어도 그나마 진정되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평소라면 아이스크림이라도 입에 물고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현 상황이다. 아, 짜증나. 뭐 재밌는 일 없나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헤드폰이 훽 벗겨진다. 깜짝 놀아 돌아보니 아니나다를까,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이렇게 크게 음악을 들으면 청력이 상한다고 몇 번 말을 하나요?”
“남이사 뭔 상관인데요.”
“의사로서 충고하는 거니까 말 좀 들어요.”
“난 환자가 아니에요.”
“그럼 그 팔은 뭐죠? 팔의 부상은 제 책임도 있으니 살펴봐야겠어요.”
“필요 없어요.”
“왜 오늘 아침에 환부 소독하러 오지 않았나요? 어제 제가 말했었잖아요.”
“제가 알아서 해요. 그리고 아프더라도 팔이 아픈 거지 귀가 아픈 건 아니잖아요! 잔소리 듣다가 귀까지 망가지면 어떻게 해요?”

며칠째 계속되는 여자의 잔소리에 열이 뻗쳐서 다다다다 쏘아대다가 흠칫했다. 전시 상황에 장교에게 대드는 것은 총살형이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는 대한민국 육군기동기갑부대가 아니고, 계급으로 따지면 나 또한 장교급이지만 어쨌든 여기선 저 여자가 나보다 급이 높는 게 맞으니까. 조금 쫄리기도 하고 왜 죽어라고 전장을 뒹구는 나보다 저 여자가 계급이 높은지에 대해 화도 난다. 복잡한 마음으로 눈을 내리까는데 여자가 아무 말 없이 내 팔목을 들어올렸다.

“아야야야…!”
“거 봐요.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으니 자꾸 상처가 덧나는 거잖아요.”
“아이씨, 누가 아픈 팔을 잡으래요!”
“하도 멀쩡히 쏘아대길래 팔도 멀쩡한 줄 알았죠.”

이, 이……! 차마 욕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데 여자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아직까지 잡고 있는 내 팔을 끌기 시작한다. 따라가지 않으려고 버티려 했는데, 여자의 악력이 생각보다 센 바람에 떨치지도 못하고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분하다.

“놔요! 내 발로 따라갈 테니까!”
“어제도 그 말을 하고 달아났죠.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아요.”
“아프단 말이에요!”
“버티지 말고 순순히 따라오면 안 아플 거예요.”
“이씨, 왜 나한테만 이래요? 뭐 불만 있어요?!”

내 말에 여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상반신을 돌려 나를 본다. 움찔하는 내 기색을 느꼈음에도 여자는 비웃지 않았다. 그저 투명한 시선으로 내 눈을 마주할 뿐이다. 여자가 말했다.

“불만은 하나 양이 있잖아요.”

너무나도 여상스럽게 말해서 뭐라 반박도 못하고 버벅대다가 여자가 다시 걷기 시작하기에, 잡힌 팔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걸었다. 아씨, 티 안 낸다고 생각했는데 다 알고 있었나보네. 젠장, 쪽팔려. 내 잘못이 없는데도 괜히 부끄럽다. 이게 다 저 여자가 눈치가 빠른 탓이다.

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여자가 상주하는 의무실이었다. 여자랑 마주앉기 싫어서 내방자용 의자가 아닌 의무실 침대에 걸터 앉았더니, 선반을 뒤지던 여자가 힐끔 뒤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별 말 안 하네, 의자에 앉으라고 잔소리 할 줄 알았더니.

“팔 좀 걷어볼래요?”

얌전히 잡혀 온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는데 여자가 그렇게 말한다. 괜히 말을 듣기 싫어 창가만 바라보는데-바닥을 보면 왠지 내가 지는 것 같으니까- 여자가 내 팔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능숙하게 옷을 걷는다. 아씨, 그냥 내가 걷을걸. 붙잡힌 팔목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기분이 좋지 않다.

“이것 봐요. 제대로 소독을 안 하고 붕대도 안 갈아주니 세균감염이 되잖아요.”
“갈았는데요, 붕대.”
“붕대를 뒤집는 걸 가지고 갈았다고 하면 안 되죠.”

여자가 탄식하듯 말하고 상처를 살핀다. 붕대가 떨어져나가자 보이는 것은 길게 찢어진 상처다. 몸 바깥쪽이라 내눈으로 보이는 건 상처의 끝부분 뿐이었다. 여자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선 무슨 스프레이 같은 걸 뿌리고-나도 모르게 악 소리가 났을 정도로 아팠다- 주사를 놓더니 연고까지 바르고 새 붕대를 가져와 둘둘 감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여자의 자랑인 무슨 지팡이로 상처를 치료했겠지만, 며칠 전 그 지팡이가 산산조각 나버려 지금은 새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덕분에 한 세대 전의 치료법으로 이렇게 처치받고 있는 신세다.

“물에 닿지 않도록 하고, 왼팔로 물건 들지 말아요. 특히 게임기 같은 거 힘주어 잡지 말고요.”
“아예 한 팔을 쓰지 말라는 거예요? 어떻게 살라고…….”
“한 팔 안 써도 잘 지낼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아니, 불편함을 느끼며 생활하는 건 난데 왜 자기가 장담하고 난리람? 속으로 입을 삐쭉이는데 여자가 말을 잇는다.

“내일 아침엔 꼭 환부소독하러 오세요. 안 그러면 숙소로 찾아갈 테니까.”
“의무관이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안 그래도 부상자가 넘쳐나는데.”
“의사가 저 한 명뿐인 건 아니니까요.”

비아냥댔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친다. 에이씨, 말을 말아야지. 걷어올렸던 옷을 다시 내리는데 단단하게 감긴 붕대가 느껴진다. 확실히 나보다 붕대 감는 솜씨는 좋네. 아니, 전문가니까 당연한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건 그렇고, 본의 아니게 치료 받았으니 인사를 해야 하는데 진짜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여자의 얼굴을 보기 싫어서 소독하러 오지 않은 것도 있지만, 사실 감사의 인사를 해야하는 이 순간이 싫어서 방에서 혼자 치료를 했던 거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산뜻하게 대답하는 여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얼른 의무실 밖으로 향했다. 내가 두번 다시 여기 오나 봐라.

*

기지 내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사흘 전에 있었던 탈론과의 전면전 때문이다. 양쪽 모두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힌 싸움은, 오버워치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
상처투성이의 승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의외로 사망자는 적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여자가 필사적으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살렸기 때문이다- 기지 역시 일부분이 파괴되었다.

정말 아수라장이었지. 솔직히 죽는 줄 알았다.
그 날 나는 총 두 번의 자폭을 감행해야 했고, 세 번째로 호출해 탑승한 메카 역시 한쪽 팔이 아예 날아가 버릴 정도로 파괴되었다. 자폭 명령이 한 번 더 떨어지면 그 때는 죽으라는 소리로 알아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세 번째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었지.

어쨌든 그 날 입은 부상 때문에 며칠째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팔에 입은 부상을 제외하면 내 상처는 경미했고, 이 정도 상처로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기가 뭐해서 혼자 치료를 한 건데 이렇게 되다니.

“꼬맹이, 어디 갔다 와?”
“아, 레나 언니.”

레나 언니 역시 이번 전쟁으로 부상을 입었다.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늑골도 한 대 부러졌다고 했는데, 늑골의 상처는 여자의 지팡이가 부러지기 전에 치료받았다고 했다. 깁스를 한 채로 목발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이것도 재주다 싶다.

“그냥, 팔에 붕대 감으러.”
“의무실에 갔다 왔어? 치글러 박사님 안 계셨을 건데.”
“왜?”
“왜냐니, 지금 본부에서 회의 중이잖아.”
“…그래? 언제부터?”
“한 20분쯤 됐나?”

20분 전이면 내가 여자를 막 만났을 때다. 얼마나 한가하기에 나를 강제로 끌고 가서 치료할 정도였나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좀 의외인데. 시간 약속 칼 같은 사람이 웬 일이래? 게다가 간부회의면 빠질 수 없는 자리일 텐데. 책임감 때문인가? 에라,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상관이람.

“무슨 회의래?”
“윈스턴 말로는 보급 물자가 끊긴 일 때문이라던데. 탈론 놈들이 약탈해갔거나 했나 보더라고.”
“에이씨, 비겁한 놈들.”
“이번엔 진짜 아주 작정하고 덤볐더라. 으, 생각하기도 싫어.”

언제나 씩씩하던 레나 언니도 이번 전쟁에선 학을 뗀 모양이다.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몸서리를 친다. 레나 언니 말로는 탈론에 앙숙인 저격병이 있다는데, 전장에서 그 저격병과 마주치는 바람에 아주 된통 고생을 했다는 것이었다.

“옴닉이랑도 싸워야 하고, 탈론이랑도 싸워야 하고. 우리 진짜 바쁘네.”

내가 킥킥대며 말했더니 레나 언니도 피식 웃는다.

“그러게. 그래도 이번에 탈론은 반쯤 붕괴되었다던데? 우리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지만 저쪽은 완전 궤멸 수준이라고 하더라.”
“그거야 우리 쪽에서 사기 돋우려고 한 말이겠지. 비슷하거나 약간 우위 정도지 않을까?”
“오, 꼬맹이 머리 잘 돌아가네?”
“게임에서는 보통 그러더라고.”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기지 내에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로봇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격렬한 전쟁 후의 탈력감은 몸에 힘을 쭉 빼놓았다. 나는 이런 기분이 정말 싫다. 그래서 레나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는 좀 괜찮아?”
“나야 뭐. 나노머신 주사 한 대 맞으니까 확실히 낫던데.”
“다행이네.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어. 언니 게임 할 수 있지?”
“할 수야 있는데 요즘 분위기 안 좋잖아. 놀거면 네 방 가서 놀자.”
“그래!”

레나 언니가 놀아준다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보답으로 격투기 게임할 때 조금 봐줘야겠다.

*

처음부터 여자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오버워치에 오기 전에도 익히 들었던 ‘전장의 천사’에 대한 위명은, 보지도 못한 그녀에게 호감을 쌓게 하기엔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오버워치에 입성해 요원들을 소개 받을 때도 별 일 없었다.
다소 긴장한 채 악수를 청하는 내게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상냥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여자의 첫인상에 대한 내 감상을 말해보라면 세 마디로 일축할 수 있다. 능력있고 친절한 미인. 지금에 와서는 으엑, 하고 질색하는 중이지만 어쨌든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깨지는 데에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아나 사령관님이 작성하라고 준 서류에 기입을 끝내고서 제출하기 위해 집무실을 찾아갔을 때였다. 집무실 안에서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안 돼요! 난 그 아이를 환영할 수 없어요.”
“이미 결정된 사항이야, 앙겔라.”
“아뇨, 내가 볼 땐 오버워치 내에 그 아이가 있을 곳따윈 존재하지 않을 것 같네요.”
“송하나 요원은 한국에서 일어난 제2 옴닉사태를 수습한 베테랑 메카 조종사야.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아나 사령관님이 거론한 내 이름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뭐지? 지금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한 거야? 그 전장의 ‘천사’가?

“아뇨, 제가 볼 땐 그저 어린애일 뿐이에요. 애가 어떻게 전쟁을 하겠어요? 난 반대해요.”
“이미 그녀의 실력은 증명되었어. 메카 조종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인재야.”
“그래봤자 어린 아이죠. 이런 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반대했을 거예요. 어려보인다 싶었지만, 뭐라고요? 스무 살도 안 된 애라니! 그런 애가 있는 오버워치에 몸담고 있는 게 오늘처럼 후회되는 날이 없었어요.”

거기까지 듣고 나는 이를 악물며 물러섰다. 아, 그래? 얼마나 잘나셨길래 나랑 같은 조직에 몸담기도 싫다는 거야? 게다가 어린 애라고? 누구더러 어린애래? 어떤 어린 애가 메카에 타서 옴닉들을 쳐부수냔 말이야!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가까스로 참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집무실에 쳐들어가 따지는 것은 내가 엿들었다는 걸 시인하는 것과 다름 없었고, 나는 첫날부터 그런 최악의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씩씩대며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환영한다고 하더니 뒤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잘도 날 속였겠다? 하, 그 웃는 얼굴에 넘어간 내가 잘못이지. 육군에 있으면서 앞뒤 다른 인간들을 꽤나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오버워치, 급이 달랐다.

속을 다스리려 애쓰면서 상황파악을 하려 했다. 상대는 오버워치의 중역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학박사이자 전장의 천사라는 이명을 가진 야전 의무장교였다. 오버워치에 오래 있어서 발도 넓을 테고, 의무관이라 다른 사람들이 훨씬 호의적으로 대할 테다가 심지어 나보다 계급도 높았다. 전면에서 들이박기엔 너무나도 리스크가 컸다.

방법은 하나였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무시해주지. 댁이 나를 어린애로 무시하겠다면, 나도 똑같이 무시해주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마음먹고 나서, 그 이튿날부터 여자를 피해다녔다. 사실 식사 시간에 빨리 가서 먹기만 하면 여자와 마주칠 일은 없을 터였다. 여자는 의무관이라 대부분의 시간을 의무실에서 보냈고, 나는 메카 조종사라 다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훈련에서나 전장에서 다칠 때가 있긴 했지만, 방에 있는 의료함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한 범위였다. 하지만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여자는 내게 잔소리를 해댔다.
허리 좀 펴고 다녀라, 과자만 먹지 마라,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다, 밤 새워서 게임하지 마라, 다쳤으면 바로바로 의무실에 와라 등등등.
애엄마도 아니면서 무슨 잔소리가 저렇게 심해. 내가 있을 자리 따윈 없다더니 남들 앞이라고 잔소리로 챙기는 척 하려는 모양이지?
그 때마다 내 심사는 베베 꼬여갔고, 의무관이 보이기만 하면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며칠 전에 탈론과의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

기지는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였지만, 끊겼던 보급물자가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살짝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닷새를 기다린 끝에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치품에 가까웠지만, 상점에서 팔린다는 것은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을 뜻했기에 기꺼운 일이었다.

도리토스 한 봉지와 닥터페퍼,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사서 신나게 숙소로 돌아가는데 하필이면 모퉁이에서 여자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절로 얼굴이 굳는데, 여자는 내 표정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쳐다보고 있었다.

“식사는 안 하면서 군것질을 할 셈인가요?”
“…….”

여기에서 대답을 했다가는 잔소리 폭탄을 맞을 것이 뻔해서 무시하고 지나가려는데, 여자가 다친 왼팔을 또다시 잡아챘다.

“아야야, 아씨, 아프잖아요!”
“환부소독하러 오라고 했잖아요.”
“소독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거든요?”
“제대로 소독했으면 방금 반응보다는 훨씬 작은 반응이 나왔어야 했어요. 그리고 부상입은 몸으로 식사도 제대로 안 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아주 명의 납셨네. 보지도 않고 알아맞추다니 솔직히 좀 소름돋는다. 사실 레나 언니랑 게임하면서 하도 게임기를 열심히 조작했더니 그날 저녁에 피가 좀 새어나오더라고. 그래서 그 다음날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름 조심하고 있었는데, 하필 여기에서 여자를 만날 줄이야.

“따라오세요.”
“아니, 잠시만요, 저 아이스크림 녹는데……”
“먹으면서 따라와요.”

되도 않는 핑계를 대어봤지만 역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진짜 운 더럽게 없네. 며칠만 더 조심했으면 상처 가지고 뭐라고 잔소리 들을 일도 없었는데…….

이틀 전에 다짐한,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나는 의무실 침대에 다시 앉아있게 되었다. 여자는 저번에도 내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스프레이를 들고 다가왔다. 아 진짜 싫어. 그런 표정이 내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여자가 말했다.

“아프지만 효과는 확실한 제품이에요. 나노머신 주사도 놔줄테니 맞고 가도록 해요. 잠시만 참으면 2주일 고생할 거 1주일만 고생하면 되니까.”
“누, 누가 뭐래요?”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요.”

이런 쓸데없는 배려가 화가 난다. 여자의 태도 기저에 나를 애취급한다는 의식이 깔려있는 게 눈에 보인다. 내가 비록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성인인데! 심지어는 육군에서 4년이나 굴렀던 군인인데 이런 취급이라니!
내가 속으로 궁시렁대든 말든, 환부를 살피던 여자가 설핏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상처가 터졌었군요? 왜 바로 찾아오지 않았죠?”
“…….”
“오늘은 말을 좀 들어야겠네요. 왜 의무실을 피하는 거죠? 의무실에 무슨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요?”

의무실이 아니라 당신한테 있거든?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여자가 그 지랄맞은 스프레이를 뿌리고-이번에는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주사를 한 대 놓은 후, 붕대를 감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저한테 불만 있어서 그러는 건가요?”

순간 흠칫했다. 성격상 이렇게 직설적인 화법을 취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는 사실이 더 당황스러웠다. 뭐라고 말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데 붕대를 다 감은 여자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해봐요. 내가 고칠 수 있는 부분이라면 고칠게요.”

아니, 당신 천성을 어떻게 고친다는 거야. 게다가 앞뒤 다른 인간에게 당신 성격이 문제요, 하면 잘도 고치겠다. 불신으로 가득찬 내 눈빛을 읽었는지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하나 양에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우리, 처음 인사 나누고 나서는 제대로 대화도 못 해본 것 같은데.”
“일방적인 잔소리라면 많이 들었지만 말이죠.”
“설마 제가 몇마디 했다고 그러는 건가요?”

몇마디라니! 마주칠 때마다 쏟아내던 잔소리가 어떻게 겨우 몇마디로 단축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죠.”
“저번에 도와준 걸로 봐서는 절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그냥, 전 박사님 같은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저 같은……?”
“본능적으로 싫어한다고 해두죠. 치료는 감사하지만 다음부터는 다른 의사에게서 받도록 할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당황한 듯한 표정의 여자를 뒤로 하고, 나는 종이봉투를 챙겨서 서둘러 의무실을 나섰다. 당장 내일부터의 의무실 담당자표를 확인하고 저 여자를 피해서 소독하러 다녀야겠다. 팔이 아픈 동안에는 계속해서 여기에 끌려 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나는 진절머리를 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상황이 그렇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숨기며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괜히 저번에 들이받았나 하는 후회도 조금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싫어한다는 말까지는 하지 말 걸. 하지만 그래봤자 엎지러진 물일 뿐이다.

상황은 간단하다.
저번에 약탈 당했던 보급 물자에 발신장치가 들어 있었고, 그를 기반으로 위치추적을 해서 탈론의 근거지를 습격하기로 한 것이다.
기지 내에 부상을 입지 않았거나 가벼운 부상만 입은 요원들을 모아 공격부대를 편성했다. 팔이 거진 다 나은 나 역시 그 안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의무관 중에는 여자 역시도.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를 원했는데, 하필이면 전장에 같이 투입되다니.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여자의 표정을 힐끗 살피니, 다른 때와 별 차이 없는 표정이다. 하긴, 오버워치에서 버텨낸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와서 본성을 드러내겠어. 신경쓰지 말자. 다른 사람 이목도 있는데 전장에서 나를 죽일거야 어쩔거야.
쓸데없는 신경쓰지 말고 집중하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습격은 실패였다.
탈론은 발신기를 이용하여 함정을 팠던 것이다. 근거지로 위장된 곳에는 옴닉들이 가득 차 있었고, 뒤에는 탈론이 버티고 있었다. 상황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꼼짝없이 갇힌 뒤였다.

곧바로 지원병력 요청을 한 뒤, 최대한 시간을 벌었다. 배수진을 친 상태여서 그랬는지 다들 평소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게, 탈론이 심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는지, 일주일 전에 비해 그 수가 훨씬 적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옴닉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아군과 적군이 그 세가 비등비등했다.

융합포가 박살난 메카로 한차례 자폭을 한 뒤, 나는 새 메카가 도착하기 전까지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총탄이 쉴새없이 머리위를 오갔다.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딱 3분, 3분만 버티면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든 저 멀리에 무언가가 납작 엎드려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저격병이다! 레나 언니가 말했던, 앙숙인 저격병이 분명했다. 어디를 겨냥하는 거지?

고개를 휙휙 돌리는 내 눈에 하얀 바탕에 빨간 점이 들어왔고, 그 순간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엄청난 격통이 배를 쑤셔왔다. 어릴 적 자주 가지고 놀던 불꽃폭죽을 배에 마구 쑤셔넣고 헤집는 느낌이었다.

“하나 양, 하나 양! 의식 놓지 말아요!”

씨이발… 욕지기가 악다문 잇사이로 새어나왔다. 아, 내가 왜 그랬지. 레나 언니라면 또 몰라, 하필이면 사이도 나쁜 여자를 위해 몸을 날리다니. 게다가 이번이 두 번째다.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 사실은 알았다. 여자가 부상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몸이 절로 움직였다. 밉든 싫든 간에 여자는 어쨌든 사망자를 줄여줄 최후의 보루였다.
그 마법의 지팡이가 없다는 게 정말 천추의 한이었다.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배에서 계속 새어나오고,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울 듯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

생각해보면, 나는 오버워치에 대해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옴닉사태 이후 인류를 구한 영웅들. 잡음이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계를 위해 일한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나 눈에 띄었던 것이, 천재 의학박사인 앙겔라 치글러였다. 이름 그대로 천사의 이미지를 가진 그녀는 전선에 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발키리 슈트를 개발했고, 마법의 카두세우스 지팡이를 만들어 냈다. 온갖 매체에서 위대한 업적이라고 떠들어 댔었지.

어려서부터 그 이름을 듣고 자랐다. 대중매체는 그녀를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탁월한 능력. 환상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환영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속이 쓰렸던지. 숙소의 방을 빙빙 돌면서 당황과 분노로 얼룩진 마음에 눈물까지 찔끔 났었더랬다.

분했다.
내 실력을 증명하기도 전에 그저 어린애 취급 당한 것이. 그리고 내가 오버워치에 있을 자리 따윈 없다고 단언당한 것이.
그래서 더 기를 쓰고 전장을 누볐다. 나도 이만큼 할 수 있다고, 난 그저 그런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다.

탈론과의 전면전이 일어난 날, 그 날도 그녀를 의식하며 융합포를 갈겨대고 있었다. 자폭 명령이 떨어진 직후 메카를 날려보냈고, 탈출한 나는 블레스터로 주변을 경계하며 새 메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는 그녀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 몸 하나 챙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어쨌든 의무관인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긴장하며 주위를 경계하던 도중, 지척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녀를 감싸고 바닥을 구르는 중이었다. 왼팔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폭탄의 파편이 박힌 것 같았다.

“아으으으으……”
“버텨요, 잠시만 기다려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질끈 감은 내 눈꺼풀 위로 노란 빛이 번뜩였다. 통증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법의 지팡이였다. 하지만 그도 얼마 가지 않았다. 또다시 폭발음 소리가 났고, 그와 동시에 메카가 도착한 것을 본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메카에 탑승했다.

“아으…, 존나 아프네.”

웬만해선 입밖으로 내지 않는 욕지기가 절로 튀어나왔다. 마법의 지팡이가 팔을 다 고치기도 전에 2차 공격이 들어온 것이었다.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상황에서 태평하게 치료를 받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른손으로라도 능숙하게 메카를 조종하며 탈론 진영을 향해 융합포를 쏴댔다. 왼팔을 잘못 쓰니 그쪽으로 집중 포격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박살이 난 메카의 왼팔을 보며 여차하면 자폭할 마음을 먹고 있는데 탈론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 왼팔을 살폈다. 피는 멎어 있었지만 마저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심했다.

메카에서 내렸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금발의 머리카락과 피묻은 가운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별 상처가 없는 듯 해보였고, 가운에 묻은 피는 부상병의 피인 것 같았다. 고개를 조금 더 돌려보니 바닥에 눈에 익은 파편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의 지팡이였다. 전쟁 중에 파괴된 것이 분명했다. 지팡이도 없는데 어떻게 부상병을 치료하고 있는 거야……. 약간 걱정이 되어 다시 그녀를 보니, 그녀는 몹시도 집중한 얼굴로 부상병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얀 손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기운이 빠져 상처투성이의 메카에 몸을 기댔다. 광택으로 번쩍이는 메카의 옆면에 내 얼굴이 비쳐졌다. 나는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애 맞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래, 애 맞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나는 그녀의 칭찬을 바라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어찌나 수치스럽던지, 의무병에게 상처를 치료받은 후 나는 줄곧 그녀를 피해 다녔다. 평소보다 더 가시를 세우고서. 미워하는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자신을 납득할 수 없었다. 정말 어린애 그 자체였다.
생각이 정리되자 눈이 절로 떠졌다. 밝은 빛이 눈꺼풀 사이를 찔러댔다. 몇 번 눈을 깜박이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밋밋한 하얀 천장, 그리고 등에 느껴지는 딱딱한 침대. 의무실이었다.

“정신이 들어요?”
“…….”

스스로를 인정했다고 해서 당장 태도를 바꾸는 것까지는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겸연쩍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의무실을 뛰쳐나가고 싶은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아, 그냥 계속 자는 척 할걸. 괜히 눈을 떠가지고…….

“깨어난 거 알아요.”
“에이씨…….”
“일어나려고 하지 말아요, 복부에 상처가 심하니까.”

일어나기는 커녕, 안 그래도 한마디 했다고 배가 아파서 숨을 참던 중이었다. 배에 상처를 입으면 말하는 것도 힘들구나. 처음 안 사실이다. 사실 이렇게 다친 것도 처음이고.

“하나 양이 다친 직후에 지원병력이 도착했어요. 탈론은 물러났고, 옴닉은 소탕했어요. 궁금한 게 있나요?”

주위는 조용했다. 의무실에는 나와 그녀밖에 없는 것 같았다. 궁금한 거? 솔직하게 내가 애라는 걸 인정했으니 더 이상 뻗댈 것도 없다. 나를 반대했던 이유나 물어봐야지. 나는 배가 아닌 목으로만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박사님은 제가 왜 싫으세요?”
“…의외의 질문이네요. 오히려 그런 말은 제가 묻고 싶을 정도인데.”
“제가 오버워치에 있을 자리 따윈 없다면서요.”
“네? 그건 무슨 소리죠?”
“오버워치에 온 첫 날에…….”

아, 겨우 몇마디 했다고 배가 너무 땡긴다.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끙끙대는데 그녀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더니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때 대화를 들은 거예요?”
“네.”
“하아……. 어쩐지…….”

그녀는 길게 탄식하고는 이마를 짚었다. 끙, 소리를 내더니 의자를 땡겨 침대에 가까이 다가왔다.

“하나 양, 나는 하나 양이 싫은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럼 왜 그런 소릴 하셨는데요?”
“……난 이 전쟁이 싫어요.”

그녀는 아주 당연한 소리를 했다. 누가 전쟁을 좋아하겠어? 전쟁광 같은 미친 놈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정상인은 전쟁을 싫어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리고 그녀도 마찬가지겠지.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전쟁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쟁따윈 어서 끝나버렸으면 하고 바랐어요. 이런 끔찍한 전쟁 같은 건 내 세대 때 다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십여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해서 오버워치에 몸을 담았어요. 그런데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어느덧 이렇게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탄식하는 것 같았다.

“다음 세대는 전쟁따윈 없는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 다음 세대를 전장에 끌어들이고 있네요. 하나 양처럼 어린 사람이 전쟁터에 나오는 게 나는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아나에게 하나 양의 영입을 반대한다고 항의했죠.”
“그 날 오전에는 악수까지 하면서 잘 부탁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때는 하나 양의 나이를 듣지 못한 상태였어요. 동양인은 나이보다 더 어려보이니까……. 아무리 어려 보여도 못해도 20대 중반은 될 거라고 생각했죠.”

내 얼굴을 보고 20대 중반이라고 생각했다니,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보다 그게 더 충격이다.

“그날 저녁 아나를 찾아갔을 때, 아나는 하나 양의 신상정보를 보고 있었어요. 세상에, 무려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더군요. 그런 아이를 전쟁에 끌어들인 오버워치가 너무나도 회의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런 소리를 했던 거예요.”
“…전 성인이에요. 제 의지로 오버워치에 온 거라고요.”
“그렇죠. 하지만 하나 양이 10대라는 것 역시 사실이잖아요. 아직은 보호받아야 할 나이인데…….”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발끈해서 말했다.

“저 이래봬도 4년차 베테랑 메카 조종사거든요?”
“그러니까 더 문제죠. 10대 중반부터 전쟁터를 누볐다는 거잖아요. 끔찍한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죠.”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그녀-앙겔라 치글러 박사는 내가 싫었던 게 아니라, 아직 10대인 내가 전쟁터에 나왔다는 사실이 싫었단 거지?
…한마디로 오해였단 이야기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배가 아파서 금방 그만두었지만.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설명에 그간 응어리져왔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게 느껴진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정도로 얄팍한 태도 변화였다. 슬쩍 시선을 들어 치글러 박사를 보니, 그녀는 따뜻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씨, 깜짝이야. 왜 저렇게 날 쳐다보고 난리람.

“그럼 지금까지 제가 하나 양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네.”
“그런데도 두 번이나 절 도와줬고요?”

그건……. 아이씨.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진다. 젠장, 할 수만 있다면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다. 물론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이 몸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라,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 내 귀에 치글러 박사-박사님이 웃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이 말이 꼭 하고 싶었어요.”
“……됐어요. 박사님도 절 치료해줬으니 셈셈으로 쳐요.”
“어떻게 그래요.”

문득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흠칫 해서 눈을 뜨니 박사님이 미소지은 채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동안 마음 고생 심했겠네요. 미안해요.”
“…죄송해요. 그간 버릇없이 굴어서.”
“괜찮아요. 오해였는걸요.”

그리고서 그녀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싱긋 웃더니 말했다.

“하나 양은 현재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어요. 카두세우스 지팡이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저랑 의무실 생활을 해야겠네요.”
“…농담이시죠?”
“진짠데요? 이런 걸로 농담하지는 않아요.”
“병실 있잖아요. 병실을 놔두고 웬…….”
“지금 다른 병실은 환자들로 가득 차 있어요. 남는 침대는 의무실 침대 뿐이랍니다.”

아, 진짜냐고……. 오해가 풀린 건 좋은데 방금 전까지 미워했(다고 생각했)던 사람하고 6주나 같이 있어야 한다고?! 오 맙소사.

“그 동안 친해져봐요, 우리.”

그렇게 말하며 박사님이 활짝 웃는다. 나는 어색하게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를 보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6개월간 삽질한 셈이구나……. 스스로의 멍청함에 속으로 이불킥을 하고 있는데 박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링겔을 만진다. 그리고는 머리를 손으로 내 눈을 감겨준다.

“마취가 슬슬 풀릴 것 같아서 다시 놨어요. 피곤할 텐데 이제 자요.”
“...저 진짜 여기서 지내요?”
“그럼요. 걱정 말아요, 저도 거의 의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박사님이랑 생활하면 잔소리 엄청날 것 같은데.
다 나을 때까지 게임도 못 하게 할 것 같고, 과자도 못 먹게 할 것 같고, 자세 교정도 강제로 시킬 것 같고.......
박사님은 좋아도 박사님의 잔소리는 무섭게 느껴져서 뭐라고 하고 싶은데, 박사님이 머리를 쓰다듬으니까 의식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다음에 눈을 뜨면 잊지 말고 잔소리 조금만 줄여달라고 해야겠다.
따뜻한 손길을 느끼면서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끝.


7월에 썼던 건데 전글에 댓글 보니까 하나 다친 거 없냐고 해서 올려봄.
쓰고 있는 건 새드 엔딩이라...
사실 나는 버섯 소동처럼 내 코드에 맞는 개그 집어넣은 글이 제일 좋더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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