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건함경쟁이라고도 표현하는 해군력경쟁은 흔히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까지 영국과 독일을 필두로 유럽 열강 각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 벌인 대규모 경쟁 또는 일본의 런던 해군 군축조약 파기 이후부터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미국과 영국, 일본이 벌인 대규모 경쟁을 가리킵니다.
이들처럼 오대양 육대주를 무대로 하여 경쟁적으로 대량으로 군함을 건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기 멀리 떨어진 남아메리카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쟁이 있었죠. 남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세 강대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가 벌인 해군력 경쟁이 바로 그 경쟁이지요.
브라질이야 남아메리카 대륙의 절반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남아메리카 최강대국이고요, 아르헨티나 역시 후안 페론의 집권과 군사 정권 이전까진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들었을 정도의 강대국이었습니다. 또한 칠레는 세계 제1의 구리와 초석 생산국으로서 그 경제력을 과시한 바 있고요. 하지만 어느 이웃나라가 그렇듯 이들 역시 서로 사이가 나쁜 존재였습니다. 나름 강대국이던 그들은 서로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럼 이들이 그 자존심을 꺾기 위해 국력을 어디에 투사하느냐, 바로 전함이었죠.
1. 전초전
1) 아르헨티나와 칠레
- 아르헨티나와 칠레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40년대부터 당시 미개척지였던 파타고니아 지역의 영유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때문에 양국 간의 감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1872년 칠레 해군이 자기네 영해에서 허락 없이 운항한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상선 몇 척을 나포한 것을 계기로 아르헨티나 해군이 똑같은 이유로 칠레 상선에게 보복하면서 1878년 두 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갔지요. 파타고니아의 산타크루즈 강으로 아르헨티나가 함대를 파견했고 칠레 역시 똑같이 대응하면서 양국 해군은 산타크루즈 강 어귀에서 대치 상태를 벌였으나 양국은 급히 불가침조약을 통해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피했습니다.
- 칠레 해군의 방호순양함 에스메랄다 -
이후 두 나라의 관심사는 서로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칠레는 페루&볼리비아 연합군과 태평양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관심사가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고 아르헨티나는 이 틈을 타 파타고니아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파타고니아의 대부분 지역을 영토로 편입하였지요. 관심사가 서로 달라졌긴 해도 두 나라 모두 해군력 강화를 위해 전함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죠. 1883년 칠레는 영국에게 2,997톤 방호순양함 에스메랄다(Esmeralda)를 주문하였고 아르헨티나는 1880년 영국에게 4,200톤 장갑함 알미란테 브라운(Almirante Brown)과 1886년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1,530톤 방호순양함 파타고니아(Patagonia)를 주문하였죠.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페루&볼리비아로부터 영토를 대거 할양받아 국력이 크게 늘게 된 칠레는 1887년 함대 확충 예산으로 3,129,500 파운드, 현재 가치로 약 5천억 원에 달하는 큰 예산을 편성하여 1889년 6,901톤 전함 카피탄프라트(Capitán Prat)와 방호순양함 프레지덴테에라수리스(Presidente Errázuriz), 프레지덴테핀토(Presidente Pinto) 2척, 어뢰정 2척을 주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아르헨티나 정부는 같은해 2,336톤 전함 인데펜덴시아(Independencia)와 리베르타드(Libertad), 2척을 주문하였죠. 두 나라 간의 본격적인 해군력 경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었습니다.
- 아르헨티나 해군의 장갑순양함 가리발디
두 나라 간의 경쟁은 1890년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심지어 1891년 칠레가 내전으로 한바탕 고생할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죠. 1890년대 두 나라의 해군이 주로 경쟁하던 항목은 방호순양함 항목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1890년 베인티신코데마요(Veinticinco de Mayo), 1891년 누에보데훌리오(Nuevo de Julio)를, 1892년 칠레가 블랑코엔칼라다(Blanco Encalada)를,
1894년 아르헨티나가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를, 1895년 칠레가 에스메랄다(Esmeralda)와 미니스트로센테도(Ministro Zenteno), 아르헨티나가 가리발디(Garibaldi)를, 1896년 칠레가 오이긴스(O'Higgins)와 어뢰정 6척을, 아르헨티나는 산마르틴(San Martin)을, 아르헨티나가 1897년과 1898년 각각 페이레돈(Pueyrredón)과 헤네랄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구입하는 등,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가관이었죠.
- 영국 해군의 전함 스위프트쇼어(Swiftsure). 원래 칠레 해군의 전함 콘스티투시온이 될 예정이던 이 전함은 5월 협정의 결과 영국 해군 소속이 되었다.
이 병림픽은 1899년 푸나데아타카마 지역을 둘러싼 두 나라의 영유권 분쟁이 미국의 중재로 해결되면서 잠시 누그러지는 듯 했으나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 할 두 나라는 여기서 멈출 기세가 아니었습니다. 1901년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로부터 장갑순양함 리바르디아(Rivardia)와 마리아노모레노(Mariano Moreno), 2척을 구매하자 이에 질세라 칠레는 12,175톤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콘스티투시온(Constitución)과 리베르타드(Libertad)를 구입하는 비장의 수까지 끌어들였습니다. 드디어 1만톤이 넘는 전함까지 온 것입니다.
- 일본 해군의 장갑순양함 카스가(春日). 원래 아르헨티나의 장갑순양함 리바르디아가 될 예정이던 이 군함은 5월 협정의 결과 일본 해군 소속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자 두 나라가 진수하는 군함의 대다수를 주문받은 영국은 당황하였습니다. 이렇게 흘러가다 두 나라는 진짜 전쟁이라도 한판 벌일 기세였고 아르헨티나로부터 밀을, 칠레로부터 초석을 수입하지 못하게 되어 전쟁이 나면 곤란해지는 나라는 바로 영국이었죠. 또한 군함을 구매하게 된 예산의 출처는 대부분 각국의 차관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영국이 빌려 준 차관도 포함되어 있었죠. 결국 1902년 5월 28일 영국의 중재 하에 두 나라는 5월 협정(Pactos de Mayo)을 체결하였습니다. 협정의 기본적인 내용은 영유권 분쟁 종결과 양국 관계의 정상화였습니다만 5년간 신규 군함 도입 중지와 군함 도입 시 18개월 전 서로에게 통보하는 등 해군력 경쟁을 규제하는 내용도 들어가 있었죠. 두 나라가 구매하여 한창 건조 중이던 전함은 영국과 일본이 대신 사갔습니다.
아무튼 전초전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여기, 두 나라의 경쟁에 가만히 있지 않을 나라가 하나 있었죠. 바로 브라질이었습니다.
P.S. 꼭 이런 식으로 경쟁을 해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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