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심심해



어릴 적, 새로운 말을 배울 때마다 쓰고 싶어 안달을 내곤했다. 간단한 단어건, 어려운 단어건. 새로움이 날 사로잡은 걸까. 잘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너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너를 보고서 세상 모든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그러했다. 사랑의 정의는 사전에 등재된 것보다 넓어졌고, 넓어져야만 했다. 내가 만든 사랑의 뜻과 나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늘 고민이었다. 나의 당신은 알고 있었을까. 그런 나는 아이처럼 너에게 나의 사랑을 숨기며 보여줬다. 동성 친구는 이럴 수 있으니까. 그게 내 유일한 사랑의 강점이니까. 간단하고 쉬운 스킨십. 이따금 너의 육체를 상상하며 혼자만의 세상으로 빠져드는 나를 보고 경멸하기도 했으나, 그건 불가항력적인 힘이었다. 이렇게 될 것을 그 누가 알고 있단 말인가.
붉은 입술, 안경에 눌린 콧잔등만 봐도 두근거리던 내 마음을, 너도 알아줬으면 했는데. 너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안경을 쓴 채로, 의자에 기대어 입을 살짝 벌린 채 바보처럼 잠든 너의 입술에 키스를 하려다, 안경에 코가 닿아 깨버린 너에게 변명했던 날들이 떠올라. 시험 준비를 하느라 츄리닝에 부스스한 머리를 가지고 과방에서 함께 밤을 새고 있었지. 강의실 한켠에서 전날 동아리 술자리 숙취에 엎드려 죽어있던 나에게 건강 드링크를 주며 다가왔던 네가 떠올라. 그때 너는 분명 큰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있었어. 지금보다 머리는 짧았구나. 네일아트를 좋아하는 네 손톱은 길고, 깔끔했어. 드링크를 눈앞에 놓아주던 네 가지런한 긴 손가락과 예쁜 네일아트를 기억해. 색은 기억나지 않지만. 네 얼굴의 아름다움에 가려서 그래서였을까. 난 그렇게 너를 사랑했다.
나, 연애 시작했어.
담담하면서도 기쁜, 붉은 얼굴. 그런 얼굴로 말하는 너의 묘한 표정.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너에겐 숨기고 싶지 않았어.
왜 나에겐 숨기고 싶지 않았을까. 어떤 반응을 바란 걸까. 나는 일단 기뻐해준다. 그건 힘든 일은 아니었다. 용기가 없었던 사람의 한계겠구나 싶을 뿐.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너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난 짧게 기쁘다. 너도, 너도 나와 같구나. 같구나. 같은 사람이구나. 난 그래서 기쁘다. 나도 사랑할 수 있구나. 나에게도 기회가 있구나. 그 다음은 나일 수 있겠구나. 빨리 헤어졌으면 좋겠어.
너에겐 거짓말하기 싫었어.
아냐, 고마워, 거짓말하지 않아줘서.
날 믿어줘서 고마워.
그 사랑 오래 갔으면 좋겠어.
벌써 커플 지갑 맞춘 거야?
만난 지 며칠이야, 벌써 100일 넘었어? 야, 너무하잖아, 좀 일찍 말해주지.
여기서 영희는 거짓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요? 영희의 거짓말은 칸트의 시점에서 어떻게 공격받을 수 있을까요? 논하세요. 나는 거짓말쟁이일까요? 아닐까요? 나쁜 거짓말일까요? 아닐까요? 아냐, 모두 거짓말은 아냐. 거짓말이지만, 진심이야. 그 다음 기회는 나에게 있을테니까. 너의 애인에겐 실례이겠지만, 나에게도 기회는 있어. 동등해. 그러니 이건 모두 거짓말은 아니야. 괜찮아. 시큰거리는 가슴 한켠을 그렇게 진정시키려 한다. 견딜만 해. 괜찮아.
그리고선 난 보게 되었어, 너의 손톱을. 네일을 좋아해 언제나 길고 알록달록 치장을 했던 너의 손톱.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짧고 뭉툭한 손톱이 보였어. 보였어. 응.
...축하해.
나는 말을 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