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오늘, 나는 동네에서 열린 백일장을 망친 뒤 꽁한 기분으로 친구 어머니 차를 타고 귀가 중이었다. 라디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러잖아도 백일장과 흐린 날씨 탓에 좋지 않았던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어린 시절이라 정치에 대해 잘은 몰랐지만, 친근하고 소박한 봉하마을 촌장님의 모습이 각인됐었던 만큼 충격이 컸다. 대학생이 되고 참여정부의 노동 탄압 내력을 접한 뒤 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깨졌지만, 아직까지 그 순간은 삶을 통틀어 손에 꼽도록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일말의 부채감도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럴 세대가 아니기도 하지만, 민주진영이 이른바 '지못미 정서'를 재생산하며 결속을 다지는 것에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본인이 의도했다고 여기고 싶지 않으나,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서거가 민주진영에 남긴 트라우마로 인해 그의 생전 행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불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노무현은 기득권에 홀로 맞서다 희생당한 순교자의 지위로 격상됐고, 남은 이들은 그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보다 강력한 진영논리에 매달리게 됐다. 외부인으로서 섣불리 탈상을 권할 수는 없겠으나 이 같은 정치 양태가 영영 지속되는 것이 분명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생애 내내 견지했던 이상과 진실성만큼은 믿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시민들과 함께 최루탄을 맞아 가며 엄혹한 군부독재에 맞섰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도 발 벗고 나섰던 인권변호사였다. 정치권에 진입한 후에는 5공 청문회에서 국민들의 울분을 앞장서 대변했으며 부울경 출신임에도 3당 야합을 거부하는 소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역주의 타파와 탈권위주의를 향해 일관되게 보여준 집념 또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언론과 사학재단, 검찰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혁안을 추진했으며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국가보안법 폐지를 공론화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도전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는 지금보다도 수구 기득권의 위세가 훨씬 강했고, 여러 이유로 좌파 진영과도 척을 지고 말았기에 그에게는 우군이 없었다. 여당의 역량 미달과 스스로의 어중간한 행보로 국정 동력을 소진한 면도 있지만, 기득권층의 방해공작과 같은 숱한 대내외적 악조건이 그의 행보를 막아세운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IMF를 갓 벗어난 뒤라 어느 정도 불가역적이었으며 세계적으로도 제3의 길 노선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음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결과적으로 참여정부는 저조한 지지율과 레임덕에 시달리다 막을 내렸고, 노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의 무도한 표적수사에 내몰려 목숨을 끊었다. 그가 개혁하고자 했던 수구언론과 검찰을 위시한 지배기구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노무현의 도전이 결코 무가치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가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틀어 부르짖었던 가치들은 수많은 시민들의 개혁을 향한 열망에 불을 붙였고, 이로 인해 강고한 매판 기득권과 지역 구도에도 천천히나마 균열이 가고 있다. 사회 전반의 자유화와 정당 민주주의, 시민 참여의 활성화 등 그가 선구적으로 제시했던 의제들은 오늘날 진영을 막론한 상식이 됐다.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한다는 그의 신조처럼 세상은 분명 그가 원했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사회주의자인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대한 자유주의자'로 평한다. 여러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사회의 다방면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다. 남은 우리가 그의 유지를 잇는 방법은 참여정부와 그 후신 세력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일 것이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진보주의자로 정체화한 노 전 대통령이 오늘 우리 곁에 있었다면, 자신을 신격화하기보다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높이 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노 전 대통령이 떠난 지 어언 15년이 흘렀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여운은 아직도 강렬하다. 민주 투사이자 소탈한 이웃이었던 인간 노무현을 추억하며, 대통령 노무현이 이루지 못한 여러 과제들을 우리 손으로 끝내 성취하리라 다짐한다. 어지러운 세상사는 우리에게 오롯이 맡기시고, 그대는 아픔도 모순도 없는 곳에서 영원안 안식을 누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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