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라틴어 명사에 대해 얘기를 해보려고 해. 동사만큼 무진장 복잡하진 않지만 그래도 설명할 거리가 꽤 많으니 글이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일단 이번에도 우리가 친숙한 영어부터 시작해보자. 다음 문장들

The boy is happy.

The name of boy is John.

I gave the boy a book.

I meet the boy.

I was told by the boy.

에서 'boy'는 일단 다 명사라는 걸 알 수 있지. 그런데 명사는 명사인데, 가만 보면 이 boy가 문법적으로는 각각 다른 위치에 있다는 거에 주목해보자. 위 문장들을 한국어로 번역해보면,

소년은 행복하다.

소년의 이름은 존이다.

나는 소년에게 책을 주었다.

나는 소년을 만난다.

나는 소년한테 말을 들었다.

이렇게 한국어로 써도 다 다른 '조사'가 붙어서 의미가 달라지는 걸 알 수 있어. 여기서 '격(case)'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게 뭐냐면 쉽게 말해서 명사에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시키는 변화형이라고 생각하면 돼. 라틴어에는 크게 놓고 보면 주격, 속격, 여격, 대격, 탈격의 5개의 격이 존재하는데, 각각의 격의 의미와 뜻은 정리해보면 대충 다음과 같아.

주격(Nominative) : 명사가 그 문장의 주어임을 나타냄. 

속격(Genitive) : 명사가 어떤 다른 명사에 속해있다는 것을 나타냄. 영어의 's 나 한국어의 ~의 를 떠올리면 될듯.

여격(Dative) : 명사가 간접목적어임을 나타냄. 한국어의 ~에게 라는 뜻으로 일단 받아들여도 됨. 몇몇 동사들은 여격을 직접목적어로 받기도 함.

대격(Accusative) : 명사가 직접목적어임을 나타냄. 한국어의 ~를 이라는 뜻으로 일단 받아들여도 됨.

탈격(Ablative) : 라틴어 명사를 공부하는 데 가장 머리가 뽀개지는 부분 중 하나. 정말 많은 문법적 기능을 가진 격이라 여기 다 못씀.

그 외에도 호격(Vocative), 처격(Locative) 같은 게 있긴 한데 호격은 대부분 주격이랑 비슷하거나 어미만 살짝 달라지는 정도고, 처격은 극히 일부 명사에서만 쓰여서 그냥 예외취급하고 나올 때마다 따로 외워줘도 됨.

자, 그럼 명사마다 격변화가 어떻게 바뀌는지 한번 알아볼까? 일단 '물'이라는 뜻을 가진 'aqua'를 보면,

단수

주격 : aqua

속격 : aquae

여격 : aquae

대격 : aquam

탈격 : aqua

복수

주격 : aquae

속격 : aquarum

여격 : aquis

대격 : aquas

탈격 : aquis

슬슬 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지? 일단 격에 따라 어미가 달라지는 건 둘째치더라도, 단수 속격과 여격, 복수 주격이 같은 형태고 복수 여격, 복수 탈격이 또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어. 그래서 '격의 형태가 똑같은 경우가 많아서 문장을 읽다 보면 어떤 격인지 햇갈려서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 아님?'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아예 없긴 하지만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돼. 그리고 이 10개의 격변화는 역시 라틴어를 배워보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외워야 되는 것 중 하나야.

그렇다면 모든 명사는 이런 변화를 따를까? 당연히 아니지. '말(horse)'라는 뜻을 가진 'equus(그 자동차 에쿠스가 여기서 이름 따온거 맞음 ㅎ)'의 격변화를 보면,

단수

주격 : equus

속격 : equi

여격 : equo

대격 : equum

탈격 : equo

복수

주격 : equi

속격 : equorum

여격 : equis

대격 : equos

탈격 : equis

역시 위의 aqua랑 다르게 변화 형태가 조금 다른 걸 알 수 있어. 위에서 말한 aqua는 1변화 명사고, equus는 2변화 명사라고 하는데, 라틴어 명사에는 총 5가지 변화 분류의 명사가 존재해. 귀찮아서 여기서 변화형은 다 안 쓰지만 각 변화형별로 '대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어. 자세한 변화형은 조금만 찾아보면 쏟아져나오니 그 쪽을 참고하길 바래.

1변화 : 단수 주격이 -a로 끝나는 명사. 여성형 명사가 많음

2변화 : 단수 주격이 -us로 끝나는 명사. 남성형 명사가 많음

3변화 : 단수 주격이 -is, 혹은 그 외의 자음으로 끝나는 명사들

4변화 : 단수 주격이 -us, -u로 끝나는 명사

5변화 : 단수 주격이 -es로 끝나는 명사

당연히 이건 어디까지나 경향성이기 때문에, 예외도 엄청 많아서 꼭 이렇다는 건 아냐. 그래도 라틴어를 공부하다 보면 대충 이 명사가 무슨 변화형인지는 감으로 때려맞출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변화형을 외우면서 열심히 텍스트를 접해보라는 말밖에 못 해주겠다.

그 다음으로 얘기할 것은 명사/형용사의 '성(Gender)'인데, 라틴어에 존재하는 모든 명사는 남성, 여성, 중성 셋 중 하나의 성을 가져. 프랑스어, 독일어같은 다른 유럽권 언어를 공부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부분일텐데, 그래도 짤막하게 설명하면, 명사의 성은 그 명사가 진짜 어떤 성별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서 정해지기도 하지만 예외가 워낙 많아서 그냥 '명사를 분류하는 하나의 카테고리' 정도로 이해하는 게 편할듯. 명사의 어미를 보면 '대충' 이 명사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중성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간략하게 규칙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아.

남성형 명사 : 남성 인명, 단수 주격이 -us로 끝나는 단어 등

여성형 명사 : 여성 인명, 단수 주격이 -a로 끝나는 단어 등

중성형 명사 : 단수 주격이 -um으로 끝나는 단어 등

물론 이것도 예외가 넘쳐나. 예를 들어서 '선원'을 뜻하는 'nauta'는 -a로 끝나고 변화형도 1변화형을 따르는데 정작 성은 남성형이야. 이런 예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이것도 그냥 경향성 정도로 받아들여줬으면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애매한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는 거야. 라틴어 사전 찾는 법만 알면 이 명사의 성이 뭔지, 몇변화형인지 정확히 나와있기 때문이지.

일단 이 '격'이라는 개념과 '성'이라는 개념만 이해하면 대명사가 됐건 관계대명사가 됐건 인칭대명사가 됐건 '명사'라는 이름이 붙은 단어들의 변화형은 그 변화형을 외우는 게 문제이다 뿐이지 변화표를 보면 대충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거야. 이제 나머지는 나올 때마다 외우는 거 뿐이지.

그 다음으로 얘기하고 싶은 건 형용사인데, 형용사라는 건 기본적으로 명사를 수식해서 명사의 내용을 한정시키거나 보충하는 단어지. 예를 들면, 'The good boy'에서 good 같은 거. 라틴어에서도 비슷하긴 한데, 영어랑 비교해서 가장 주의할 점은 라틴어의 형용사는 수식하는 명사의 수, 격변화, 성을 따라간다는 거야. 이것도 아마 프랑스어나 독일어 같은 언어를 공부해본 적이 있다면 쉽게 받아들일건데, '좋다'라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인 'bonus(그 보너스가 여기서 나온 단어 맞음 ㅎ)'를 예로 들면, aqua를 수식할 때는

단수 

주격 : aqua bona

속격 : aquae bonae

여격 : aquae bonae

대격 : aquam bonam

탈격 : aqua bona

복수

주격 : aquae bonae

속격 : aquarum bonarum

여격 : aquis bonis

대격 : aquas bonas

탈격 : aquis bonis

그리고 equus를 수식할 경우는

단수

주격 : equus bonus

속격 : equi boni

여격 : equo bono

대격 : equum bonum

탈격 : equo bono

복수

주격 : equi boni

속격 : equorum bonorum

여격 : equis bonis

대격 : equos bonos

탈격 : equis bonis

이런 식으로 형용사도 수식하는 명사에 따라 수, 격, 성이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걸 알 수 있어.

혹시나 착각할까봐 첨언해두는데, '아 그럼 형용사 뒤의 글자랑 수식받는 명사 뒤의 글자만 완전히 똑같이 쓰면 되는구나!' 하고 이해하지 말것. 여기서는 간단한 단어들을 예로 들어서 그렇지 어디까지나 수식받는 명사의 수, 격, 성을 일치시키는 거지, 나중에 변화형이 수식받는 명사와 다르거나 좀 특히한 변화를 하는 형용사 같은 경우는 얼마든지 수식받는 명사와 어미 모양이 달라질 수 있어. 아니, 오히려 이런 경우가 더 흔하지.

또 하나 주목해야 될 점은, 영어같은 경우는 일부 특수한 예가 아닌 이상 보통은 형용사는 수식하는 명사 앞에 딱 붙어있고, 프랑스어 같은 경우는 수식하는 명사 뒤에 딱 붙어 있는데, 라틴어같은 경우는 앞에 붙건 뒤에 붙건 별로 제약이 없는 편이야. 수식하는 명사와 수, 격, 성이 전부 일치하기 때문에 굳이 이런 식으로 형식적인 문법형태를 안 취해도 그 형용사가 어떤 명사를 수식하고 있는지 자명한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그래서 형용사를 명사 앞에 붙이던지, 뒤에 붙이던지, 심지어 라틴어 시문학같은 데에서는 엄격한 운율법을 맞추기 위해서 형용사와 명사를 떼어놓은 다음에 거기다 동사를 끼워넣는 식의 변태적인 경우마저도 꽤 자주 보여.

여기서 우리가 격변화를 완벽히 외우고 숙지해야 될 이유가 나오는데, 명사, 형용사의 격변화가 엄청나게 많은 문법 정보를 품고 있기 때문에, 라틴어의 어순은 엄청나게 자유로운 편이야. 문장 내에서 단어 순서를 막 섞어놔도 격 변화만 잘 이해하고 있으면 해석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거든. 영어같은 경우는 역으로 이런 명사, 형용사의 격변화가 많이 퇴화한 편이라(실제로 중세 영어까지는 영어도 이런 머리아픈 격변화가 존재했음) 우리도 잘 아는 SVO라는 구조적인 틀을 만들어서 의미를 한정하고 있지. 영어에서는 S 자리에 오는 명사랑 O 자리에 오는 명사의 위치를 바꾸면 뜻이 완전히 달라지지만, 라틴어같은 경우는 각 명사의 격변화만 제대로 써서 의미만 명확하게 해준다면 SVO든, SOV든, OSV든, OVS든 전부 똑같은 의미야.

현대 언어 중에서 격변화가 굉장히 잘 남아있고 이런 식의 도치가 비교적 자유로운 언어 중 하나가 바로 러시아어인데, 흔히 인터넷에서 문장의 주어랑 목적어를 바꿔놓고 '러시아에서는 ~가 ~합니다!' 하는 식으로 개그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런 '격'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