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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강의 받아쓰기 본

ㅇㅇ(222.119) 2016.05.25 23:48:52
조회 35559 추천 381 댓글 93
														

 더 많이 다듬고 싶었는데 도중에 포기했다. 웬만큼은 놔두는 게 갤주 특유의 말버릇이 살아서 음성지원될 거야. 

 문장 조금씩 다듬고 내용도 약간씩이지만 편집한 거임 외부로 퍼갈 땐 출처 밝혀줘





  조선대 특강 받아쓰기본(몰락의 에티카 저자가 하현우를 강의에 초청함)

 


  안녕하세요 국텐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하현우라고 합니다.

 


  제가 원래 말하다보면 길을 잘 잃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정리를 해왔어요. 이것보세요(수첩 보여주며) 제가 말을 못하는 성격은 아닌데요, 여러분들 앞에서 음악이 아닌 말로써 제 인생에 대해 얘기하는 게 익숙지 않아요. 쑥스럽고 낯설고 긴장되고 무섭기도 한데 용기 내어서 왔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몰락의 에티카’라는 평론 책을 우연히 읽게 됐는데 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 입으로 감히 예술가라고 얘기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제가 예술가로서 추구해야 할 것들을 많이 제시해주셨어요. 2집에 깃털이란 노래가 있는데요, 책 앞에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쟁취한 다음에 숭고하게 몰락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라는 부분을 읽고 너무 감동받아서 쓴 곡이 깃털이에요. 저에게 영향을 미친 분께 연락이 왔는데 거절하면 안되겠다 생각했어요. 나에게도 경험이 되고 영광이겠다 싶었어요.

 


  저는 국텐 밴드에서 기타, 보컬, 작곡과 인터뷰를 맡고 있어요. 인터뷰는 다른 멤버들에게 시키면 안돼요. 제가 여기까지 국텐 밴드를 하기 전에 우여곡절이 심했어요.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음악이란 것을 가지고 걸어왔는지 말씀드리려 해요.

 


  저는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고요, 7살쯤 안산으로 왔어요. 안산에서 초중고를 다 다녔는데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초등1학년 때 꿈이 많았어요. 제가 워낙 하고 싶은 게 많거든요. 그 중에 가장 끝까지 할 수 있고 오래 에너지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게 음악이었어요.

 


  제 음악이 사실 어려워요. 불편한 요소들도 있고. 제가 지금 보면 살짝 잘 생겨 보일 수 있어요. 하얗고 동안이고. 하지만 사춘기 때는 이 모습이 아니었거든요. 지금은 나이 들어서 정리가 된 거예요. 어릴 적엔 결핍이라는 게 강했어요. 저는 사춘기를 굉장히 격정적으로 보냈어요. 초라함. 무력감. 패배감. 제가 늘 불량품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몸도 약했고 공부도 잘 못했고 키가 크거나 힘이 센 것도 아니었고... 굉장히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중학교 때 절정이었죠. 친구도 없었고. 구석에서 만화 그리는 제 모습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굉장히 소심했었고. 가족과 대화도 많지 않아서 제 안에 갇혀서 지냈어요.

 


  고2때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인천 남자랑 바람이 났어요. 순간 생각을 했죠. 왜 나는 다른 남자에게 여자를 뺏긴 걸까. 제 인생 최초의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잘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더니 하나도 없었어요. 매력적인 건 발목밖에 없었어요. 얼마나 슬픈지 아세요? 귀도 작고 눈썹도 없고 손목도 얇고. 너무 별로였어요. 전 제가 싫었어요. 타고난 건데... 이대로 현실에 무릎을 꿇을 것인가 아니면 내 자신을 튜닝을 해서 내 삶을 개선시킬까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미술 학원을 보내주셨어요. 어느날 미술학원 선생님이 ‘넌 남자가 제일 멋있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나처럼 한가지 일에 몰입하고 있을때 남자는 제일 멋있는 거야.’라고 하시는데 정말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뭔가에 몰입해야지 했죠. 그런데 그림은 여자들에게 못 보여 주잖아요. 그럴 수 있는 건 노래더라고요.

 


  원래는 노래방 가는 걸 싫어했어요. 고1때 노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하기 싫어서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 첫소절을 정말로 흥얼거리기만 하다가 그냥 나와 버렸어요. 그 정도로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싫어했어요.

그런데 여자에게 받은 상처와 자신을 갱신해야겠다며 일주일에 네 번 정도 노래방을 가서 피를 토할 정도로 노래했어요. 소리 지르면서 노래 부르니까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했어요. 사람들도 남자여자 할 것 없이 저를 멋있게 보는 거예요. 학교 축제 때 난리가 났었어요. 그때 멋에 취해 있어서 일부러 넥타이 풀고 슬리퍼 끌고 올라가서 쉬즈곤을 불렀어요. 그 때 처음 환호성을 받으면서 '역시 사람은 미친 듯이 뭔가 하나를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 거구나'를 깨달았어요.

하지만 부모님들이 으레 그렇듯이 대학을 가야한다고 생각하셨고 음악은 반대가 심하셨어요. 어머니 꿈이 원래 화가였어서 미술 쪽으로 가는 건 긍정적이셨어요.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결국 그림으로 대학을 갔죠. 한동안 노래는 접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1학년 초에 대학교 앞을 걸어가는데 거지 같이 생긴 사람이 말을 거는 거예요. 저는 그때 녹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너바나 티를 입고 녹색 바지에 녹색 신발에, 이상하게 하고 다녔어요. 그 사람이 ‘혹시 음악 좋아하세요? 노래 부를 줄 아세요? 스쿨 밴드하는데 펑크 음악인데 노래 잘 못 불러도 된다’고 해서 밴드 오디션을 봤는데 의외로 잘 불렀던 거죠. 소리만 지를 줄 알았는데 제 노래를 듣고는 저에 대한 욕심이 생겼겠죠? 그때부터 공연을 미친 듯이 했어요.

 


  선배가 계속 얼차례를 주고 술을 먹였어요. 나는 진짜 음악을 하고 싶은데... 고교 미술부 써클할 때도 많이 맞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 선후배 관계가 싫었어요. ‘나와서 진짜 음악 한번 해볼까?’하며 드러머랑 놀이터에서 컵라면과 소주를 먹으면서 고민했어요. 드러머에겐 제가 믿음직했었겠죠. 걔는 드럼 자체가 아니라 무대 위에 뭔가를 하는 게 좋아서 밴드를 하는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드럼을 치다가 자기 흥에 못 이기면 드럼 뽑아서 쟁반 춤추고. 걔한텐 음악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만약 학교 관두면 나도 너 따라서 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하더라고요.

 


  20살 때는 아무것도 모를 때잖아요. 물론 여기 계신 20살은 나름 세계관이 있으시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그 때가 귀엽게 느껴져요. 20살 때 가지고 있던 나만의 세계, 내가 가늠하고 있는 정도의 영역, 사회생활도 몰랐을 때였는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휩쓸고 지났었고, 사춘기 때의 패배감, 무력감, 두려움이 더해져서 결국 저는 자퇴를 하고 나왔어요. 휴학을 했어도 됐었는데 일부러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고 멍청해서 그런 결단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멍청한 게 참 무서운 게, 멍청해서 과감할 수 있었어요. 1년 만에 학교를 관두고 어머니에게 알렸을 때 어머니가 실망을 많이 했죠. 제가 부모였어도 걱정이 심했을 거예요. 이해해요. 쫓겨나다시피 해서 한동안 집에 못 들어가고 친구 집에서 자기 시작했어요.

 


  그 기간이 길어지니까 친구들도 귀찮아서 점점 연락을 안 받고 문도 안 열어 주더라고요. 그때부터 막 살기 시작했어요. 20살의 나이로서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게 됐죠. 드러머는 되게 더러워요. 처음 만났을 때도 아이스크림 먹다 얼굴에 묻히고 흰 티도 누래졌고 슬리퍼에... 그런데도 그 친구랑 껴안고 추운 겨울을 났어요. 한 달 반 동안 씻지도 못해서 목욕도 해야 하니까 짜장면 알바나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죠. 그렇게 20대 초반을 거의 건설현장에서 보냈어요. 심지어 안산 YMCA건물을 제가 만들었어요.

 


  그때 제가 느낀 건, 제가 저에게 내리는 형벌 같은 느낌이었어요. 내가 결정한 일이나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노동의 힘듦과 추위, 불안함 속에서도 조금은 쾌락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뭔가 시원하게 한 대 맞는 것처럼 내가 나 자신에게 채찍질 하는 느낌이랄까. 제가 되게 게으르고 능동적이지 못해서, 제 스스로 절벽 위에 모는 경험도 필요했던 것 같아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어린 나이에 잘 선택했던 거죠. 더 이상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고도 음악을 할 수 있는 삶을 상상만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해요. 이렇게 된 건 무모하고 멍청했던 스무살의 하현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무모하고 가치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보면 그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방황을 하다 드디어 서울을 오게 됐어요. 밴드 동아리에는 편지 한 장 남겼어요. ‘진짜 음악을 하기 위해 떠납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도망치듯 떠났어요. 드럼과 보컬 밖에 없으니 기타가 필요해서 멤버를 찾았죠. 인터넷에서 모집했는데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 죽이는 음악을 할 큰 포부를 가진 뮤지션은 와라’고. 그때 만난 사람이 지금 기타 치는 전규호씨예요. 고속도로 터널 뚫고 받은 돈으로 기타를 사서 상경했던 형인데, 처음 만나서 합주했는데 아무것도 안됐죠. 전 C코드도 몰랐으니까. 그 형이 충격을 받고 가려던 걸 억지로 붙잡았아요. 형이 기타를 치는데 손이 안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든 잡아야겠다 싶어서 같이 합숙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유명한 곡을 카피했어요. 하드코어, 랩, 발라드, 서태지 등 여러 음악을 접해보고, 홍대에서 다른 뮤지션들 보며 우리도 클럽에서 공연하고 싶다 얘기하면서요. 밴드 이름이 뉴언발란스였는데, 그때 뉴발란스 신발을 좋아했는데, 그걸 뉴언발란스라고 얘기하고 다녀서 장난으로 지은 거예요. 무대 위에 서고 노래 부르는 거 자체가 좋았던 때였어요.

 


  그러다 1-2년이 지나면서 점점 재미로만 끝나기엔 현실의 무게가 다가왔어요. 음악적으로 성숙한 것도 아니고 고민도 없이 즐거움, 유희만으로 밴드를 하기에는 지쳤어요. 너무 일을 많이 했거든요. 20대 때 경험도 중요하지만 20-21살을 먹은 하현우가 그걸 감당하기엔 힘들어서 정신적으로 지쳤어요. 결국 밴드를 없애고 멤버를 교체하고 더컴이라는 밴드를 다시 만들었어요. 더 컴퍼스 오브 뮤직, 음악의 나침반이 되자는 뜻인데 멋있는 말 같아서 지었어요. 이제는 밴드를 좀더 체계적으로 하고 싶었어요. 막연히 재미가 아니라 음악적으로 고민을 해보자 해서 자작곡을 만들었어요.

 


  내가 경험한 건 방황하고 놀고 즐긴 것뿐이었는데 가사를 쓰려니 난관에 부딪혔어요. 처음으로 진지하게 음악을 대하기 시작했죠. 사춘기 때는 ‘나는 왜 이럴까, 왜 태어났을까’ 생각했다면, 가사를 쓰면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세상에 대해 쓰기에는 세상을 잘 몰라서 안 될 것 같고, 내가 가장 잘 알고 경험한 건 내 자신이니까 내 자신만큼 좋은 소스는 없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막상 쓰려니까 정작 내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하현우란 사람이 누구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생각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더라고요. 늘 내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내 친구를 아는 것보다 내 자신을 아는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심적으로 방황하고 도움을 요청할 데가 필요했는데, 주변에는 기타 치는 전규호와 뇌가 없는 드러머 이정길밖에 없어서 물어볼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때 처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나에게 책이란, 어려운 말이 적힌 종이에 불과했어요. 글이란 게,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이 해주고 싶은 최고의 얘기를 오랜 기간 정리해서 중요한 말을 추려서 쓴 거잖아요.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작가와 대화하며 조언을 얻을 수 있겠다 싶어 책을 읽었죠. 사실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았어요. 단어도 어려웠고요. 내면이 뭔지 자아가 뭔지 다 미지의 세계였어요. 나도, 책도. 그렇게 20대 초반을 다보내고 군대를 가게 됐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제 20대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힘들기만 하고. 뭔가 열심히 땀도 흘리고 뭔가를 찾고 하고 있긴 한데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 무기력함이 저를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무기력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좀 더 과감하게 던지고 실패라도 했으면 실패의 흔적이라도 남았을 텐데. 도전도 제대로 못해보고. 그저 어설프게 유령처럼 그 시간을 보냈어요. 그 젊은 나이 때에 말이에요.

 


  그리고 군대를 가게 됐어요. 22살 때 음악학원 차량 운전 기사를 한 경험으로 운전병이 됐어요. 운전병이 됐는데 길치여서 어리바리하다고 많이 혼났어요. 소리 하난 잘 지르니까 축구할 때 응원을 시키기도 했어요. 기타 치다 걸려서 노래나 무대에 나가는 게 금지되어서 기타에 대한 욕망을 다른 쪽으로 돌렸어요. 글을 쓰는 걸로요. 군대 2년 동안 평생 읽어야 할 것들을 다 읽은 것 같아요. 거기에 있던 책은 다 읽었는데, 심지어 동의보감도 읽었어요. 정리도 안 되고 다듬어지지도 않았지만 그저 글을 썼어요. 그러다 상병 쯤 가을에 바람이 부는 연병장에서 수첩에 글을 쓰고 있었어요. (시인이 꿈이기도 해서 시 쓰는 거 좋아했었거든요) 그때 바람이 싹 지나가는데 순간 바람이 저에게 말을 걸더라고요.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시고요. 뭔 헛소리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의 진실된 경험이에요. 이런 얘기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잘 안하긴 하는데...) 그때 바람이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얘기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때 거기에 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때 처음 알게 됐어요. 모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로써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걸.

 


  저희 국텐의 2집 제목이 프레임인데 하나의 틀을 말해요. 저는 이 틀을 하나의 시선이나 관심으로 봤어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늘 가까이 있고 보고 있지만 놓치는 것들, 그런 것에 시선을 돌려 관심을 가져 보면, 죽어있던 것들이 생명력을 얻어서 살아서 나에게 얘기를 한다.’라는 뜻에서 지은 제목인데, 저는 그 첫 경험을 군대 연병장에서 바람에 의해 했어요.

그 전에는 글을 쓸 때 내 안에서 뭔가 끄집어내려 했는데, 그때 사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험한 후에는, 사물과 나를 바꿔보기도 하고 비교해보기도 하고 변신해보기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제 생각이나 정체성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흥분되어서 더 미친 듯이 글을 썼어요.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게 단 한 번도 없어요. 노래 만드는 것도 배운 적이 없어서 곡을 만들 때 시간이 오래 걸려요. 기본 3일 이상이에요. 기본이 안 되어 있어서 짧은 가사 하나 쓰는데 A4 4-5장을 써서 추리고 추려서 써요. 사람들이 봤을 때 '이게 뭔 소리야, 허세병 걸린 애처럼 이상하게 쓴다'고 하면 허무해요. 난 치열하게 썼는데... 그 사람들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완성된 상태에서 내 음악을 표현하고 만든 건 아니니까. 음악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그걸 내보이면서 또 성숙해가는 하나의 과정인 것 같아요. 그 과정을 지켜봐주시면서 변화하는 것들을 함께 느끼는 것, 그게 예술이고 멋있는 거라 생각해요.

 


  전역 후 도자기를 배웠는데 전규호 형이 마지막으로 음악을 해보자 해서 강원도로 갔어요. 거기서 1년 반 동안 곡을 미친 듯이 만들었어요. 공연도 하면서요.

곡을 만들면서, 체계적으로 표현하고 진행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어서 많이 방황하고 어설펐어요. 국텐 음악을 처음 만들 때 이것만은 지키자고 했던 약속이 있었어요. ‘노래가 사회적이지 않게 하자. 자아를 탐험하는 듯한 주제로, 음악적으로 우리의 세계, 정체성, 확고한 영역을 만들자.’라고. 사회적이지 않다는 것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야기(그것이 착각일지라도),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서 울타리 바깥에서 생성해야만 건강한 예술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한 선택이었어요. ‘도덕’이 뭔지 네이버에서 찾아봤는데요, ‘사회 구성원들이 양심이나 사회적 여론, 관습에 맞춰 지켜야할 규범의 총체’라고 나오네요. 관습이 사회적인 틀 안에서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지만, 예술에서는 사회적인 것을 닮아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국텐 음악 안에서 밴드의 방향성에 대해서 그렇게 정했어요.

그래서 어려웠어요. 차라리 사랑이나 주변 사건을 선택했다면 소재도 많고 공감대도 더 형성하기 쉬울 텐데 말이에요. 저는 국텐 팀을 제 마지막 밴드라고 생각했어요. 이게 안 됐으면 지금 도자기 만들고 있었을 거예요. 매력적이어서 한참 배우다 왔거든요. 아무튼 밤에는 실내포차에서 일하고 낮에는 민박집에서 노래 만들면서 데모가 나왔어요.

이때 음악은 나가수 때 했던 음악과 성격이 달라요. 나가수는 화장을 진하게 해서 예쁜 얼굴이라면 국텐 노래는 쌩얼이라서 괴상망측한 노래가 많아요. 가사도 그렇고. 내안을 탐험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죠.

 


  음원을 냈을 때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제가 봐도 괴상망측하고 희한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내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내가 노래처럼 이런 사람이구나.’같은 것이었어요. 내 자신을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자신을 파헤쳐도 잘 몰랐었는데, 나중에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을 보니 내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가 만든 음악에서 그것을 알아갔던 것 같아요.

그 음악에서 나온 불안함과 괴상망측함, 대충 보면 뭔지는 알겠는데 정작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함, 그 불길한 요소, 이것들이 국카스텐 음악에서 최고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분들한테 대중적으로 공감을 얻기 애매하거나 힘들 수 있는 요소들도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시다피시, 제가 목소리가 굉장히 시원하고 깨끗하고 맑고, 노래 부르다보면 매력적인 부분도 살짝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사실 대중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곳에서 국카스텐 음악을 할 거라고 걱정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또 가까이 다가가려 하다가도 여기 불안한 요소들 때문에 관객들이 어려워 하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도 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 불안한 요소들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여러분들 큐비즘이라는 미술 장르를 아세요? 피카소의 미술 장르를 입체파, 큐비즘이라고 얘기해요. 큐비즘이라는 게 뭐냐면 ‘공공연한 인식론, 즉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탐구에 관계한다. 관람자들의 기대를 좌절시키거나 어리둥절하게 만든다는 것.’인데요, 우리의 음악이랑 닮아있다는 게 이런 점 같아요. 우리가 보통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탐구해보고, 때론 관람자들의 기대를 좌절시키기도 하는데, 나쁘게 좌절시키기 보다는 뭔가 어리둥절하게 만듦으로써 낯선 충격을 주는 방식이에요. 예를 들어서 제가 앞을 못 보는 장님인데 평생 앞을 못 보다가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눈을 딱 떴다고 쳐요. 눈을 딱 떴을 때 보인 장미가 아름다운 것이고 하늘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바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낯섦의 충격이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늘 보이는 틀 안에서 봐오던 시선들의 물체들이 있잖아요. 사람, 사상,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것도 그렇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낯설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오는 충격, 그래서 이것들을 다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추구를 저는 음악 안에서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추구를 하다 보니까 30대가 됐어요. 그래서 이제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우리 국카스텐만의 견고한 음악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것이 비록 약간은 어색하고 틈이 보이고 어설프고 아직 덜 익은 과일처럼 그게 완벽하진 않더라도 우리만의 영역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 뿌듯함과 당당함이 있었죠.

 


  그래서 그 전에는 음악적으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어요. (물론 지금도 돈을 많이 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 상황에서 저는 행복하고 당당했었어요. 왜냐면 나만의 세계, 나만의 언어로써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이 있었기 때문에요.

 


  그러다 저희가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을 나가게 됐어요.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은 저희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한번 재건하게끔 채직찔을 했던 방송이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국카스텐이라는 밴드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보컬,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어떻게 이런 노래들을 대하고 해석해야할지 고민하면서요. 왜냐면 국카스텐의 음악은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었던 노래를 다시 부르고 재해석하면서부터, 보컬리스트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또 사람들 앞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음악적으로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전 국민들에게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거든요. 15번 정도 나간 것 같은데, ‘국민들 앞에서 망신만 안당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편곡하고 연주하고 정말 애 많이 썼어요. 그런데 다행히 방송 후 많은 분들이 저희를 좋아해주셔서 저한텐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죠. 사실 평소에 저희가 무대에 올라가던 긴장감과는 다른 긴장감이 느껴지는 무대였어요. 그래서 그 경험이 저희에게 굉장히 많이 도움이 됐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나날들을 보내다가 저희가 전 기획사와 소송을 하게 됐어요. 작업실, 합주실이 없어지고 다시 안산으로 와서 자그마한 옥탑방 하나를 얻었어요. 소송 중에 굳이 억지로 무리해서 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활동도 접었어요. 우리가 10년 넘게 같이 해오면서 우리 자신과 음악에 대해서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좀 갖는 것이 좋겠다 여겨서 1년 반 동안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저는 다시 저만의 세계를 옥탑방에서 갖게 되었는데요. 1년 반 동안 하루 평균 11시간동안 곡 작업을 했었어요. 그때 노래를 진짜 미친 듯이 많이 만들었었어요. 내 안에 나만이 가지고 있었던 나만의 메커니즘, 음악을 만들고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들, 이런 것들을 다 부쉈어요. 다시 새로운 저만의 방식과 호흡, 표현으로 1년 반 동안 2집과 2집 외의 노래들을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소송을 했던 시간이 저희한테는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돼요. 저는 항상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만 뭔가가 되나 봐요. 학생 때처럼 자퇴를 한번 해야 뭐가 되는 것이고, 강원도에 가서 이상하게 음악을 해야 뭐가 되는 것이고, 군대 가서 책을 읽어야 뭐가 되는 것이고...이런 식으로 저는 항상 뭐가 있어야만 되는 것 같아요.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이야기도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그 다음 이야기가 전개가 되고 갈등이 생기고 거기서 해결 방안도 생기고 거기서 또 변화가 생기니까요. 그러면서 저에게 일어난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서 하나의 생산적인 것들로 돌리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그래서 그 시간이 도움이 많이 됐었어요.

그 때 저의 삶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바뀌었던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내가 그냥 좋아하는 것만 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나만 바라보고 나만 집중하자며 열심히 해왔었는데, 그 소송 당시 팬 분들이 좌절하지 말라고 응원들을 많이 해주셨어요. 몸에 좋은 것도 많이 보내주시고 편지도 많이 써주시고... 그래서 그 때 제가 개인적으로 느낀 게 많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책 ‘오자이르’(파울로 코엘료)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어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나는 전부를 얻었다.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찾았다. 모욕당했지만 꿋꿋이 내 길을 나아갈 때 나는 내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저는 이 글에 굉장히 공감을 많이 해요. 그래서 나온 노래가 오이디푸스였어요. 오이디푸스 아시죠? 그리스 신화. 저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제 35년 인생을 살면서 느꼈던 운명과 그것을 개척해나가는 의지를 노래를 통해서 썼어요.

 


  그렇게 해서 그 힘든 시간이 지나고 2집이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앨범이 됐는데요. 1집에서는 아프면 아프다고 썼어요. 예를 들어 미로에 괴물이 있다면 전 괴물이 있다고 썼고,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다고 썼어요. 어떤 증상 자체에 대한 호소를 했던 것이 국카스텐 1집이었어요. 마치 저의 사춘기를 보는 것처럼...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그런 것들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느꼈던 불안감 같은 요소들을 그대로 묘사를 하는 게 첫 목표였고, 그러기 위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했어요. 제가 음악을 배운 적이 없어서 노래를 만들 줄 몰라서 화성이나 흐름도 몰라서 그냥 이미지를 먼저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가 걸어가요. 자기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 탁타닥탁타닥, 따다다단따다단따다단따다 이 템포로 이 노래가 만들어진 거예요.

파우스트란 노래는 파우스트란 책을 읽고 썼던 곡인데,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는 가사가 있어요. 정말로 방아쇠를 당길 때 탕탕탕 총으로 쏠 때의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음악에 팡팡팡 둥둥둥 하는 느낌, 이런 식으로 화성, 흐름보다는 이미지를 생각하며 만드니 노래가 특색있게 재미있게 괜찮게 나오더라고요. 국카스텐의 음악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그런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음악을 하고 있는데요, 내가 왜, 무엇을 위해서 음악을 하고 있는가 하는 고민들을 굉장히 많이 해요.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내가 이걸 왜 이렇게 하고 있지?’하는 고민들을 하는 편인데. 내가 도자기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사무직도 아니고 음악을,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릴 때 제 자신을 불량품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태어나면 안 됐던. 약간 실패작 같은 것...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다가 음악을 만나면서 제가 타고난 것들 이외에 다른 후천적인 요소들로 내 자신의 빈 곳을 메꿀 수 있고 채워갈 수 있고,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써 내 인생을 완성시켜 나갈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저는 이 음악을 통해 발견을 했고요. 물론 이 음악에서만 그런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니죠. 소설 같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런 행위는 가능하고요, 운동선수도 운동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행위든 자기의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서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음악이 저 스스로에게 무기를 준 것 같아요. 녹슨 칼처럼 제 기능을 못할지언정 칼이라는 기능성은 가지고 있어서 뭔가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담대함이나 용기 정도는 이것을 통해서 얻지 않았나 생각해요. 2집을 만들면서 느꼈던 것은, 불유여력(不遺餘力)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어요. 불유여력(不遺餘力)이란 ‘있는 힘을 남기지 않고 다 쓰다’라는 뜻이에요. 어떤 책에 보면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는데 어릴 때 지랄할 수 있는 총량을 다 쓰면 커서는 안 쓴다는 거죠. (‘지랄’ 때문에 사람들이 웃자)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책에 나와 있던 말이에요. 음악을 통해 제가 살아가고 호흡하고 해석하고 대화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이 행위로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음악에 쏟아 부었을 때 가벼워진 내 몸을 보면서 적어도 제 삶을 돌아봤을 때 후회는 남지 않을 것 같아요. 저에게 음악은, 제 남아있는 에너지를 집중하고 제 얘기를 다 쏟아 부을 수 있는 좋은 도구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음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음악을 통해 깨어날 수 있다는 것, 나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내 스스로가 추구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사회에 낫띵(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만연하게 우리 주변에 있는 것 같아요. 사건사고가 터질 때 사람들의 반응이 녹슬고 무뎌진 것 같은데, 어떤 가치를 두고 깨어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음악이나 예술에서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어떤 감정만 가지고 그것이 도식화되어서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어요. 스쳐지나가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아름다움이 과잉되어 널려있지 않나 싶어요. 자기 자신의 해석으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할 얘기도 많고 많이 준비했지만 시간이 다 된 것 같네요. 제가 이 자리에서 제 삶을 통해 얘기 하고 싶었던 것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깨어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살아있는 것과 그저 살아가는 것은 다른 것처럼, 그저 눈 뜨고 숨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자기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개척해나갈 필요가 있어요. 특히 20대는 조그마한 의지, 관심과 자기를 향한 시선만으로도 자기의 삶을 멀리 바꿀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한번 살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다시 갱신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삶을 받아들이면, 좀 더 후회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죽을 때에도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상 국카스텐의 하현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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