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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청동기시대 점토대토기 문화 단절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논문 소개

ㅇㅇ(121.146) 2023.11.03 02:25:12
조회 407 추천 15 댓글 4
														

인터넷에서보면 청동기시대 후기-초기 철기시대 사이, 송국리문화가 크게 쇠퇴한 틈을 타서 요녕성 일대의 '점토대토기문화'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왔고, 이들이 직접적인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식의 '점토대토기문화 단절론'이 아무런 비판없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음.


물론 한 때는 이와 같은 주장이 한국의 고고학계에서도 통설의 위치를 차지한 바도 있었고, 또 역사비교언어학의 '반도 일본어설'도 부분적으로는 이와 같은 학설에 근거를 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에 관한 근래의 고고학계의 경향은 과거 점토대토기가 이와 같은 사회 변화의 단절론적인 획기였다는 주장은 상당히 많이 수정되고 후퇴한 측면이 강함.




내가 여기서 소개할 송만영의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은 바로 이러한 점토대토기문화 단절론에 대한 비판을 가장 깔끔하게 잘 정리한 논문인데



본고에서의 송만영의 주장은 사실 흔히 말하는 점토대토기문화의 대규모 이주로 기존의 청동기사회 주민들을 대체했다는 주민교체설 뿐만 아니라, 점토대토기-세형동검 등의 편년자료가 재정립된 뒤 이같은 주장에서 크게 후퇴한 점토대토기 문화권 주민 주도의 기존 청동기사회 재편론에조차도 부정적이면서, 점토대토기문화의 유입 자체가 재래의 청동기사회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보는, 어떻게 보면 점토대토기문화 단절론에 있어서 가장 극단적인 반대 입장이라 할 수 있음.



먼저 종래의 점토대토기 사회 단절론의 경우에는


한반도 남부에서의 갑작스러운 점토대토기의 등장, 고지성 취락의 형성, 송국리형 대형 취락의 쇠퇴, 세형동검의 등장이 모두 대략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무렵에 동시에 나타난 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으며, 따라서 이 무렵에 있어서 종래의 청동기 문화가 단절되고, 요녕성 일대에서 유입된 주민들이 점토대토기문화의를 기반으로 한 초기철기문화를 개막했다는 주장을 얼개로 하고 있었음.


일단 점토대토기는 이전의 송국리식 토기 등 재래의 토기와 별다른 직접적인 형식학적 연관이 없었고, 이러한 다양한 고고학적 흔적들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는 단순한 전파나 교류의 산물로 보기는 어렵고, 주민들의 직접적인 이주 이외에는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당연히 이러한 흔적은 외부 주민들의 직접적인 이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또한 이러한 점토대토기문화가 종래의 청동기문화를 마치 대체하는 듯한 모양새였기 때문에, 자뭇 극단적으로는 이들 외부의 유이민들이 종래의 주민들을 축출하거나 제거했다는 주민교체설의 형태를 띠기도 했음.


박순발 선생은 특히 이 때, 이러한 한반도 남부의 고고학적 변화를 연나라 진개가 전기 고조선을 쳐서 멸망시킨 사건과 연결지어서, 이 때 침공을 당해 쫓겨난 고조선 계통 주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 이들에 의해 원형점토대토기문화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면서(박순발, 우리나라 초기철기문화의 전개과정에 대한 약간의 고찰, 1993) 이런 입장은 더욱 공고화되는 것처럼 보였고, 이보다 훨씬 앞서 한반도 세형동검문화의 개시 연대를 마찬가지로 연나라 진개의 고조선 침공 기사와 연계해 보는 입장(윤무병, 한국 청동단검의 형식분류, 1966)이 통설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점토대토기=세형동검=연나라 진개 침공=기원전 3세기라는 도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임.


결국 이에 따라 흔히 인터넷 상에서 접할 수 있는,

'고조선이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쇠락할 무렵, 요양일대 고조선 주민들이 한반도 서해안으로 이주하여 점토대토기 및 세형동검을 표지로 하는 초기철기문화를 이룩했다' 라는 논리가 완성된 것이지.

(+ 반도 일본어설도 바로 이러한 고전적에 통설에 근거하여, 한반도 남부 주민들의 인적 구성이 크게 변화했다는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음)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부터 차츰 이러한 통설은 도전받기 시작했는데, 정밀한 연대편년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차츰 세형동검문화의 개시연대와 점토대토기의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임(이청규, 요녕 본계현 상보촌 출토 동검과 토기에 대하여, 2000) 이후에도 방사성탄소연대측정 연구 등에서 차츰 원형점토대토기의 상한연대가 계속해서 올라가서, 결국 기원전 4세기 진개의 동정을 역사적 획기로보는 문헌중심적 입장에서 탈피, 원형점토대토기의 연대상한은 기원전 6-5세기로, 세형동검문화의 상한연대는 기원전 5세기로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이 됨.


이창희 선생은 또 진개동정, 세형동검의 출현, 점토대토기 문화의 출현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라 볼만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삼각형 점토대토기문화의 연대를 억지로 위만조선의 등장에서 찾는 종래의 연대관조차 비판하면서, 자체의 형식분류 및 탄소연대측정방법을 통한 각 유물의 독자적인 편년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함.(이창희, 점토대토기의 실연대, 2010) 해당 논고에서 이창희 선생은 원형점토대토기의 출현은 기원전 6세기, 세형동검문화는 기원전 5세기 후반, 철기의 사용은 기원전 4세기 초-중엽부터 개시된다고 편년관을 확립하면서, 점토대토기문화의 출현을 시대전환의 획기로 보는 종래의 관점은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됨.


특히 앞서 언급한 박순발 선생도 이러한 비판을 상당부분 수용해서, 점토대토기연대의 상한이 올라간 것은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진개의 동정에 따른 문화적 파급의 중요성은 여전히 인정하자는 식으로 논지가 상당히 후퇴함.


이외에도 흔히 배타적인 것으로 알려졌던 송국리문화-점토대토기와의 관계가 사실은 그리 배타적이지 않고, 양자의 문화가 서로 혼입되거나 공존하는 사례가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점토대토기문화 이주민과 재래의 청동기문화권 주민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주목하는 연구가 늘어나게 됨. 즉, 흔히 알려진대로 점토대토기문화가 등장하면서 송국리문화나 역삼동유형을 위시한 재래의 청동기문화가 갑작스레 사라진 게 아니라 대략 3-4세기에 걸쳐 매우 오랫동안 이들 문화요소들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지.


또 그 과정에서 주로 점토대토기가 나타나는 고지성 취락은 그 수나 규모에 비해 재래의 송국리문화의 규모에 크게 못 미친다는 점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일방적인 주민교체설, 즉 전쟁으로 인한 축출이나 정복, 혹은 일방적인 이주민 위주의 재편설은 별로 설 자리가 없었고, 차츰 재지의 청동기사회 주민들의 역할을 일정부분 이상 강조하는 연구가 주로 대세를 이루게 되고, 다만 이주민들이 가져온 문화요소에 우월한 측면이 있었기에, 이들이 사회- 문화적재편을 촉발할 수 있었다는 쪽으로 어느정도 의견이 모이게 되었다고 보면 됨.(유병록, 청동기시대 말기 이주문화와 사회변동, 2020)


사실 이쯤만 가도 '한국인의 조상들은 기원전 4세기 경 중국 동북지방에서 내려온 점토대토기문화 주민이며 원래 한반도에 거주하던 이들은 일본으로 쫓겨났다'는 식의 인터넷 상의 이야기들이 비판의 여지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울 것임. 즉 이러한 입장에서 보아도 문화적 주도권은 어느정도 요녕성 일대의 점토대토기문화권 유이민이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재래의 묘제에다가 새로 유입된 세형동검 등을 부장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이러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교류하던 재지민의 역할을 부인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






서두가 상당히 길었지만, 앞서 말했듯 내가 지금 소개하려는 송만영의 '중부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2019)이라는 논고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예 이주와 재편이라는 2000년대 중후반 이후의 점토대토기문화에 대한 통설조차도 비판하는 논문이라 할 수 있음. 송만영은 사실 2011년에도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는데(송만영, 중부지방 점토대토기 단계 취락 구조와 성격, 2011) 해당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음


1. 종래의 사회재편설에 따르면 점토대토기 유입 초기단계의 고지성 취락은 알력과 긴장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2. 점토대토기문화 단계에서는 오히려 취락이 소형화, 분산화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러한 분산, 소형화 과정에서 사회 재편이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색하다는 점

3. 흔히 점토대토기 취락의 여러 특징들은 이전에 없던 요소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기존 재지의 청동기문화권 취락들의 축소, 소형화라는 장기지속적 문화변동의 연장선상으로서도 볼 수 있다는 점에 의거하여


이주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들의 지극히 제한적이었을 뿐이며, 재지민들의 자체적인 사회-문화변동의 결과로 점토대토기문화의로의 변동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었으며, 종래에 재지민-이주민 간의 상호작용으로 사회변화를 설명하던 도식은 기실 이에 합당한 고고학적 근거가 부실하다는 내용이었지.


송만영은 이 논문의 반향이 적자 이 내용을 보완해서 다시 2019년에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중부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이라는 논고임.


이 논고에서 송만영은 기존 점토대토기 사회의 전환과정에 대한 논지들을 이주설, 갈등설, 공존설, 교류설, 재편설의 다섯 범주로 나누고, 최근에는 교류설 등 재지민들의 대응에 보다 더 주목하는 관점, 그리고 재편설이라고 하더라도 이주민과 선주민 간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음을 주지하면서 이들 다섯 가지 범주들의 각각의 한계들을 지적함.


먼저 이주설-재편설의 경우에는 흔히 진개의 동정과 이로인한 고조선 계통 유이민들의 한반도 이주를 상정하지만 실상 그러한 문헌기록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다는 점, 그리고 유이민이 실질적으로 재래 사회에 비해 우월했던 측면이 별달리 간취되지 않는다는 점과 수도작 농업이나 대형취락과 같은 송국리문화권의 성취들이 오히려 쇠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유입을 계기로 하는 사회변화를 상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함.


이러한 이주설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갈등설의 경우에는 고지성 취락이나 특정 유적들을 점토대토기문화권의 취락과 재래의 무문토기문화권의 취락으로 구별하면서 양자 간의 배타적 측면을 강조하는데, 해당 논의에서 설정하는 고지성 취락 등이 엄밀히 점토대토기문화의 것이 맞는지 확인된 바 없고, 재래의 무문토기문화와 점토대토기문화가 애당초 그렇게 배타적으로 존재한 바 있는지 확인된 바가 없음.


공존설은 마찬가지로 일단 점토대토기문화 세트와 무문토기문화 세트가 존재하고 일정기간 양자가 공존했다는 주장인데, 앞선 갈등설과 마찬가지로 두 문화권이 엄밀하게 배타적으로 각자의 유물복합세트를 가진 채 동시기에 공존했는지 확인 된 바 없음.


끝으로 교류설의 경우에는 재래의 무문토기문화인들이 주체적이고 선별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했다는 관점으로, 200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관점이 득세하기는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서는 사회변동의 계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함. (+ 송만영은 이 입장조차도 일정 수준의 '점토대토기 집단'의 이주를 일단 상정한다는 점에서 앞선 가설들하고 다 싸잡아서 비판함)


즉 이러한 논지들을 요약하면 흔히 통설에서는 진개의 동정이라는 문헌기록을 기반으로 중국 동북지역 고조선계통 유이민이 진개 동정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이들 점토대토기문화 집단이 한반도 남부에 이주하여, 전통적인 무문토기문화를 대체 혹은 재편함으로써 여러가지 사회 문화적 변화의 획기를 마련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상 이런 문헌기록을 뒷받침할만한 고고학적 흔적이 발견된 바 없다는 것임.


만약 이러한 이주-재편설, 여기에서 더 나아간 갈등-공존설이 성립하려면 일단은 점토대토기문화를 대표하는 특정한 유물복합세트가 있고, 이 반대편에 이에 배타적인 재래의 무문토기문화의 유물복합세트가 존재하고 설정이 가능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과거에 점토대토기문화의 표지로 설정했던 것들 혹은 무문토기문화의 그것으로 설정했던 것들이 이미 오래전, 즉 점토대토기가 출현한 초창기부터 서로 혼재되고 공존되고 있어서 애당초 초창기에 이주했던 순수한 '점토대토기문화'가 무엇인지 그 실체조차 드러난 적이 없었다는 것임.


그러니까 일단 기원전 6-4세기에 걸쳐 점토대토기를 위시한 뭔가 새로운 문화적 요소가 출현한 것은 맞지만, 일단 이주-재편-갈등-공존설에서 각각 설정할만한 오리지널한 점토대토기문화의 원류집단을 설정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있고, 따라서 이주의 흔적이 엄밀하게 증명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지.

이러한 관점에서 김범철, 이형원 등에 의해 이주가 있었더라도 매우 소규모였으며, 결국 재래의 무문토기문화 집단이 스스로 주체적이고, 자발적이고 선별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이주민들은 이에 동화되었다는 관점의 '교류설'이 득세하고는 있지만, 단순한 교류만 가지고서는 왜 하필 그런 문화적 요소들을 선별적으로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이론이라는 것이 송만영의 입장인 것임.


사실 송만영의 입장은 교류설에 가깝고, 다만 이 교류설을 좀 더 발전적, 계기적으로 설명한 '관계망설'에 가까운데 이는 다시 후술하도록 하겠음.


여하튼 이후 송만영은 본 논고에서 특히 이주설-재편설에 대해서 비판을 좀 더 보강하는데, 그 논지는


첫째, 특히 가장 먼저 점토대토기가 유입된 한반도 중부지역 일대의 초기 점토대토기 관련 유적을 검토한 결과 점토대토기는 오히려 재래의 천전리식 취락에서 등장하여 차츰 점진적으로 무문토기를 대체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이는 집단의 이주를 전제로 한 이주설의 흔적과는 전혀 맞지 않으며, 또한 통설에서 점토대토기문화의 유입의 흔적으로 보았던 장축노의 존재나 유물세트의 변화는 사실상 이전의 송국리문화 등 재래의 무문토기문화에서도 이미 흔적이 나타났거나 시간적인 변화의 결과로 충분히 해명이 가능해서 이주를 의미하는 단절성의 흔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


둘째, 흔히 재편설에서 말하는대로 재래의 무문토기문화를 기층문화로 재편성할만큼 대규모 인구이동의 변화가 고고학적으로 별달리 설명되지 않는데, 특히 무문토기시대에서 점토대토기시대로 이어지는 기간동안은 지속적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을 나타낼 뿐이어서 이들 점토대토기문화인들이 기존의 인구집단을 재편할만큼 대규모로 이주했다면 인구변동의 흐름에 영향을 주어 불연속적인 측면이 나타날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기실 종래의 변화흐름이 별다른 불연속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이는 탄소연대 확률밀도 연구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토대토기 집단의 이주가 설령 있었다고 할지라도 남한지역의 인구 변동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는 점,


셋째, 인구감소, 대형취락의 해체, 또 (종래에는 점토대토기 집단의 유입으로 인한 변화로 생각되었던) 천신의례의 등장을 의미하는 종교시설물로서의 환구시설의 등장 등은 인구 소형화 및 분산, 생계경제 양식의 변화(농경에서 혼합경제로) 등처럼 재래 무문토기문화 시기의 장기변동의 결과물이지 점토대토기집단의 유입으로 인한 외생적 변화의 산물로는 보기 어렵다는 점, 특히 환구시설 등은 이미 무문토기문화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조영되어 점토대토기 시기의 그것으로 연속되기 때문에 이러한 시설을 운영하는 제의권이 서로 다른 세력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결론적으로 점토대토기 집단의 대규모 이주가 청동기시대 후기의 여러가지 사회문화적 변화를 야기했을 가능성은 낮으며, 점토대토기 시대에 이르러서 문화를 영유하는 주체가 교체되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음.



송만영의 논문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음


'결론적으로 이주민의 존재는 인구 변동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이주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고학 자료로 인지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새로운 물질문화의 유입에 이주민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주민과 재지민의 공존, 갈등, 그리고 교류를 염두에 둔 점토대토기 유적의 편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주민 집단의 대규모 이주, 그리고 재지민과의 교류를 당연시 하였고, 이를 전제로 유적 편년을 하였지만, 사실 이주, 교류는 편년 작업을 통해 유물복합체의 순서가 결정된 이후에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즉, 종래의 점토대토기 집단의 대규모 이주를 상정하고 수립되었다는 이주-재편-공존-갈등-교류의 다섯 범주의 학설들은 모두 실상 고고학적으로 논증이 안 된 진개 동정으로 인한 고조선 유이민들의 대규모 이주라고하는 문헌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뒤에 이를 순환논증으로 지속적으로 이 논지를 강화하면서 확대재생산 된 것에 불과하지 실제로는 그에 상응하는 고고학적 흔적들이 발견된 바 없으며, 이를 논증하는 근거로 활용된 고고학적 편년연구도 오히려 이런 통설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므로 비판적 재검토가 불가피하다는 것임.


사실 고고학은 원래 이러한 문헌기록이나 편견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는데, 전통적인 점토대토기문화 단절론의 경우에는 오히려 문헌기록에 과도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연구자들이 편향된 결론을 내렸던 측면이 없지는 않았던 것임. 사실 그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이창희가 이러한 연대 편년은 유물의 자체적인 형식학적 연대편년이나 탄소연대측정법과 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먼저 수립하고, 그 이후에야 문헌기록과 같은 보조적인 자료를 참고해야 한다고 한 데에도 상당한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고고학적 증거들을 객관적으로 정립하지 못하면 마치 중국 고고학계를 비판할 때 자주 나오는 표현인 '발을 잘라 신발에 맞추는' 꼴이 되기 쉽기 때문이지.


결국 앞서 언급한 모든 종래의 통설들을 다 비판했던 송만영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관계망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음.


'점토대토기 집단의 이주설을 비롯하여 공존, 갈등설, 그리고 교류 및 재편설은 현재의 고고학 자료에 잘 부합하지 않으며, 그 근거도 충분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었다. 이에 필자는 그 대안적 가설로 재지 사회가 요동, 서북 지역, 그리고 중서부지역을 연결하는 광역의 관계망을 통해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감문화를 차례로 수용하였고 제장과 같은 지역 관계망을 통해 그 문화를 확산시켰다는 관계망설을 제안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제장은 앞서 언급한 환구시설을 일컫는데, 송만영은 본고에서 무문토기문화 시기 말기에 이르러서 대형취락이 해체되고 공동체가 소규모화, 분산화되자 해체된 대형취락을 대신하여 새로운 인적 네트워크를 복구할 목적으로 이러한 환구의례가 등장하고 확산한 것으로 보이는데, 즉 이런 환구의례를 매개로 분산화된 여러 소규모 취락들이 관계망을 맺고 문화를 교류하고 확산시켰다고 보고 있는 것임. 즉 광역의 관계망에서는 요동에까지 아우르는 한반도-만주 일대의 청동기문화권에서 지속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지역적으로는 이러한 환구의례를 통해 한반도 남부 전역으로 이러한 외래문화를 확산시켰다고 보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각 지역별로 이러한 외래문화를 좀 더 보수적으로 수용하는 집단,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집단이 있어서 이러한 수용의 정도가 다양한 유입된 외래 문화 세트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냈을 뿐, 실상 특정한 유물세트가 '점토대토기 집단'임을 암시하는 증거를 찾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주민이 설령 없지는 않았더라도 그들의 비중은 별로 크지 않았으며, 점토대토기 혹은 그 이후시기까지 이어진 환구의례의 주체는 종래의 무문토기문화집단이었으며 그들이 지속적으로 이러한 문화 변동을 담당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임.


물론 그가 언급한 이러한 관계망설도 아직까지 그 네트워크의 범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규명된 것이 아니란 점에서 역시 불완전한 이론이라는 약점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크다고 생각함. 분명한 것은 이미 통설로서 제안되었던 '점토대토기 집단의 대규모 이주'라는 가설이 고고학적으로 엄밀히 검증되었다고 할만큼 그 흔적이 뚜렷하지 않고, 종래에 이를 지지한다고 여겨졌던 편년연구가 문헌기록 등에 의해 오염되면서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는 점, 점토대토기문화로의 단절적 변화로 상정했던 여러가지 사회문화적 변화들이 실상은 이미 무문토기문화의 자체적인 장기변동의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었다는 점 등임.


여하간 송만영의 이러한 연구가 학계에서 다수설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여튼 최근 고고학계가 교류설-(점토대토기집단) 동화설을 위시해서 이러한 사회문화 변동에 대한 재지민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역할들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연구라고 할 수 있음.





흔히 반도 일본어설과 연계해서 이러한 점토대토기문화 단절론이 인터넷상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물론 점토대토기문화 단절론은 차라리 한국 고고학계에서 한 때 통설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긴 하지만, 현재에는 그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이 있었고, 따라서 현재는 정설 내지 다수설로 볼 수 없는 실정임. 오히려 이러한 점토대토기 집단의 이주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였다고 보고 있으며, 재지민의 능동적인 대응을 강조하는 연구들이 근래에는 오히려 더 다수에 가까운 위치를 점하고 있음. 특히 송만영의 경우처럼 극단적이긴 하지만 아예 이주민의 역할 자체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로지 청동기 교류 관계망에 따른 재지사회의 자체적인 변화 및 외래 문화의 선별적인 수용으로 보는 관점도 나타나고 있는 중임.


또 하나, 그렇다면 이렇게 한국 고고학계가 점토대토기문화 단절론과 같은 전통적인 통설을 부인하게 된 것이 과연 민족주의 감정 때문일까?

어떤 반도일본어설 지지자들은 반도 일본어설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부합하는 언어학적 가설이며, 한국 학계가 민족주의 갬성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한국 고고학계가 이러한 단절론을 부정하기에 이르게 된 것은 오히려 그런 통설이 문헌기록을 과도하게 신뢰, 의존하는 편향적 관점에 근거해 수립된 데다가 엄밀하게 고고학 자료를 검토한 결과 그러한 통설이 별로 사실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인 거지 여기에 민족주의 갬성이 어쩌고 들어갈 게 하나도 없음. 애당초 이런 논쟁은 보빈이 반도 일본어설을 제안하기 훨씬 이전부터 계속 이어진 논쟁일 뿐더러, 이런 논쟁 과정에서 반도 일본어설이 언급된 적조차도 단 한 번도 없음.

당연히 탄소연대측정이나 유물의 형식학적 변화를 추적하는 연대편년 자료, 여타의 유물세트를 찾는 기존의 고고학적 방법론에 앞서서 보빈의 언어학적 가설을 더 신뢰해야 할만한 마땅한 이유도 없음.


애당초 고고학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반도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이주를 아무렇지 않게 긍정하고 논의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민족주의적 갬성 때문에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혁신적인 가설이 외면받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점토대토기문화 유입시기와 같은 특정 시기에서의 이주의 흔적이 제한적이라고 비판받는 건 실제로 그에 걸맞는 여러가지 고고학적 증거들이 부재하기 때문이지 이는 민족주의 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임. 오히려 해방 이후부터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주민교체론이라던가, 청동기시대-철기시대 주민교체론이 유행했었고, 한 때는 이러한 학설이 대세를 이룬 적도 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이런 주장이 비판받고 소수설의 위치로 추락한 건 그냥 이런 극단적인 가설보다는 점진적인 교류, 소규모 이주가 실제 나타나는 고고학적 증거들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님.


여하튼 반도 일본어설이라던가, 점토대토기문화 단절론이라던가, 송국리문화 축출론이라던가, 대중의 흥미를 끄는 여러가지 학설들에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학계에서 왜 그런 극단적인 가설이 별로 발 못 붙이고 있는지는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이런 글을 썼음.





세 중 요약


1. 점토대토기 집단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재래의 청동기문화를 대체했다는 학설은

2. 생각보다 탄탄한 고고학적 근거 위에 수립된 가설이 아니라 요새는 많이 비판받고

3. 오히려 재지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대안적 가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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