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검은태양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타 갤러리 검은태양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개념글 리스트
1/3
- 싱글벙글 배추 강매 당하는 김제동 ㅇㅇ
- 싱글벙글 유월절을 잘 지키는 교회 노인복지관
- 싱글벙글 인도 전투기가 ㅂㅅ인 이유 우마소이
- 안녕하세여 선생님들, 디지털 사진 몇 장 두고갑니다. 和泉つばす
- 싱글벙글 강아지 키우기 전후 ㅇㅇ
- 군침군침 오리온 다이제 초코의 제조과정.gif 수인갤러리
- 싱글벙글 일본 양아치 말투 강의 ㅇㅇ
- 얍얍 화재 뉴스 화면 캡쳐..jpg ㅇㅇ
- MBC, 이이경 하차·'면치기' 연출 공식 사과 NiKe
- 정부 대승리 .통화가치 상승률 세계 1위…원화값만 개떡상 , 왜 옌우응
- 해군일기 - 코로나편3 공노비96
- 251121 우리집고양이이
- 시디즈가 허리 아픈 이유(좋은 럼버서포트 기준) ㅇㅇ
- 싱글벙글 ㅈㄴ 수상한 포켓몬 애니 근황.jpg 짜잔
- 싱글벙글 배그 제작사 크래프톤 최신 근황 언성을높이지마
중국이 최악의 굴욕으로 여기는 역사...JPG
1899년 당시 중국 청나라가 서구 열강들한테 조리돌림 당한'의화단 사건'이게 왜 현재 중국이 최악의 굴욕으로 꼽나면이전까지 중국 대륙은 변방 이민족들이 지배 당한 적은 있지만하나의 중국 지향으로아무튼 전부 자신들 중국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어심지어 한족문화에 동화되지도 않았고 한족들을 대놓고 노예계급으로 규정한 몽골 엠파이어(원나라) 조차 말이지그러나 의화단 사건은 지금의 소수민족과는 다른 서구 열강, 즉 빼도박도 못한 외세에게 털린거라현재 중국인들의 대표적인 역사적 컴플렉스 이기도 해일단 의화단 사건 일어나기 전에도 청나라는 이미 영국과 일본 한테 전쟁으로 털린 상태라중국은 당시 열강들의 숨은 맛집으로 소문이 난 상태였어그래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다른 열강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중 이였지이런 혼란스런 중국 상황을 틈타 서서히 들어오는 새로운 세력이 있었는데바로 유럽에서 건너온 기독교 단체들이였지기독교 단체들은 중국인들 상대로 열심히 포교활동을 했으나오히려 중국인은 이들이 중국을 침략하는 세력으로 받아들여져되려 반외세, 반서양 감정이 계속해서 번져나가는 결과를 초래해또 중국인들은 선교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국이 기독교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어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의화단' 이라는 단체야이들은 뒤에서 청 정부의 사주를 받아'청을 돕고 함께 양이들을 물리치자'라는 부청멸양(扶淸滅洋) 이라는 구호로 내세우며외국인들이나 각국 공사관에 공격을 가했어결국 188명의 서구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무참히 희생되었고45,000여명에 달하는 자국 중국인 기독교인들마저 살해되었지이렇게 의화단의 계속되는 외국인 공격에 분개한 서구 열강들은 청 조정에 의화단의 진압을 요청했지만청 조정은 오히려 이들을 옹호하기까지 했어게다가 의화단은 난징 - 731 등을 뺨치는 극심한 잔혹 행위를 자행하게 되는데 당시 기록된 의화단의 만행들을 몇가지 정리하자면1) 서양 남녀를 벗겨서 남성의 성기를 자르거나 여성의 음부를 짓뭉갰다.2) 남녀를 벗겨서 불속에 넣어 아주 태우지 않고 익혀서 먹을 정도로 구웠다.3) 끓는 물에 서양인 아이를 삶아서 익혀 썰어먹었다. 4) 사람을 산채로 묻어 죽이고, 팔과 다리 각을 뜨고, 칼이나 작두로 머리나 허리를 통째로 싹둑 자르는 등의 살해 방식이 이루어졌다.그래서 일본우익들 중에는 "중국인의 저런 잔혹한 면을 봤을때 난징사건은 중국인의 발상으로 밖에 할수 없는 것이다. 중국인의 날조거나 중국군 소행"이라고 말하기도 해이러한 상황에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가 계속 방관한다면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진압 할거라고 경고를 했지만당시 청 최고 권력자 서태후는 열강들의 경고에'알바 아니다' 식으로 대응해 되려 의화단과 손잡고열강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희대의 뻘짓을 보여줬어청나라가 선전포고를 하자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 일본, 미국등 8개국은 동맹을 맺어 청나라에 연합군을 파병했어이전까지 이들은 서로 으르렁 하는 사이였는데도중국이라는 공통 된 만만한 먹잇감 앞에서 일시적으로 뭉치게 된 케이스였지 결국 선전포고한지 2달도 채 넘기기 전인 8월 14일에 수도인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함락당하게 되고서태후나 다른 관료들은 그대로 도망 줄행랑을 쳤어그렇게 베이징은 혼돈상태가 되었고 연합군은 대대적인 학살과 파괴를 행했어당연히 의화단은 궤멸 되었고 의화단이 아닌 중국 민간인들도 이때 많은 목숨을 잃었어이후 베이징을 점령한 8개국 연합군은 3일간 '자유시간' 을 가지게 되는데베이징의 이화원 등 많은 건물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하거나이외에도 폭행이나 베이징 시내 거리와 집들을 돌아다니며중국인들을 납치, 중국여자들을 강간하는 등의 보복을 행했고납치당한 중국인들은 강제노역을 하게 되거나중국여자들의 경우에는 강제로 서양인들의 첩이 되었어특히 이에 관해 프랑스군의 악행이 가장 유명한데청나라인의 특징인 변발된 머리가죽을 뜯는 야만적인 짓거리를 했다고 해당시의 일이 기록 된 외인부대라는 책자에 의하면 프랑스군은 이 전쟁에 참전하여의회단 반군을 죽여 역시 변발이 붙은 머릿가죽을 트로피 처럼 장식하거나장교들의 타는 말의 말꼬리로도 장식했다고도 해실제로 말꼬리를 장식한 외인부대 행사 사진을 싣기도 했대아편전쟁, 의화단 전쟁의 교환비서방연합군 군인 사망자 757명 청군 사망자 10만명결국 청나라 정부는 전쟁에서 대패하여 화친을 체결해야 했어열강들은 의화단에 의해 희생된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배상,그리고 의화단과 그에 관련된 관리들의 처벌 및 진압 등을 요구했고 이에 중국은 따를수 밖에 없었어이후 열강들은 청과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을 체결하게 돼이로인해 열강들은 중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장악했으며 많은 영토와 이권을 떼어갔어.웃긴건 전쟁 당시 의화단을 지원했던 서태후는 청나라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이 모든 책임을 의화단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기는 관련 없다며 보란듯이 뒤통수배신을 하고 대규모 숙청 행했어중국의 태평양 진출이 막히게 된 것도러시아가 의화단 전쟁에서 서구의 편으로 침략하여아무르주, 연해주를 강탈해 버렸기 때문이지이후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뜯어 먹히는 정도를 넘어서그냥 열강들의 반식민지가 되버려그래서 중국 내 지식층은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의식이 자리잡게 돼지식층은 서구 문물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한편,사실상 서구의 바지사장으로 전락해버린 청 정부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이 늘면서결국 청나라는 서서히 멸망의 길로 가게 돼...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에서 상하이 공원 입구에 걸린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이런 배경 때문에 "성수동 카페 중국인 출입금지"에 민감하게 반응한게 아닐까?어쨌든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현재 중국인들이 "서구"에 열등감 느끼며 발작하는 계기가 되었고중국식 천하관도 처참히 붕괴되어중국식 천하관에 매몰 되었던 조선인들도중국 따위는 별거 아니였다. 서구문명과 서구가 진리였다를 깨닫게 되지그러나 이러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은 끝나지 않았으니중국은 다시 일본의 침공을 받아서1945년까지 중국영토의 절반이 점령당하며왕징웨이 난징친일정부의 통치를 당하다가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해방 돼이러한 배경은 오늘날 중국이 서방과 일본에 반감을 가진 원인이라고 할수 있어
작성자 : ㅇㅇ고정닉
싱글벙글 어느 소련의 쉬었음 청년 이야기
1965년 1월 소련 체첸-인구시 어느 깡촌에서 태어난 그는 여타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것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82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으며 그렇게 평화로이 지내던 어느 날, 나이가 찬 그에게 영장이 날아와 군에 입대하게 된다. 군에 입대한 그는 공군 지상부대에서 근무하였으며, 군 생활 중 전역 후 자신의 미래를 그리며 틈틈히 공부를 해나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명문대를 꿈에 그리던 그에게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고, 결국 그는 입시를 포기하게 되었다. 입시를 포기하고 컴퓨터 판매원, 야간 경비원으로 살아가던 그는 운이 좋게도 또 한번의 입시를 성공해, 명문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너무 학업을 등한시했던 탓일까? 그는 대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잦은 결석과 전공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지내던 그에게 기회가 또 다시 찾아왔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하면서 각 위성국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상황이 온 것으로, 이는 체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한미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 확신한 그는, 빠르게 새로이 체첸의 지도자가 된 조하르 두다예프에게 찾아가 그의 신임을 얻기 위해 터키 앙카라행 비행기를 납치하는 등의 행위를 벌였다. 두다예프의 신임을 얻어 한순간에 장교로 고속 승진한 그는 소련의 세속주의와 체첸의 전통 수피즘을 버리고 캅카스에 신정일치 이슬람 국가를 만든다는 다소 허황된 목표를 세우기에 이른다. 이에 대한 일환으로 다게스탄에 영향력을 넓히려 지속적으로 러시아 정부와 서방 세계들에게 어그로를 끌고, 결국 제2차 체첸 내전의 발단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샤밀 살마노비치 바사예프, 체첸의 총리이자 베슬란 학교 사건, 부됴뇹스크 병원 사건 및 체첸 내의 외국인 납치 등을 일삼던 인물이었다. 체첸 내전 중 부상으로 다리를 절단한 그는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서 공작을 시도하였으나 2005년 러시아 정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고로 사망하였다.
작성자 : 림송철고정닉
차단 설정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전체 갤러리]
차단 기능을 사용합니다. 차단 등록은 20자 이내, 최대 10개까지 가능합니다.
설정된 갤러리
갤러리 선택
설정할 갤러리를 선택하세요.
[갤러리]
차단 기능을 사용합니다. 전체 설정과는 별개 적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