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메르시의 연구실에 모이라가 찾아왔다.


"이봐 치글러, 혹시 잠깐 시간돼?"


모이라는 메르시의 책상 위에 정체모를 약물이 들어있는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당신이 웬일이죠?"


메르시는 논문을 작성하다 말고 모이라를 흘겨 보았다.

그녀는 비윤리적이고 끔찍한 연구를 일삼았기에 메르시에게 전혀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별일 아니야. 그냥 내가 새로 개발한 신약을 한번 봐 달라고."


그 말을 들은 메르시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나더러 무고한 희생자들의 피로 만들어진 그 더러운 화학물질 덩어리를 봐 달라고요? 말같잖은 소리 마시고 돌아가시죠."

그녀는 역겹다는 듯 눈가를 찌뿌리고는 시선을 논문으로 옮겼다.

"이런, 까칠하기는."

모이라는 슬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앙겔라 치글러. 자네 걱정과 달리 이 약은 윤리적이다 못해 숭고한 방법으로 만들어 졌으니."

그러자 메르시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모이라를 흘겨 보고는 의자를 빙글 돌려 그녀와 제대로 마주보았다.

"어디, 한번 들어나 드리지요. 곧 후회할것 같지만."

"후회하긴."

모이라는 자그만 미소를 지으며 상자에서 플라스크에 담긴 약물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 약은 준비되지 못한 커플들과 사창가의 가난한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졌지. 이걸 마시면 약 24시간 동안 완벽한 피임 효과를 얻을수 있어."

그 말에 메르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음, 괜찮군요. 자, 그럼 이번엔 그 숭고한 실험에 대해 말해주시죠? 설마 무고한 사람들을 꼬셔서 저세상 보낸 일이 숭고하다는 것은 아닐테지요."

"물론 아니야. 무려, 내가 친히 실험대상이 되었지."

"당신이요?"

메르시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가 수십번의 임상실험을 거치는 동안 동원한 사람은 맥크리 단 한명 뿐이었지."

"맥크리?..."

메르시는 시선을 흐뜨린 뒤 가만히 입술을 두드렸다.

잠시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설마 하는 눈치로 모이라를 올려다 보았다.

"혹시.. 실험과정이 어떤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자네도 알다싶이 이런류의 약물은 직접 사용해본 뒤 경과를 살펴보는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안그래?"



"그렇다면..."



말끝을 흐리는 메르시의 눈동자는 어느새 새파란 구슬처럼 희동그레 띄여 있었다.



"꽤나 즐거운 개발이었어."

모이라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