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교가 폭파되자, 강북에 고립된 국군 6개 사단(1사단, 5사단, 7사단, 수도사단, 2사단, 3사단) 총 44,000명의 병력은 북한군에게 포위·섬멸 당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어 지휘 체계가 무너진 가운데 실종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군은 중장비를 비롯한 개인화기까지도 고스란히 버리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물에 가라앉는 모든 것을 벗어던져 가까스로 한강을 헤엄쳐서 건넜거나, 피난민들의 나룻배 등을 얻어 타서 포위망을 탈출했습니다.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되기 직전, 채병덕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 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강선 방어 임무를 부여하였습니다.
김홍일 소장은 헐벗고 굶주린 장병들에게 전투 식량을 제공하고, 그때까지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이 확정되지 않았으나 "미군 참전"이라고 크게 쓴 현수막을 길목마다 배치하여 철수 중인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시흥 지구 전투사령부는 놀랍게도 국군의 주력 부대들이 와해되어 혼란스럽게 후퇴를 시작한 지 불과 10시간 만에 3개의 혼성사단(혼성 7사단에 유재홍 준장, 혼성 수도사단에 이종찬 대령, 혼성 2사단장에 임선하 대령)을 편성, 양화교에서부터 광진교를 잇는 한강 연변 24Km에 이르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시흥 지구 전투사령부는 곧 미(美) 지상군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그들이 가능한 한 북쪽에서 전투를 전개할 수 있도록 최대한 한강선에서 전선을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유엔은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고 8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북한의 무력 침공을 평화의 파괴 행위로 규정하고 파병 결의안을 찬성 7표, 반대 1표, 기권 2표(인도, 이집트)로 가결하였습니다.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1950년 6월 26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한국에 투입될 미군의 작전 지휘권을 부여받고,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직접 시찰하였습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방어 진지를 지키고 있던 어느 국군 일등중사에게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셈인가?" 라고 질문을 건냈습니다.
"예! 장군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대한민국의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상관이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네의 소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적과 싸우고 있습니다. 무기와 탄약을 지원해주십시오. 그것 뿐입니다."
"잘 알겠네. 내가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군!"
감격한 맥아더 원수는 흙먼지가 묻은 일등중사의 손을 꼭 쥐고 "내가 동경(東京)으로 돌아가는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네." 라고 약속하였습니다. 』
- 정일권, "전쟁과 휴전"(동아일보사, 1986)
맥아더는 국군 장병들이 불굴의 투지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몸소 확인하였고, 1950년 6월 30일, 트루먼 미 대통령으로부터 미 지상군의 투입을 허가 받자마자, 지체 없이 미 8군 사령관에게 한국과 제일 가까운 일본 큐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 24사단을 즉시 파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강변에서 만난 일등 중사와의 약속을 지켰던 것입니다.
1950년 7월 1일 오전 8시, 미 제 24사단 21연대 1대대 B중대와 C중대 총 406명의 병력들과 제52 야전 포병대대 A포대 총 134명이 일본의 이타스케(Itazuke, 현 후쿠오카 공항) 비행장에 집결하여, 대대장 찰스 브래드포드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지휘 하에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Task Force 'Smith')"를 편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일본을 출발하여 당일 오후 20시에 부산에 도착, 열차편을 이용해 7월 2일 오전 8시 대전을 거쳐, 7월 4일 평택에서 북상하여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죽미령(내삼미동) 일대에 전개하였습니다.
이처럼 스미스 특임대가 한국 전선에 투입됨으로써, 6.25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한미 연합전선이 형성되는 큰 전환점이 세워졌습니다.
평택-안성을 중심으로 전개한 미 지상군이 경부국도를 기점으로 한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국군은 경부국도의 동쪽으로부터 동해안을 담당하여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한 7월 1일에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이 미 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장 처치(John J.Church) 준장과의 작전 협의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7월 5일 새벽 3시 경에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특임대는 우선 급한대로 병력과 화기를 배치하여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당시 죽미령 인근에는 각각 경부국도와 경부선이 좌측과 우측으로 지나고 있었습니다.
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도로와 철도 사이의 공간에 병력을 배치하여 도로와 철도를 동시에 감제하면서 방어하려 하였습니다.
따라서 좌측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철로 좌측편에 위치한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M9A1 바주카포 6정과 75mm 무반동총 1정씩을 각 중대 지역에, 4.2인치 박격포는 B중대 후방 400m 지점에 배치하였습니다.
제52 야전 포병 대대장 페리(Miller O. Perry) 중령은 보병 진지 후방 2Km 지점에 5문의 포를 배치하고, 그 중 1문(5포반)에 6발의 대전차포탄을 지급하여 포병 진지 중간 언덕에 배치하였습니다.
이처럼 6.25 전쟁에 참전한 최초의 미군 지상군이 방어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이, 북한군 제 4사단은 105 전차사단 예하 107 전차연대 소속 T-34 전차 36대를 앞세우고 1번 국도를 따라 남진하고 있었습니다.
7월 5일 아침 7시 경, 수원 부근에서 남진하고 있는 북한군 대열이 최초로 관측되었고, 잠시 뒤 오전 8시 경, 남하하는 북한군 T-34 전차 8대가 육안으로 식별되었습니다.
스미스 대대는 포병 사격을 시작으로 북한군과의 최초의 교전에 돌입했습니다.
대대의 방어 진지에 약 2Km 부근에서 야전 포병대대의 105mm 곡사포 탄환들이 적 전차에 명중했지만, 북한군 전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왔습니다.
전차 행렬이 보병 진지 전방 700m까지 접근하자, 75mm 무반동총이 불을 뿜어 선두 전차를 맞췄지만 역시나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방어 진지 바로 앞 14m까지 북한군 전차들이 다가오자, 올리 코너(Ollie Connor) 중위는 2.36인치 바주카포를 발사하여 다가오고 있던 T-34 2대를 멈추게 하였지만 미군의 예상과 달리 최신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세는 매우 강력했습니다.
돈좌된 전차 2대를 지나쳐 총 34대의 T-34 전차가 미군의 보병 방어 진지를 유린한 후, 방어선을 돌파하였습니다.
북한군 전차 대열이 도로를 따라 산등성이를 넘었을 때, 허먼 크리치필드(Herman V. Critchfield) 상병이 지휘하던 전방 배치된 5포반이 HEAT탄을 발사하여 선두에 있던 T-34 전차 2대를 명중, 그 중 1대에 화재를 발생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불타던 T-34 전차에서 북한군 전차병 1명이 PPSh-41을 들고 나와 방어 진지에 위치한 미군 기관총 사수 한 명을 쏜 직후 그 자신도 사살당했습니다.
5포반은 곧 대전차탄이 고갈되었지만, 3번째 T-34 전차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쉬지않고 HE(고폭탄) 탄을 발사했습니다.
스미스 특임대 소속 M9A1 바주카팀이 다가오는 북한군 전차에 사격을 가하는 모습. 오른쪽에 위치한 병사는 케네스 셰드릭(Kenneth Shadrick) 일병으로, 위의 사진이 촬영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 전차의 포격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최초의 미군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북한군 전차들은 105mm 곡사포와 2.36인치 바주카포의 사격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전진해왔습니다.
포병 대대는 105mm의 고폭탄으로 전차의 궤도를 집중적으로 사격해 파괴시켜 기동을 제한하고, M9A1 바주카포와 또 다른 곡사포로 측면 사격을 가해 T-34 전차들을 하나 하나 무력화 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 전차들은 계속해서 진지를 유린하며 보병과 포병 사이의 통신선을 절단시키고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때 페리 중령은 멈춰선 전차에 다가가 승무원들에게 항복을 받아내려다 북한군의 소형화기 사격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게되었습니다.
그의 포병 대대는 북한군 전차를 향해 계속해서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습니다.
잠시 후, T-34 전차 25대로 구성된 두 번째 공세 병력들이 스미스 특임대의 방어선으로 접근해왔습니다.
2번째 공세 부대는 뚜렷한 전술도 없이 전차 단독으로 또는 두 세대씩 밀집해서 움직였는데, 포병 대대는 선두의 전차 한대를 명중시켜 무력화시켰고 후속하던 세 대의 전차도 추가로 손상시켰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전투로 6포대가 적 전차의 포격에 피격되어 파괴되었고, 포대원 약 2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방어 진지 뒤에 위치한 차량 전량이 파괴되었습니다.
패배감과 공포에 휩싸인 포병 대대의 몇몇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했지만, 페리 중령은 그들 대부분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다시 방어선으로 복귀시켰습니다.
이들 전차부대가 스미스 대대의 전방 방어 진지를 돌파한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인 오전 11시 경, 수원 방향에서 북한군 제 4사단 병력이 10Km에 달하는 행군 대열을 유지하며 선두에 전차 3대를 대동하고 남진하는 것이 또다시 관측되었습니다.
이들 북한군 제16 보병연대와 제18 보병연대 등 2개 보병연대 5,000여명은 앞서 방어선을 돌파해 먼저 달려나간 선두 부대들과 원활한 통신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으며, 제 4사단 부대들은 이곳에 미군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오전 11시 45분 경, 미군과 북한군 사이의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적의 주력 보병 부대가 스미스 특임대의 보병 진지 전방 900m까지 접근해 오자, 스미스 대대장은 대대가 보유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곡사포, 박격포, 기관총 및 소화기 등 각종 사격이 다가오던 북한군의 전방에 집중되었고, 북한군 보병을 태운 트럭 여러 대가 파괴되면서 적의 진격 대열은 흩어졌습니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3대의 T-34 전차는 방어 진지 전방 300m까지 다가와 미군 방어선에 대해 전차포와 기관총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 동안에 1,000여명에 달하는 적의 보병 부대가 반월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을 점령하는데 성공, 전차 부대에 지원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부대를 죽미령 좌우 방향으로 두개로 나누어 우회시켰습니다.
이처럼 미군과 북한군 보병들이 뒤섞이며 전투가 벌어진 지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B중대와 C중대의 피해가 겉잡을 수 없이 누적되고 후방에 배치된 포병 대대 진지가 무력화된 것을 확인한 스미스 대대장은 결국 철수를 결심하였습니다.
스미스 특임대는 양쪽 측면과 방어 진지의 후방에 위치한 북한군에 의해 포위될 상황에 처했고, 적 전차가 지속적으로 밀고 내려올 경우 보병과 포병의 통신망이 끝내 두절될 것이며, 탄약 부족과 기상마저 불량하여 항공 지원도 받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후 14시 30분, 미 사령부는 스미스 특임대의 철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스미스 중령은 한 번에 한 부대씩 질서정연하게 철수할 것을 명령하여 한개의 부대가 이동할 시, 나머지 부대가 이를 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먼저 진지 우측에 위치한 C중대부터 의무 중대, 본부 중대, 마지막으로 B중대 순으로 철수 작전이 계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B중대 2소대에 철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뒤늦게 철수하다가 큰 인명 손실을 입고 말았습니다.
2소대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었고, 부상자를 옮길 충분한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소대원들은 대부분의 장비를 그 자리에 남겨 두고 몸만 빠져나왔으며, 진지에는 일부 부상당한 병사들과 이들을 돌 볼 의무병만이 남겨졌습니다.
남겨진 부상자들은 후에 북한군에 의해 처형된 채 발견되었고, 의무병의 생사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에 의해 생포되어 손이 뒤로 묶인 채 처형된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임대) 소속 미군 병사.
질서정연한 후퇴 작전은 곧 북한군의 사격에 의한 혼란과 무질서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특히 스미스 특임대에서 전투 중 발생한 사상자 수보다 이때의 철수 작전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가 더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적의 사격에 살아남은 병사들은 52포병대대의 A포대 진지에 도달하여 남은 포병 생존자들과 합류하였고, 아직 격파가 되지 않은 곡사포 4문의 조준경과 포신을 제거하여 적에게 노획되지 않게 무력화시켰습니다.
스미스 중령은 잔류 병력들을 이끌고 오산 북쪽 외곽에 숨겨둔 예비 차량 진지를 향해 이동했고, 여기서 북한군 전차가 진입했을지도 모르는 평택을 피해 안성을 경유, 천안으로 향하며 도중에 낙오자들을 태웠습니다.
마침내 7월 6일, 스미스 특임대의 잔여 병력들은 천안에 도착하여 제2 방어선을 구축한 미 제24 보병사단 부대와 합류했습니다.
철수 명령을 제대로 받지 못한 B중대원들은 며칠 후에 오산에 도착하기도 하고, 어떤 병사들은 동해안, 어떤 병사들은 서해안에서 조각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기도 하였습니다.
미 지상군의 선발대로 파견된 스미스 대대가 수행한 죽미령 전투(오산 전투)의 결과, 총 540명의 병력 중에서 156명이 전사하고, 포병대대 소속 장교 5명과 병사 26명이 실종되었습니다.
또한 다수의 미군 장비가 적에게 탈취되는 등 미군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북한군 제 4사단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어 42명의 사망자와 85명의 부상자 발생하고 4대의 전차가 격파되었습니다.
이처럼 미 지상군의 선발대로 참전한 스미스 부대의 미군 병사들은 북한군이 "구식 소총으로 무장한 바지부대"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북한군이 화력을 집중하고, 능숙한 침투, 양익포위, 후퇴로 차단 등에 익숙한 잘 준비되고 훈련된 군대라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6.25 전쟁에서 미군과 북한군이 처음으로 교전한 죽미령 전투의 결과는 참전 초기의 미군은 물론 국군에게도 커다란 충격과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 전력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군 병사들은 과연 미군의 전술과 무기로 강력하게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이러한 심리적 불안은 참전 초기에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한편 미군의 참전 계기로 초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머지않아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던 대한민국 국군과 국민들은 미군의 패배에 대해서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의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미군이 참전 했다는 것을 확인한 북한군은 추가적인 미군의 증원이 이뤄지기 이전에 신속하게 남한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출처: 6.25전쟁 60대 전투, 오산전투 위키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Osan
도서관에서 빨리 6.25 책 가져오라고 압박넣길래 반납하기 전에 호다닥 글하나 싸고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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