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
1966년 10월 31일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하였다
서울시청 앞에서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대통령이 함께 하는 시민환영대회가 열렸다
한국,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대만 등
전세계의 수많은 기자가 서울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취재하였다
여기서 발단이 되는 일이 하나 있다
서울시청 앞의 행사만 보여주는게 지겹다고 여긴
미국측 방송국의 한 촬영기사가 카메라를 돌려서
서울시청 주변의 모습을 비추었는데..
아뿔싸!
서울시청 맞은 편의 소공동 짱퀴벌레 동네가 화면에 나타난 거다
화려한 모습의 서울시청 행사장
바로 맞은 편에
슬럼가 느낌의 소공동 짱퀴벌레 동네가 버젓이 있다는 건
TV 생중계를 본 전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당연히 미국에 사는 수많은 재미동포도 이를 지켜봤고
서울의 낙후된 모습을 도저히 앉아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1967~1968년까지 청와대 민원비서실에 엄청난 양의 탄원서를 낸다
<전개 1>
이민창 (1934년생, 서울대 공대 토목과 졸업, 서울시 도시계획과 과장)
김익진 (1939년생, 한양대 공대 토목과 재학 중 서울시 구획정리과 계획계장 직무대리로 겸직)
1970년, 서울시에서 근무하는 이 두 사람은
서울시청 창문 너머로 보이는 추악한 짱퀴벌레 동네를 어떻게 하면 확 밀어버리고
재개발을 할 수 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
1970년 6월 11일, 중앙일보 특종 기사
이 기사에서는 철거가 아닌 현대화라고 언급했다
왜냐하면 소공동 짱퀴벌레 동네는
1882년 10월 3일에 체결된 조선-청나라 상민수륙무역장정 이후
거의 90년째 이어져 온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거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괜한 부스럼을 안 만든다.
1970년 11월 24일
양택식 서울시장은 소공동을 재개발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한다.
기자회견 나흘 전인 11월 20일
양 시장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소공동 재개발 계획을 보고하였는데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소공동 재개발에 큰 관심이 있다는 걸 느꼈다
<전개 2>
양택식 서울시장은 1971년 4월 26일
홍익대학교 건축.도시계획연구팀에 '소공지구 현황조사 및 기본계획 용역'을 맡긴다
이 기본계획 조사 결과
좁은 면적의 소공지구에
토지소유형태가 난잡하게 되어있어서
정말로 서울 한복판의 슬럼가와 같았다
(소공지구의 현재 모습)
홍익대 연구팀은 이 소공지구를 7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소공지구의 토지소유 현황)
<위기>
1971년 8월 20일, 서울시는 소공동 짱퀴벌레 동네의 대표자와 협정을 맺는다
당시 기사에 나온 것처럼 서울시가 짱퀴벌레에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1971년 12월 27일
소공지구 재개발 조감도
조감도에 나온 가운데 건물이 짱퀴벌레 전용 화교 회관이다
그렇다. 서울시청보다 큰 짱퀴벌레의 건물이 서울시청 바로 맞은 편에 들어선다는 거다
한국 서울시가 소공동 짱퀴벌레 동네를 재개발한다는 소식은
짱퀴벌레의 고향인 대만 정부를 기쁘게 하였다.
짱퀴벌레 : 우리 정부와 연계한 해외동포 재단에 현금 2억원을 주겠다해!
소공동 짱퀴벌레 재개발에 이 2억원을 마음껏 쓰라해!
<절정 1>
그런데 이 재개발 사업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위에서 보았듯이
화교지구와 B지구
→ 지구를 구분하는 길이 마땅히 없고 딱 붙어있어서 갈등은 불보듯 뻔하였다.
어쩌면 서울시가 B지구 토지 소유주와 설득을 가볍게 여긴 것도 원인이었다.
B지구의 토지 소유주 중에는 남궁련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남궁련 : 1916년생, 니혼대학 경제학과 졸업, 대한 조선 공사의 회장을 지낸 기업인)
남궁련은 서울시의 소공동 재개발에는 찬성하였으나
이렇게 여러 개의 지구를 나누어서 개발하는 건 극구 반대하였다.
이런 재력가의 완강한 항의에 서울시는 속수무책이었다.
1972년 8월까지 서울시의 소공동 재개발은 시작조차 못 하였다.
소공동 재개발화교조합에서 2달 간 진정서, 탄원서, 질의서 등 각종 서류를 서울시에 냈고
대만 대사관의 총영사, 참사관, 대사 등 외교관도 서울시장과 접촉하였다
(1971년 8월 24일, 대만 외무성의 대표가 서울시장실을 방문한 모습)
<절정 2>
소공지구 재개발 계획의 용역을 맡은 홍익대학교 연구팀은
과학기술연구소 KIST의 경제분석실에 의뢰하여
소공동 토지의 가격을 조사하였는데
1평당 최소 32만원 ~ 최대 107만원이었다.
1972년 7~8월까지 소공동의 짱퀴벌레들은 지쳐있었다.
'빨리 이 곳의 재개발 공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전전긍긍 불안감이 가득했다.
이런 분위기가 절정애 달했을 때
A지구의 토지를 소유한 '한국화약'이라는 회사에서
소공동 화교대표 이항련과 접촉한다
'소공동의 화교 땅을 모두 사겠다. KIST에서 책정한 가격인 1평당 107만원으로 한다'
이것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는데
왜냐하면 1972년 당시 왕십리나 청량리의 상가 땅값이 평당 2~3만원이었고
강남의 신사동 땅값이 평당 1~2만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화약은 소공동의 화교 땅 542.4평을 전액 일시불 현금거래로 샀다.
90년 동안 쌓은 소공동 짱퀴벌레의 자존심이 처참하게 폭파되는 순간이었다
<절정 3>
그럼 과연 90년 역사의 짱퀴벌레 동네를 폭파한 것이 민간기업 혼자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위에서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소공동 B지구에는 '범진사'라는 기업이 있었다.
그런데 이 범진사는 단순한 민간 기업이 아니라...
육군보안사령부 서울분실의 위장 명칭이었다
1971년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은 그 유명한 김재규 중장이다 ㄷㄷㄷ
육군보안사령관은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심복이었으니
90년 역사를 자랑한 소공동 짱퀴벌레가 제아무리 날뛰어도
기업의 재력과 군사정권의 정보력을 당해낼 수가 없던 것이다.
<결말>
1972년 9월 17일, 양택식 서울시장은 대만으로 해외출장을 간다.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양택식 시장에게
"대만으로 가서 '한국이 재개발 약속을 못 지켰으니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고 와라"
라는 지시를 하여 이루어진 일종의 사죄 여행이었다.
중화민국61년 (1972년) 10월 26일 화하도보 라는 곳에서 보도한
양택식 서울시장 관련 내용 (왼쪽 부분)
이때 양택식 서울시장은
대수경성(大授景星)이라는 대만 최고급 수교훈장과
중화문화학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만 정부 입장에서는
양택식 서울시장이 대만 땅에 와서 사죄를 한다니
너그럽게 용서한다고 정신승리를 했겠지만
양택식 서울시장의 대만 출장과 비슷한 시기인
1972년 9월, 일본이 대만과 단교를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서 동북아시아에서 대만의 정식 수교 국가는 이제 한국밖에 없었다
(1971년 10월 25일은 대만이 유엔에서 쫓겨난 날)
아무튼 1970년부터 1972년까지 벌어진 여러 사건 덕분에
소공동에는 규모가 엄청 큰 호텔이 들어선다
(1976년 서울 플라자 호텔 공사 모습)
마치 소공동을 병풍처럼 완벽하게 가린 서울 플라자 호텔
이 호텔의 소유 회사는
앞서 언급한 한국화약이고
이 한국화약은 오늘날의 한화그룹이다
<여담>
1994년, 중국 공산당이 한국화약을 '남조선 폭파집단'으로 번역한 해프닝 때문에
한국화약이 회사 이름을 한화로 바꾼다.
과거 소공동 짱퀴벌레 동네를 자본으로 폭파한 회사가 한국화약이었으니
'남조선 폭파집단'이라는 명칭은 시의적절하게 잘 번역한 것 같다.
3줄 요약
1. 서울시에서 짱퀴벌레 전용 화교 회관을 지어주려고 했음
2. 한국화약이라는 회사에서 짱퀴벌레에게 이 돈 주고 먹고 떨어지라고 함
3. 소공동 짱퀴벌레 동네는 멸망하고 그곳에 거대한 서울 플라자 호텔이 세워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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