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에서 발췌한 내용들
1)후세인-맥마흔 서한에 대한 부정확한 내용들
"맥마흔 선언"이라고 짤에서 지칭된 약속은 모호하게 아랍인들에게 약속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메카의 군주였던 후세인 빈 알리와의 비밀 협상을 가르킨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갈등이 시작된 중요한 사건은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주 오스만의 이름을 따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터키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터키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터키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였던 후세인 빈 알리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중략) 영국의 제안은 당시 메카의 군주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국은 후세인에게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애드워드 로렌스가 그를 도왔다."
13, 15쪽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과 후세인 지도하에 아랍 칼리프제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13쪽
영국의 위임통치 시기에 발생한 아랍인 봉기에서 정치인들의 사상은.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사상이 아닌 아랍 제국이라는 사상에 기반한다,
"아랍인 봉기에 참여한 반군한테 1930년대는 독립된 국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라기보다 사전에 계획되어 있던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막기 위해 싸우던 시기였다. 팔레스타인 국수주의, 즉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태동한다. 그 이전까지는 팔레스타인의 많은 정치인은 팔레스타인의 국경을 넘어 북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이집트까지 뻗어나가는 아랍 제국을 꿈꾸고 있었다."
36-37쪽
위와같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에 대한 사실관계는 제1차 중동전쟁에서 트란스요르단(요르단) 국왕의 목적과 관계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트란스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은 국토를 확장해 요르단이라고 국명을 개명했다. 요르단은 구시가지가 있는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국토에 합병시켰다. (중략) 요르단 국왕은 아버지 후세인 빈 알리의 큰 꿈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메카의 수장이었던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에 협조해 거대한 아랍국가 건설하려 했고, 그의 아들 대에 와서 실현되는 듯 했다."
90쪽
2)영국의 사기에 대한 잘못된 정보
영국은 약속과 달리 사기를 쳤다. 하지만 그 사기의 성격이 잘못 알려져있다. 영국이 후세인 빈 알리를 기만한 건 벨푸어 선언이 아니라 사이크스피코협정이다.
"그러나 영국은 약속과 달리 거대 왕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후세인 빈 알리는 실망했다. 그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서양에서는 그를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지방인 헤자즈의 군주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당시 반란을 도모한 후세인은 영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비밀협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그곳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토를 분할해 두 나라가 나눠 갖기로 합의를 했다. 이 협정은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이러한 비밀협정에 대해 팔레스타인들 대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5쪽
3)시온주의자들의 정착과정에 대한 오류
위의 짤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이 같은 땅을 가지고 싸운걸로 설명하고, 주인있는 집에 이사왔다는 비유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건 기본적인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에 독자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시온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중략) 시온주의자들은 '바젤 계획안'에서 그들의 목표를 구체화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이며, 신분이 보장된 조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중략)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지주들이 유대인 국가 건설을 계기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아랍인 지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국가에 팔아 이익을 보았다. 사실 영국의 엄청난 자산가 라이오넬 윌터 로스차일드가 없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많은 토지를 사들여 팔레스타인 전체 토지 가운데 6퍼센트 땅이 소유주가 바뀌었다."
21-22쪽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은 합법적으로 자본을 이용해서 아랍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구매해서 발생한 것이다. 이사로 비유하면 아랍인 건물주가 돈을 받고 유대인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위의 이사 비유는 완전히 틀렸다.
4)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쟁의 시작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은 토착민(팔레스타인)과 이주민(유대인) 사이의 갈등이라는 성격으로 시작했다. 토지를 구매해 들어온 유대인 이주민에 거부감을 느낀 무슬림들이 유대인을 공격하면서 폭력적인 분쟁이 시작됐다. (한국에선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화교를 공격한 폭동이 1927년과 1931년에 발생했고, 장제스와 중국국민당을 지지했던 평양 화교와 중국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유사하다.)
"지주의 땅을 경작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소작농들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처음 얼마간은 많은 사람이 유대인 사업체나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이때만 해도 팔레스타인의 일상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인들 사이에 별문제 없이 평화로웠다. 하지만 20세기 초 처음으로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팔레스타인의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유대인 이주민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929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헤브론에서 무슬림들이 지난 수십년간 평화롭게 살아왔던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결국 당시 식민지 위임 통치를 하고 있던 영국 행정청의 군인들이 개입했다.
22-23쪽
하지만 토착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본격적인 폭발한 원인은 따로 있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난민 문제다.
"1929년의 소요사태가 있운 지 4년이 지나자 고국을 찾아오는 유대인의 귀국 행렬이 엄청나게 늘었다. 1933년 초부터 1935년까지 유대인 13 만명이 팔레스타인을 찾아왔다. 그들 대부분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유대인들이었다.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팔레스타인행을 선택했다. 유대인 적대 행위에 맞서기 위해 독자적인 국가 건설 계획이 한 가지 이유였고, 또 다른 이유는 많은 나라가 법령을 강화하여 유대인 난민의 입국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22-23쪽
"1933년부터 시작된 대단위 유대인 난민 입국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불만히 쌓이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이나 도시에서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그 무렵 '고위 아랍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의 회원들은 더 이상의 난민 입국과 유대인에게 토지매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은 총파업을 일으키자고 팔레스타인들을 선동했다. 아랍권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24쪽
나치에 의해 유대인들은 박해와 학살을 당했고, 살기위해 난민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국가들이 유대인 난민들을 거부했다. 그 난민들이 몰려간 게 팔레스타인이었다.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은 대량의 난민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토착민들의 분노와 봉기는 이런 배경에서 발생했다.
본격적인 양측의 분쟁은 이 난민 문제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에선 이 난민 문제를 항상 누락한다.
누락하는 이유는 누구나 추측할 수 있지만 군갤에서 꺼낼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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