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는 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장제스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수도를 타이베이로 옮기게 된다.
이후 1955년이 되면 중화민국은 대만 섬을 포함한 몇 개의 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중공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 와중에도 중화민국은 중국 남동 해안가의 섬 몇 개를 사수하는데 성공했으니, 각각 진먼다오(금문도)와 마쭈(마조) 열도이다.
우리가 흔히 저 섬들을 '대만령'이라고 부르지만, 애당초 저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대만 섬으로부터 수백 km 떨어져 있고, 행정구역상으로도 대만성(省)이 아니라 복건성에 속한다.
(이 때문에 복건성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성으로 남아 있다.)
세계역사, 세계지리, 세계정치 등 인문사회학적 소양이 높은 새붕이 여러분들은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일반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저 섬의 존재에 놀라는 사람들도 많다.
하긴 나도 저 섬의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에는 정말 충격받았던 기억이 난다.
마쭈 열도도 최전방이긴 하지만 진먼이 아무래도 크기도 더 크고, 코앞에 샤먼이라는 중공의 대도시도 접하고 있고, 수 차례 포격전도 있었던 만큼 일반인에게 인지도는 더 높은 편이다.
오늘은 저 진먼다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보고자 한다.
(혼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중화민국'과 '중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대만'이라는 표현은 국명이 아니라 지역명으로 한정하여 사용한다.)
2. 역사
고대에는 오주(浯洲), 오강(浯江)라고 불렸으며, 동진 시기부터 한족이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명나라 때 홍무제의 명으로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 시설을 지으면서 현재의 명칭인 금문(金門)으로 개명되었다.
명청 교체기에는 정성공(대만에 정씨 왕국을 세운 바로 그 사람이다)이 점령하기도 했으며, 이후 중일 전쟁기에 일본군에게 점령된 적도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그냥 평범한 해안가 섬이겠지만...
1949년 국공내전 당시 중화민국 국군의 최후의 방어선이 되면서 이 섬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중공군은 당연히 이 섬을 점령하려 했으나 중화민국 국군이 고령두(古寧頭) 전투에서 승리, 상륙을 시도하던 공산당군을 격퇴하면서 중화민국의 지배가 공고해졌다.
이후 이듬해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고, 중공군이 여기에 개입하면서 '진먼 해방'은 미뤄지게 되었다.
이후 1954~1955년과 1958년 각각 두 차례의 대규모 포격전(1, 2차 대만 해협 위기)이 있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중화민국 국군이 방어에 성공했다.
(이 때 한국일보의 최병우 기자가 진먼에 가서 취재를 하다 순직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산발적인 포격이 이어져 오다 1981년 덩샤오핑이 '더 이상 무력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 후에야 완전히 포격이 멈췄다.
(진먼을 지키다 산화한 중화민국 국군 장병들을 모신 태무산 충렬사. 이곳에 최병우 기자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그러다 1980년대 말에 중공이 개방을 하면서 대륙의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소삼통 정책이 실시되면서 샤먼과 직접적인 통상, 통항, 통신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소삼통 정책의 책임자가 바로 지금 중화민국 총통인 차이잉원인데, 비록 온건파기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대만 독립 성향인 지금의 그녀와는 달리 저 당시의 차이잉원은 '양안 통일은 역사의 필연'이라고 믿는 통일론자였다.)
사실 1995~1996년에도 한 번의 위기가 있긴 했다(3차 대만 해협 위기).
당시 총통이었던 리덩후이는 실용외교 정책을 통해 중화민국의 대외 관계를 열심히 관리하고 있었고 나름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는데, 특히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불쾌하게 여긴 중공 측에서 1996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를 앞두고 진먼 인근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는 등 무력 시위를 했고, 당연히 중화민국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으며 미국도 중화민국을 도울 제스처를 취했다.
이 당시 중화민국 전국에 준전시태세가 발령되었으며 진먼 등 전방 지역에는 1급 전쟁대비 태세가 하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대치가 오히려 리덩후이의 인기를 높여 주었고, 총통 선거 및 입법위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하자 제대로 체면을 구긴 중공은 진먼 부근의 병력을 철수시킴으로써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3. 지리
진먼현의 면적은 울릉도의 2배 정도 되고, 인구는 약 14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위장전입 인구가 많아 실거주 인구는 10만명 정도라고 한다.
3진 3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진은 읍, 향은 면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례위향(샤오진먼 섬)과 진먼 본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중공의 샤먼과는 불과 1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샤먼과도 다리로 연결하려는 계획이 있기는 하나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이 안 되고 있다.
4. 산업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술이다.
금문고량주가 바로 이곳에서 생산된다.
진먼에 가보면 곳곳에 수수밭이 있는데, 이 수수(고량)와 화강암반에 걸러진 진먼의 질 좋은 지하수로 담근 술이다.
58도라는 도수가 흠칫한데, 과거 군인들이 포격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자 적은 양으로도 빨리 취하게끔 도수를 높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거기에 1958년 있었던 진먼 포격전(2차 대만 해협 위기)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58도로 도수를 맞췄다고 한다.
그 외에 수수를 먹고 자란 소고기가 유명하며, 굴, 공탕(땅콩 사탕과자), 식칼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웬 식칼이냐 싶겠는데, 중공군이 떨군 포탄을 녹여 식칼을 만드는데 질이 상당히 좋다고 한다.
그리고 중공 관광객들은 그걸 또 좋다고 사 간단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시골인데다 면적도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보니 공업은 한계가 있고, 주요 산업은 농어업과 관광업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이지만 대만과 대륙에서는 나름 유명한 관광지다.
청나라 시절에 지어진 복건식 건물뿐만 아니라 19세기에 귀국한 동남아 화교들이 중국 전통건축과 서양식 건축을 절충시켜 지은 건물도 많다.
(대충 이런 식이다.)
물론 최전방이다 보니 안보관광 쪽으로도 볼거리가 많다.
다만 개방되지 않은 군사시설에 들어가면 코로 우육면을 먹을 수 있으니 주의하자.
(진먼은 섬 전체가 요새화되어 있어 큰 배가 상륙할 수 없었는데, 이 때문에 군함에서 바다와 연결된 땅굴로 수륙양용정을 보내는 식으로 보급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도 섬 안에 이렇게 호수라든가 경치 좋은 곳이 많아 자연 풍경을 즐기기에도 나쁘지 않다.
실제로 섬에 수달, 야생조류, 투구게, 유공충 등이 산다고 한다.
한국에서 진먼으로 가려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비행기를 타고 타이베이, 타이중, 가오슝으로 가서 진먼 공항으로 가는 국내선으로 환승하는 방법이다.
다만 비행편이 가장 많은 타이베이 타오위안 국제공항은 국제선 전용이기 때문에 타이베이 시내에 있는 쑹산공항으로 이동해야 한다.
(김포에서 쑹산으로 가는 직항이 있긴 하다.)
(타오위안과 쑹산은 각각 인천과 김포, 나리타와 하네다와 비슷하다.)
두 번째는 인천에서 중공 땅인 샤먼으로 비행기를 타고 간 다음, 샤먼 우통항에서 진먼으로 가는 배를 타는 방법이다.
이렇게 할 경우 샤먼이 경유지로 인정이 되어, 샤먼에 72시간 동안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다.
(다만 중공 입국 시에 미리 예약해 놓은 샤먼->진먼 배 표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게 중국어 못하는 사람이 예매하기 상당히 빡세다...)
진먼 관광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대만 혹은 대륙에서 왔다 보니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시골이다 보니 대중교통도 영 좋지 않다...
관광지 셔틀 버스도 하루에 한두번이 끝이라 제대로 다니려면 택시투어나 렌트카를 해야 한다.
필자는 전동스쿠터를 빌려서 다녔다.
5. 정치성향
이곳은 애당초 대만이 아니다 보니, 대만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현 집권여당인 민주진보당과 사이가 좋지 않다.
이 때문에 매번 선거에서 중국국민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 주고 있었으나...
2014년 그리고 2022년 지방선거에서는 국민당이 현장을 내는 데 실패했다(2014년에는 친민당, 2022년에는 무소속->대만민중당).
그래도 2022년에는 민진당에서 현의회 의원을 한 명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아무래도 대만에서 진먼으로 넘어오는 사람도 있고, 지나치게 친중공적인 국민당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도 있다 보니 진먼 주민들도 예전만큼 국민당에 몰표를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중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양안간 교류 확대에도 호의적이다 보니 차이잉원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영 좋지 못하다.
게다가 다음 달... 아니 이번 달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라이칭더가 당선이 유력하다 보니 이런 불편한 동거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복건성 고등검찰서 진먼현 검찰분국. 진먼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복건'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화민국이 사실상 '대만 공화국'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진먼 주민들은 그들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중화민국이 대륙을 잃은 지 몇십 년이 지났다.
여전히 진먼인, 복건인,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고수하는 주민들도 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인정하는 주민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현지인들과 대화해 보면 자국을 '대만'이라 부르지 않고 '우리 나라'라고 애매하게 말하거나, '대만'을 지역으로 가리키거나, '진먼 그리고 대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의 모습은 볼 수 있다.
6. 제2의 진먼이 될 뻔했던 곳
첫 번째는 하이난 섬이다.
광동성 아래쪽에 있는 그 큰 섬 맞다.
1950년까지 중화민국 국군이 지키고 있었으나, 중공군이 어선 수백 척을 징발하여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 성공하여 중공에게 그대로 넘어갔다.
대륙과 더 가깝기도 하고, 반대로 대만에서는 거리가 멀어 방어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절강성의 다천 군도다.
1차 대만해협 위기 당시, 미국의 도움을 받은 중화민국 국군이 진먼과 마쭈는 방어에 성공했으나 저곳은 대만에서 너무 멀어서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
결국 1955년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남아 있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다천 군도에서 직접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내리면서 중화민국 절강성 정부는 폐지되었다.
위치도 위치거니와 절강성은 장제스의 고향인 만큼, 중화민국이 저곳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면 여러 모로 의미가 컸을 것이다.
7. 영화
냉전시대 당시의 진먼은 10만 대군이 주둔한 곳이었다.
기열찐빠 새끼들이 하라는 전우애는 안 나누고 멀쩡한 민간인을 덮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는데, 엄벌을 해도 사고가 끊이질 않자 군 당국은 섬에 공창을 운영하는 식으로 해결을 했다(...)
원래 그렇고 그런 일을 하던 여자도 있었지만 감형을 조건으로 일하게 된 여성 죄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바로 '군중낙원'인데, 실제로 진먼에서 촬영을 했다.
필자가 진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영화였는데, 나중에 영화에 나온 장소들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그거랑 별개로 영화 자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8. 닫는 글
한때는 양안관계, 나아가 냉전의 최전선이었지만 지금의 진먼은 대륙에서 오는 수돗물을 마시고, 대륙에서 오는 관광객들이 쓰는 돈으로 살아가는 평화로운(?) 섬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미쳐 돌아가고 있고, 시진핑핑이는 틈만 나면 '대만 해방'을 외치고 있다.
만약 다음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다면 상황은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일은 정말로 없어야겠지만 양측 간 전면전이 발발한다면 중공군이 대만 본섬에 상륙할 수 있을지 여부는 잘 모르겠으나, 진먼은 오래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기면, 진먼 주민들은 최후의 한 명까지 중공군에 맞서 싸울까, 아니면 '같은 중국인'인 그들을 해방자로 여겨 환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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