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동아대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동아대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서울시 의원 저출산 극복 댄스 ㅋㅋㅋㅋ 야갤러
- 부산 부탄가스 연쇄 폭발 차량 10대 불타 ㅇㅇ
- "의류 수거함"의 비밀.jpg ㅇㅇ
- 배우 '수현'이 역할을 위해 특수분장을 하는 과정.jpg ㅇㅇ
- 개혁신당 이기인 최고의원 "훈련이 아닌 가혹행위, 고문치사..." 야떡이
- 빅뱅 컴백할수도있다는 대성...jpg 설윤아기
- 나라가 이게 맞냐? ㅇㅇ
- 변기 물 내릴 때, 뚜껑을 안 닫으면 벌어지는 일.jpg ㅇㅇ
- 국방부, 북한 풍선에서 바이러스 발견, 촉수엄금 ㅇㅇ
- 트럼프 성관계 입막음 혐의 34개 모두 유죄 함안함
- [함자 썰만화] 스페인에서 미국인들이랑 클럽간 썰 (2) 헬구리
- 대형로펌 현직 변호사가 말하는 한국 대형로펌 연봉 유갤러
- 본격화된 중국의 대만 점령 작전, 한국에 파장은? 라이스
- 온세상이 벚꽃이다 CANU
- [여행] 중국과 한국을 잘 쓰까보자 장비그래퍼
아내? 엄마? 누가 바람피웠나? 장장 18년 고부 멸망전
오늘은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고부갈등 사례 중 하나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노씨와 서씨 이들은 노씨의 친정집에서 동거를 하던 어린 커플이었다.이들은 사실혼 관계의 부부였지만, 노씨의 나이가 18살 이었기 때문에, 잠시 혼인신고와 결혼식을 미뤄두었다고 한다.그런데 그새를 못참고 사건이 터져버린 것.1997년, 아이가 태어나기 두달전, 남편이 자전거로 일을 나가다 교통사고로 사망해버리고 만다.사고로 사망했으니 보험금이 나왔는데, 문제는 사실혼 관계이니 상속권이 없고, 자식이 되는 아이가 1순위가 된것.여기서 시어머니가 '저 아이는 내 아들의 애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결국 하고 싶은 말은 여자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친가는 교통사고사망보험금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절대 우리 아들 자식이 아니라는 시어머니어머 그럼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다는 건가요?친자확인을 둘러싼 고부갈등, 시어머니와 며느리, 친가와 외가, 서울대와 민간기관이 엮인 18년 간의 멸망전이 막을 올린다.1심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은 이 소송에서 시어머니측에게 친자검사 의뢰를 받는다.문제는 할아버지는 10년전 매장해서 검사가 안되고,아버지는 화장을 해버려서 잿가루가 됐으니 부계 친자 검사가 안되는 상황.이에 서울대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유전자를 검사한다.바로 남편의 어머니, 그리고 남편의 세명의 남자형제들, 즉 아이에게는 삼촌들에게서 모두 유전자를 체쥐해 종합적인친자확인을 하는 것.결과 : 친자가 아니다.이에 따라 1심 재판부 결과는 친가측, 그리고 시어머니의 승으로 결론난다.1차전 : 어머니 승항소하지만 여기에서 다시, 이번에는 아이디진 이라는 민간 유전자 감식 기관이 참전하게 된다.외가측에서 940만원을 주고 의뢰한 것.아이디진은 서울대와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는데, 삼촌들과 대조하는 것이 아닌, 시어머니의 x염색체와 그 손녀의 x염색체를 대조한 것.그 결과아이디진 감정 결과는 서울대와 반대로 친자가 맞다고 나오면서 사건이 복잡해진다.하지만 이러한 아이디진의 방법은 당시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이에 고등법원은 검증되지 않은 방법이라며 아이디진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항소를 기각한다.2차전 : 시어머니 승리상고심고등법원의 기각에 아이디진은 '검사의 과학적 합리성이 아닌 검사방법이 처음이라고 무시하는게 말이되냐'며 반발했다.서울대학교의 검사결과는 전제가있다. 바로 아이와 대조한 세 삼촌이 모두 할아버지의 자식이어야 된다는 것.세명의 삼촌이 모두 양가 부모가 같지 않다면, 이들을 유전자형 26개를 조합해 대조한 결과는 아이와 다르다고 나올 수 밖에 없다.서울대 측의 전제가 틀렸다는 말인즉슨, 시어머니의 세 삼촌은, 최소한 한명은 시어머니와 남편(아이에게는 할아버지) 사이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여기서 이 싸움은 이제 단순한 고부갈등이나 유산문제를 넘어'시어머니의 자식 중 최소한 한명은 남편의 자식이 아니다' vs '며느리의 자식은 남편의 자식이 아니다'이렇게 되면서 양가의 자존심과 목숨을건 멸망전이 돼버린다.발을 빼는 서울대.삼촌들이 친자가 아니면 검사자체가 성립 안되는 것.그리고 소송이 시작된지 7년 후, 대법원 결과가 나왔다.상고심에서 파기환송이 된것. 대법원은 1심, 2심판결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에 다시 돌려보낸다.그 후로 6년, 고등법원은 '이 사건에 처음 시도된 방법이긴 하나, 이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라고 하며 결국 아이는 19살이 되어 자신이 태어난지 두달전 사망한 아버지의 친자로 판명되었다.결론외도 누명을 벗은 아내는 외가 전체가 그 소송에 휘말려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그녀는 소송에 휘말린 이후 신내림을 받아 무속인이 되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접고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으며, 집밖으로 잘 나오지도 못하는 상태.친가측도 상태가 안좋았다. 사망한 남편의 보험금으로 사업을 했던 둘째형은 이미 췌장암으로 사망,당초 친자 의혹을 제기했던 시어머니도 당뇨, 암, 신부전 등으로 다리까지 잘라낸 상태라고.결국 18년에 걸친 양가의 싸움은 양쪽 다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과연 남편이자 아들이었던 서씨가 하늘에서 이 싸움을 봤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작성자 : ㅁㅇㄹ고정닉
영국군으로 복무한 홍콩인들
홍콩 군사복무단 Hong Kong Military Service Corps (HKMSC, 香港軍事服務團) 중국인들이 영국군에 복무한 역사는 꽤 오래됐다. 1857년 2차 아편전쟁 당시,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인도인 병사들에 대한 불신도가 높아진 영국 원정군이 광둥성에 살던 객가인들을 쿨리로 고용하여 병참부대를 운영했던 것이 시초다. 2차세계대전 때는 수백명의 홍콩인들이 영국군에 협조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일부는 말레이 반도와 버마까지 가서 싸웠다.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냉전이 시작됐을 때, 영국은 더 이상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니었다. 전후복구 때문에 군축은 확정됐고 그동안 키워온 군사력은 줄어들었다. 그 많던 식민지들은 하나둘 씩 독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동의 진주인 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령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중국대륙이 공산화될 것이 확실시되자, 영국 정부는 홍콩방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 현지 중국인들을 모병하여 전투부대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고, 이것이 HKMSC의 시작이었다.홍콩 영주권이 있는 홍콩인들은 누구나 입대신청이 가능했다. 18주의 훈련기간을 거쳐 '대영제국의 군인'이 되는 순간부터 4년 의무복무를 해야했다. 장기신청으로 최대 22년까지 복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구르카처럼 단일부대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카투사처럼 홍콩 주둔 영국군 각부대에 소대 단위로 배치됐다. 광둥어와 영어가 능통했던 HKMSC 대원들은 영국군이 현지인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소요사태가 많았던 50~60년대에는 HKMSC는 홍콩주둔 영국군의 귀중한 인재풀이었다.1960년대 HKMSC의 총 병력은 약 6,000명에 달했다. (주: 참고로 당시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최대 4~6만명에 달했다.) 이후 중공과의 화해무드가 진전되자 홍콩주둔 영국군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고 HKMSC의 인원수도 조금씩 축소됐다. 이후 70년대를 거쳐 HKMSC 부대규모는 1,500~1,600명 가량으로 고정됐다.HKMSC는 당대 홍콩경제 수준에 비해 매우 좋은 조건의 직장이었다. 일단 병사들의 월급은 홍콩인들의 평균월급보다 30~40% 더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70년대에 입대한 한 기수는 18주의 훈련을 견디다 못해 일부 훈련병들이 첫휴가 때 나가서 복귀하지 말자고 모의를 했었다. 하지만 수료식과 함께 받게 된 첫 월급봉투에 담김 480 홍콩달러(주: 당시 홍콩 사회초년생의 평균월급이 350 홍콩달러.)를 보고선 'God save the Queen!'을 연창하며 유니언잭에 대한 충성심이 폭발했다고 한다.게다가 홍콩인들에게 영국군의 이미지는 엘리트집단이라는 의식이 강했다.(주: 반대로 홍콩경찰은 부패문제로 인해 인식이 좋지 않았다.) 군병원의 복지수준도 민간병원보다 훨씬 좋았다. HKMSC 전역자들은 금융권 보안업계에서 0순위 스카웃 대상이었다.하지만 이와 다르게 인지도와 입대 경쟁률은 생각보다 낮았다고 한다. 일단 홍콩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계 인구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다. 많은 중국인들은 자녀들이 군인이 되기 보다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길 원했다. 과거 그들이 보아온 군인들, 청나라나 내전기 군벌들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였다. 그들의 눈에 군인이란 사람이 할 짓이 못됐다.그리고 높은 수준의 영어실력도 필요했다. 영국군은 구르카병들에게는 명령을 이해하는 최소한의 문해력만 요구했으나, 현지 통역이 주임무였던 HKMSC 대원들에게는 중급 이상의 언어구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HKMSC 입대 자원자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영어성적이 높은 이들로 이뤄져 있었다. 보통 이정도 영어실력을 가진 홍콩인들은 금융권 같은 화이트칼라 직업군으로 갔다. 당시 학교 선생들은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취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차선책으로 HKMSC에 입대하는 것을 권하곤 했다.HKMSC에 문제가 있다면 훈련시절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홍콩이 워낙 좁아서 군인프라 시설을 많이 확충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HKMSC대원들은 상당수의 주특기 훈련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까지 날아가서 교육 받고 왔다. 일부 성적 우수생들은 사관후보생이 되어 샌드허스트 단기입교 기회도 받았다. 헌병대의 경우 런던 경시청에서, 의무 주특기들의 경우 런던 의과대에서 부검을 실습했다. HKMSC는 홍콩방위 뿐만 아니라 1990년 걸프전에도 영국군 소속으로 소수가 참전했고 키프로스에 PKO 활동을 하러 가기도 했다. HKMSC에 입대한 대부분의 홍콩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복무했다. 영국군 내부에서도 HKMSC에 대한 평판은 꽤 좋은 수준이었다.HKMSC는 1993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새로운 기수를 받지 않았다. 1997년 홍콩반환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이 되자 HKMSC는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일부 대원들은 다른 영국군 부대에 개별로 복무하였으나 이들 역시 1997년 6월 30일, 홍콩주둔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전부 전역처리 됐다.당시 HKMSC 전우회는 영국법원에 자신들도 구르카병들처럼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마지막 홍콩 총독이었던 크리스토퍼 패튼도 영국의회에서 '이들도 대영제국에 충성을 바친 이들이니 부디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국적 선발제도(BNSS)에 따라 HKMSC 전역자들 대부분은 이 국적취득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1997년 당해 영국국적을 취득한 HKMSC 전역자들은 15년 이상 복무했던 노병 159명 뿐이었다. 이후로 약 10여년에 걸쳐 HKMSC 전우회는 지속적으로 HKMSC 전역자들의 영국국적 취득 캠페인을 펼쳤다. 하지만 2019년까지 고작 350여명만이 영국 여권을 발급받았을 뿐이었다. 이후 홍콩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영국정부가 이민법을 파격적으로 개정하여 홍콩인들이 영국국적을 취득하는 절차를 간소화해주면서 HKMSC 재향군인들도 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날이 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많은 재향군인들이 세상을 떠났고 상당수는 호주나 캐나다, 뉴질랜드 같은 다른 영연방 국가로 이민을 떠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에서 HKMSC 흔적은 점차 사라져갔다. 이들이 쓰던 부대병영은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은 HKMSC 전우회 말고는 아무 곳에도 없다. 이들의 경력은 현재 중국에서 제대로 된 군복무로 취급되지 않는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