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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플] 애가(愛歌) _ 43~44 _수정본

..(118.42) 2021.05.18 01:46:28
조회 455 추천 26 댓글 7



- 마흔 세 번째 이야기




“언니... 한 푼만 도와주시어요.”


여덟이나 되었으려나...

다카하시와 서희의 뒤를 따르던 유라 옆으로 여자아이 하나가 다가와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 아이의 등장에 유라는 이윤이 전언이 떠올라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했다.

이런 험한 일에 이 작은 아이를 끌어들이다니,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유라가 코트 주머니에서 댕기를 꺼내 아이의 머리에 묶어주었다.

손이 달달 떨려 그 짧은 시간이 제 인생 전부를 통틀어 가장 더디게 흐른다고 느껴진 시간이었다.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하구나.”

“이거면 되었어요.”


아이가 웃으며 제 갈 곳으로 뛰어갔다.

멀거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섰는데, 서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라야, 잘 따라오고 있는 거니?”

“네. 지금 가요.”


서희는 다카하시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질 새라 그의 손을 꼭 붙들고 그 옆에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어쩌면 제 위협에서 그를 지켜보려는 소심한 행동이 아닐까. 그래서 마뜩찮았다.

저 사내 하나 때문에 서희는 예기의 자존심을 잊었고,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던 저와 주승은 모두 찢어져 가족도 아니고 뭣도 아닌 채로 살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다카하시의 서늘한 눈빛이 저를 향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어쩌면 사토상이 제 짐을 가지고 먼저 선착장으로 간 것이 참으로 다행인 일인지도 몰랐다.

바로 옆에서 걷는 사토상의 눈을 속이는 것보다 항시 서희에게 시선이 닿아 있는 다카하시의 눈을 속이는 것이 더 쉬울 테니.


유라는 이제 더 이상 갈등하지 않았다. 이미 시작된 비극이었다.

그녀는 이제나저제나 제 손에 쥐어질 단도를 기다리며 금방이라도 풀려버릴 것만 같은 다리에 힘을 주어 걸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찌든 담배 냄새에 눈살이 찌푸려졌을 때, 제 손 안으로 무언가 신문지에 싸여 건네짐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자, 모자를 쓴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그녀가 기다리던 것이 맞음을 확인시켜줬다.

유라는 그 남자가 전한 것을 손에 꼭 쥐었고, 고개를 돌려 앞을 걷고 있는 다카하시를 향했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다리가 풀려 쓰러지더라도 저 놈에게 반드시 칼을 꽂으리라.

유라가 이를 악물고 신문지를 펴서 단도를 꺼내 드는 그 때, 누군가의 손이 유라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주승 오라버니...”

“안 돼, 유라야. 안될 일이다!”


퀭한 그의 눈이 어떤 의지로 번뜩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주승은 제가 저지를 일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몰골을 하고 힘에 부쳐 비척거리면서도 자신의 손에 들린 단도를 기어이 빼앗아 들려했다.


“아니, 난 할 거여요. 저 짐승 같은 놈에게서 언니를, 반드시!”


유라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 단도를 빼앗으려는 주승의 팔을 이로 악 물었다.

주승의 얼굴이 아픔에 일그러지며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풀렸다.

그녀의 놓친 손목을 다시 잡으려 팔을 뻗던 주승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유라가 무심코 휘두른 단도에 의해 팔이 깊게 베였다.


“허억!”


이를 아는지 모르는 지 유라는 다카하시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유라야, 안 돼! 안 된다!”


주승이 유라를 부르는 소리에 서희와 다카하시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서희는 자신이 우려하던 상황이 비로소 도래하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유라야...”


저를 애절하게 부르는 서희의 목소리에 유라의 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그 뿐, 다카하시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단도를 든 손을 치켜들었다.

서희가 이상을 감지하고 다카하시를 제 뒤로 밀어내고 그의 앞으로 나서며 유라를 막아섰다.

그녀의 움직임을 미처 예측 못한 유라의 칼끝이 날카롭게 서희에게로 향했다.


『으읏...』


그녀의 얼굴에 칼끝이 닿기 직전 다카하시가 대뜸 손을 뻗어 단도의 날을 움켜쥐었다.

하마터면 서희의 얼굴을 그어버릴 뻔했음을 뒤늦게 자각한 유라가 손잡이를 놓았고, 단도는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보 같긴... 네가 뭔데 끼어들어?』

『괜... 찮아요?』

『뭐, 그렇지.』


다카하시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칼에 베여 피가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사시나무 떨듯 하며 서 있는 유라를 쳐다봤다.

유라가 그의 매서운 눈빛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렇게 이 사단이 끝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딘가에서부터 탕- 탕- 두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허억!!!』


고통에 신음하는 목소리와 함께 묵직한 다카하시의 몸이 서희에게로 기울어 왔다.

서희가 다급하게 몸을 돌려 그를 안아 추슬렀지만, 끝내 버틸 힘이 없던 그녀는 다카하시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일대는 두 발의 총성으로 아비규환이 되었고, 사람들은 갑작스런 소란에 죽을힘을 다해 안전한 곳을 찾아 움직였다.

서희가 다카하시의 팔을 붙들어 흔들며 그를 불렀다.


『렌... 렌!』

『그래, 오서희...』


자신을 찾는 서희의 목소리에 그가 힘겹게 답을 했다.

고통이 묻어나는 그 목소리에 서희가 기겁하며 손으로 그의 몸을 더듬거렸다.

어깨 부근에서 자켓까지 스며든 피가 축축하게 만져졌다.


“하...!”


그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서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온 힘을 다해 그를 일으켜 병원으로 가려 했지만, 그때 또 한 번의 소동이 일며 힘없이 다시 주저앉았다.


역 인근의 일본 은행과 경찰서에서 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졌고,

그 소리는 총성과는 다른 규모의 소리로 그 곳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이제껏 겪어본 적이 없는 수많은 소리들이 뒤섞여 웅웅거리며 현기증이 났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서희가 다카하시와 함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전보를 받자마자 역으로 달려간 이혁은 최대한 빠른 열차를 타고 제물포역에 도착했다.

다카하시를 찾으라는 주승의 말에 잠시 의문을 가졌으나, 역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역 주변에는 평소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일본 군인들이 있었다.

우려하던 사단이 이미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이혁이 역을 빠져나가는 인파들을 상대로 검문을 하고 있는 헌병에게 다가가 다급하게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조선인이 일본인 관료를 죽이려 했소.』

『그 일본인 관료가 누굽니까? 많이 다쳤습니까?』


헌병이 이혁의 위아래를 천천히 훑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그걸, 왜 묻는 거지?』


『저는 개성에 본사를 두고 있는 대동실업 사장입니다.

사업상 다카하시상을 만나러 왔는데, 혹시나 하여 묻는 겁니다.』


『당신이 찾는 다카하시상이 그가 맞다면, 지금 군병원에 있소.』


『고맙..습니다.』


이혁이 헌병에게서 돌아서서 역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인력거꾼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철퍼덕 앉아있던 인력거꾼이 그를 보고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요?”

“일본군 병원으로 가지.”

“아까 그 소란에 아는 이라도 다친 모양이시군요.”


이혁이 인력거에 올라 사내에게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물었다.


“일본인 사내를 죽이려던 조선인은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짐작은 갑니다만, 확실하지 않아서 말입니다요.

답례를 조금 주시면,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병원에서 일을 보고 기다릴 테니 알아봐 주게.

자네가 알아온 정보가 확실하다면, 50원을 주도록 하지.

단, 나에 대해서나 이 일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거참, 당연한 말씀을. 50원이면 쌀 세가마니에 비견할 돈인데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요.”


인력거꾼이 예상 밖의 벌이에 얼굴이 싱글벙글하여 이혁을 태우고 군병원으로 향했다.

그와는 반대로 이혁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는 주승부터 이 사단의 시작점인 유라, 그리고 누구보다 이 일에 자책하고 있을 서희까지.

어느 누구하나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이혁은 가슴이 답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헌병의 말에서 알 수 있는 다카하시의 상태였다.






까다로운 수술을 끝낸 다카하시가 병실로 옮겨진 지 이각(3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병실 앞 복도엔 서희가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그가 수술실에 있는 내내 얼마나 자신을 자책하며 두려움에 눈물을 흘려댔던지 눈물 자욱이 여전했다.


다카하시는 유라에 비견하여 잘 훈련된 건장한 사내였기에 매번 제 염려의 대상은 그보다는 유라였다.

그런데, 총이라니. 그렇게 커보였던 다카하시도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아직도 그 때의 상황만 생각하면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일전에 있었던 다카하시상의 분부대로 유라양은 바로 일본으로 보내질 겁니다.’


다카하시는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사토상에게 언질을 주었던 걸까.

그리고 총이 조준된 방향에 다카하시가 있었던 건 과연 우연일까.

서희는 자책과 회한의 감정으로 혼란스러웠다.


그 때, 문이 열리고 병원장과 함께 다카하시의 담당 의사와 간호사, 사토상이 복도로 나왔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한동안은 여러모로 불편하겠지만,

수술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됐고 마취도 곧 풀 릴 테니 총상을 입은 것 치고는 천만다행인 것이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병원장과 일행이 의자에서 막 일어선 서희를 힐끔 보더니, 이내 제 길로 걸음을 옮겼다.

사토상이 서희에게 다가왔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직 의식은 없으시지만, 아가씨께서 옆에 계신 것이 위안이 되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사토상...』


사토상이 서희로 하여금 제 팔을 잡도록 하고 병실 안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의 배려에 서희는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섰고, 병상 옆 의자에 앉았다.


『저는 강주승의 일로 경찰서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주승인... 괜찮을까요?』


『유라양을 본국으로 빼돌렸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하지만, 도련님 나름의 생각도 있으실 테고,

이혁 사장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줄곧 강주승의 뒤를 봐주고 있는 듯하니 최악의 상황으로 가진 않을 겁니다.』


『하... 모두 다 내 잘못이에요.』


『모두라고 하면 그건 비약이겠지만,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도련님도 그렇지만 본가에 이 일이 알려졌을 테니, 일이 더 복잡해지겠지요.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사토상이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다카하시와 서희만이 남은 병실엔 적막이 흘렀다.


『렌...』


서희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가 제게 대답을 하는 데까진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으로 볼 수 없어 그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두려움만 앞섰다.


서희가 손을 뻗어 병상 위를 더듬거렸다.

매번 매 순간 저에게 뜨겁게 와 닿았던 그의 손이 불안이 극에 달한 지금 이 순간 간절했다.

그녀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서희의 손끝에 그의 손이 닿았다.

붕대가 칭칭 감겨진 그의 손이 서희의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미안해요. 내가 나빴어...』


결국, 참다못한 눈물이 눈에서 투둑- 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마흔 네 번째 이야기




오서희... 서희야.


칼에 베이고 총알이 스치며 낸 생채기로 온 몸이 찢기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기억 속에서 놓지 않으려 애쓰던 이름이었다.

겪어본 적 없는 극한의 통증에 의식이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내내 얼마나 불러댔는지 모를 이름이었다.


다카하시는 몇 번이고 무의식의 꿈속 아무도 없이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인 방에서 혼자 깨어났다.

서희의 이름을 부르며 방을 뛰쳐나가 적막한 집안 곳곳을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그를 찾아온 건 지독한 상실감과 고독뿐이었다.

마치 그녀를 알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끊임없이 서희를 찾아 헤매도 결국은 같은 자리만 맴돌 뿐인 끔찍한 악몽이었다.


『으으...』


겨우 무의식을 벗어나 의식 속으로 되돌아오자 맨 처음 그가 겪어야 했던 건 여전히 남아있는 통증이었다.

하지만, 그 통증 속에서도 가물거리는 시야로 집요하게 그녀를 찾았다.


오서희...


서희가 제 손을 꼭 붙들고 병상 위에 엎드러져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비록 그들 때문에 자신을 버렸지만 또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안심이 되자, 다카하시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정확히 이틀 후, 병원장의 허락을 받아 다카하시는 서희, 사토상과 함께 경성의 제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그는 사토상의 도움을 받으며 거실로 들어섰고, 소파에 앉았다.


『추워...』

『가서 따뜻한 차를 좀 내오겠습니다.』


사토상이 다카하시 앞에서 물러나 부엌으로 사라졌다.

거실 중앙에 멀거니 서 있던 서희가 제 코트를 벗어 손에 들더니, 거리를 가늠해 한 발 한 발 내딛어 소파 앞으로 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내려 반쯤 일어나 앉아 손을 뻗어 다카하시를 찾았다.

춥다는 그의 말이 신경 쓰였던지 서희가 그의 어깨에 자신의 코트를 둘러주었다.

그녀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다카하시가 원망의 감정이 섞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리 치워.』

『춥다면서요.』


서희가 치워줄 생각을 안 하자, 다카하시가 제 손으로 코트를 잡아내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직도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상태라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

『렌, 괜찮아요?』


서희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자, 다카하시가 그 마저도 통증 따위 아랑 곳 않고 쳐냈다.


『가증스러우니까 안쓰러운 척 하지 마. 미안해 할 필요도 없어. 넌 언제나, 난 안중에도 없었잖아.』


『렌...』


서희는 짐작하고 있던 그의 속내를 귀로 직접 듣자 제 마음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아팠다. 하지만... 그는 이보다 더 아팠을 테니 할 말이 없었다.


『넌 그 아일 보호하려고, 내겐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지. 날 서방님이라고 불러줬던 건 그저 강요에 의한 억지였던 거야.』


『변명 같겠지만, 당신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그래. 네 머릿속에 나도 있었겠지. 하지만 결국, 내가 너한테 우선은 아니었어.』


자신은 왜, 그가 이 모든 것을 끝까지 모를 거라 생각했던 걸까.

왠지 모를 두려움에 바르르 떨리는 제 손을 감추려 서희가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카하시가 그녀의 부들거리는 주먹에 시선을 두고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이를 미리 알렸다면, 유라는 무사했을까요?』


『내가 그 아일 죽이기라도 할 거라 생각한 거야? 너한테 그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데도, 내가? 하... 오서희.』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보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거겠지.』

『렌...』


『혹시라도, 어쩌면 말이야... 날 죽여주길 내심 바랐던 거 아니야?』


『절대 아니에요. 렌, 정말이에요.』


서희가 그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고 다카하시의 팔을 붙들었다.

어느 덧 눈가엔 촉촉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제 팔을 있는 힘껏 붙든 그녀의 손을 그가 차갑게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날 위해 강주승을 포기할지, 아니면 그를 위해 끝까지 날 하찮은 존재로 만들지.

   오서희, 항상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는 없어. 언젠가 반드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오지.』


『렌, 나는...』

『너한테 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 때, 집 앞으로 차가 들어와 서는 소리가 들렸다.

사토상이 들고 나오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현관 밖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누가 온 모양이었다.

다카하시는 그가 누군지 짐작을 하고 있다는 듯 태연했지만,

서희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의 팔을 붙들었던 손을 조용히 거둘 뿐이었다.



사토상이 큰 여행 가방을 들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로 화려한 양장 차림의 여성이 들어섰다.

밖에서 들려왔던 구두 소리와 낯선 향수 냄새에 서희가 긴장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현기증이 일어 휘청거렸지만, 곧 허리를 바로 세웠다.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다카하시상의 회복을 도울 엔도 나나코입니다.』


그녀의 향수에서 느껴진 것과 마찬가지로 말투에서 또한 신여성다운 자신감이 묻어났다.

엔도와의 첫 대면에 안 그래도 위축돼 있던 서희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사토상만으로는 도저히 안됐던 걸까. 낯선 여자의 등장에 서희는 무언의 위협을 느끼며 긴장했다.



사토상이 일을 끝내고 거처로 돌아가면 늘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되곤 했던 저택에 이제는 엔도상이 있었다.

서희는 자신이 다카하시에게 해줄 수 없는 것을 그녀가 해주고 있으니 마땅히 고마워해야 한다고 마음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도무지 마음 한 구석의 불편함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실에 든 다카하시가 옆에 있는 서희가 아닌 의자에 앉아 책을 보던 엔도에게 말을 건넸다.


『목욕을 해야겠으니, 준비해주지.』

『네, 다카하시상.』


엔도가 책을 덮고 의자에서 일어나 침실 밖으로 나갔다.

서희는 다카하시가 혼자서 목욕을 하다 다치지는 않을까 싶어 염려스러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목욕은 내일 사토상이 오면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찝찝해.』

『하지만, 혼자 목욕하다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나나코가 있잖아.』

『나나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서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를 나나코라 부르는 것도,

타인이면서 여인인 그녀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하려는 것도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다카하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제 마음에 비수처럼 다가와 찔러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엔도상은...』


『오서희... 무슨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럼, 앞이 보이지 않는 너를 의지해 내가 목욕을 해야 할까? 둘 다 같이 다치지 말란 법도 없을 텐데.』


서희의 두 입술이 굳게 다물려 더는 열리지 않았다.

다카하시가 조용히 제 옆에 돌아눕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마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생각이 오갈 터였다.


『다카하시상, 목욕물이 준비되었으니 제가 도와 드릴게요.』


어느 새, 엔도가 다가와 다카하시의 팔을 붙들어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유카타로 갈아입은 그녀는 요염함을 풍기며 노골적으로 다카하시에게 몸을 붙여왔다.

때문에 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굳이 입 밖으로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다.



다카하시가 엔도와 함께 침실을 나가자, 서희가 속이 타는 듯해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이번 일로, 그에게 남은 자신에 대한 감정이 모두 원망뿐인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엔도는 일본인이고 기생 따위 보다야 나은 신분일 테니, 다카하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실로 앉힐 수도 있을 터였다.


“하아...”


짙은 한숨과 함께 눈물이 눈가에 팽 돌았다. 이렇게 결국, 엄마의 운명을 닮고야 마는 걸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 바닥에 발을 디디고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뻗어 벽의 위치를 가늠하고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벽을 더듬으며 내딛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다카하시와 엔도가 함께 있는 욕실로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제 안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잘못으로 화가 났을지언정 사랑이 식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믿을 수 있길 바랐다.



욕실과 가까워질수록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벽을 짚지 않는 다른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더니 서희의 가슴 부근에서 멈췄다.

서희의 호흡이 아주 낮게 잦아들었고, 발이 우뚝 멈췄다.


비죽 열린 문 틈 사이로 질척이는 남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우욱-”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헛구역질에 서희가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두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p.s 수정한다고 했는데,

      여전히 마찬가지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유라는 이전과 다를 바 없고,

      서희랑 주승의 입장만 조금 달리 했어.

      다카하시가 마음 고생했던 건,

      차차 서희가 갚아 나갈 테니 너무 미워는 말아주길.

      서희도 결핍이 많은 아이라 그럼.

      (여전히 부족한 부분은 나중에 코멘트 달도록 할게요~)




애가(愛歌) _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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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31 [상플] 만개한 눈꽃의 잔상 23. 균열龜裂 (이혁X오써니) [6] 유리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8.07 44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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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25 [상플] 망국의 초상 56.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방법 (이혁x오써니) [13] 유리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7.20 660 47
183524 귤러들 중에 금손들이 정말 많은듯.. ㅇㅇ(223.39) 21.07.17 277 11
183523 망국이 노블이 ㅇㅇ(175.223) 21.07.16 2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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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97 망국 다시 읽는중인데 ㅇㅇ(118.235) 21.05.11 25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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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88 엥 뫂격님 최근에 올라왔었던 상플 사라졌네 [1] ㅇㅇ(211.36) 21.04.24 34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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