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무조사를 받을 때였다. 담당 조사관이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기록 중 수표가 한 장 복사 되어 있는 부분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사 년 전에 이 수표가 환전되고 그 돈이 홍콩으로 갔습니다. 그걸 받은 사람은 김경아란 인물이고 거기서 더 추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 수표에 대한 기억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변호사란 직업은 공탁금이나 매매대금을 잠시 보관하는 일이 흔하게 있었다. 또 그 돈을 맡긴 사람이 지정하는 사람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나는 홍콩에 돈을 보낼 일이 전혀 없었다. 아마도 업무로 취급한 돈이 흘러서 그곳으로 갔을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그런데 이 세무조사를 담당하는 공무원은 나를 거의 범인으로 간주하고 취조하듯 다그치고 있었다. 나는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국가는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고 있다. 공무원은 그 돈으로 먹고 사는 국민들의 심부름꾼이었다. 탈세범만 취급하다가 보니까 그가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세범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하나 되물어 봅시다.”
내가 그에게 내쏘는 듯한 어조로 맞받아쳤다.
“뭐를요?”
세무조사관이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조사관님 그그저께 저녁 식사 때 어디서 뭘 먹었고 반찬은 어땠어요?”
그는 당연히 기억을 못하는 표정이었다. 내 말을 들은 그가 질문의 취지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말 장난 하지 마시구요. 제 질문에 대답을 하시죠.”
“그그저께 자기가 뭘 먹었는지도 모르면서 나보고 사년전 의뢰인한테서 업무적으로 보관을 부탁받은 수표 중 한 장의 행로를 기억하라구요? 그 질문이야말로 악의적이고 잔인한 장난 아니요? 형사가 자기들이 발로 뛰고 땅을 파면서 증거를 잡아요. 그런데 어떻게 세리들은 너의 결백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으면 죄인이다 그런 식으로 가는 겁니까? 난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요. 법에도 없는 월권 아닙니까?”
세무조사관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강력히 항의하는 나의 태도에서 거짓말은 아닌 걸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 위해 또 다른 복사한 수표 한 장을 보여주며 물었다.
“여기 이 천만 원짜리 수표가 일 년 전에 ‘엄정아’란 이름 앞으로 넘어갔던데 그 경위나 과정을 얘기해 주시죠.”
엄정아는 내 딸이었다.
“아버지가 시집간 딸에게 준 돈이요. 경위나 과정을 해명할 필요가 뭐 있어? 증여세를 뜯어 가면 될 거 아니야? 그걸 왜 그렇게 기분 나쁜 말투로 추궁을 하냐고?”
“이 아저씨한테는 나도 기분 나빠서 묻지를 못하겠네.”
세무 조사관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한번 자기가 하는 질문들을 그대로 녹음해서 집에 가서 밤에 들어봐요. 일반 국민이 그런 질문을 듣고 추궁하는 말투를 들으면 기분이 좋을지 말이요.”
내가 그렇게 말해 주었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그런 세무조사는 언제 받았는지 그 날짜를 망각해 버렸다. 세무조사관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매일 아침 하나씩 읽는 화두를 적어놓은 공책장을 들춘다. 오늘의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5년 전 11월 4일 너는 무슨 일로 슬퍼했는가? 그때 일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러니 현재의 근심으로 너무 상심하지 말라’
몇 년 전 어머니의 임종 때 나는 통곡했다. 영원할 것 같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 연기같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땀 흘려 번 돈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속에 멍이 든 것 같이 아프기도 했었다. 살아오면서 수시로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나보면 가슴속의 바위에 새겨져 있던 아픔이나 슬픔도 세월의 강물에 마모되어 없어져 버리는 것 같다. 노년이 된 나는 알고 있는 그런 것들을 사랑에 녹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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