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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상처 드러내기

운영자 2023.03.13 10:38:57
조회 132 추천 0 댓글 0

나이가 들면서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너그러움에는 나의 지난 잘못을 마주하고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것도 포함된다. 어떻게 살았건 간에 살아온 모든 인생을 솔직하게 내 보이는 것은 인생을 마무리 하는 방법중의 하나가 아닐까. 세월이 가니까 꽁꽁 싼 보따리안에 담아 내면의 다락방에 뒀던 것들을 하나씩 풀어내는 사람들을 본다.

내가 이십대 때 거리의 전파상 스피커마다 가수 윤항기의 흐느껴 젖어 흐르는 노래소리가 너울지며 퍼져 나오곤 했다. 쉰 목소리 속에 감미로우면서도 애잔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애잔한 느낌을 주는 노을지는 호수가에 사는 낭만가객 같았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청계천 다리 밑 한쪽 벽을 바라보면서 그곳에 있던 거지 움막에서 구걸을 하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대가수인 송창식씨도 방송에 나와서 밥을 먹고 잠자리를 얻기 위해 노래를 부르게 됐다고 했다. 그는 서울역부근에서 몇달 간 노숙을 한 사실도 덧붙였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스타가 참담했던 과거를 어떻게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현재의 빛나는 성공이 과거를 덮어준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속인인 나의 잣대로는 적당히 분장해서 청록빛 안개 저쪽에 묻어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나는 자기의 상처를 활짝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놀랍기도 하고 그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조금 과장한다면 그들은 도와 통하는 어떤 의식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종종 그런 사람들을 봤다. 대학졸업 무렵 나는 눈 덮인 가야산의 한 작은 암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옆방에는 작달막한 내 또래의 남자가 묵고 있었다. 그나 나나 장학금을 받아 힘겹게 사는 입장이었다. 영하 십오도 아래로 수은주가 내려가던 날 밤 우리는 요사채 밖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꺼진 장작불에 돌같이 굳어버린 떡을 굽고 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팽팽한 밤하늘에서 별까지 얼어있었다. 검뎅이가 묻고 오래되어 돌같이 굳은 떡을 이빨로 깨물어 뜯으면서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남의 묘지기 하면서 받은 밭 두마지기 농사로 우리 형제들을 키웠어요. 우리집 보다 더 가난한 집이 없을 거예요. 그런 속에서 살다보니 나는 썩지만 않았으면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어. 만약 내가 고시에 붙고 검사가 된다면 고기집 딸한테 장가들고 싶어.”

그의 말에는 처절함이 묻어있었다. 지방대를 나온 그는 명문대 고시생 사이에서 기가 죽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걸 비웃는 듯 그는 대학 사학년인 바로 그해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됐다. 그에 대한 기억이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았다. 나중에 한 잡지표지에서 점잖고 무게있는 중후한 검사장의 모습으로 인터뷰를 하는 그의 사진을 보았다.

사법연수생시절 판사업무를 배우기 위해 성남법원에 갔을 때였다. 나는 두 명의 판사가 근무하는 판사실의 구석에 서 몇 달간 근무했다. 그 방에 있는 두 명의 판사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한 판사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바로 옆의 동료 판사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엄숙한 공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책상을 나란히 놓고 있는 옆에 있는 판사는 다른 모습이었다. 마음이 너무 활짝 열려버린 사람 같았다. 어느날 오후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택시 한 대로 우리 형제들을 키우셨어요. 나는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의 택시를 광이 나도록 깨끗이 닦아놓고 법원으로 출근해요. 손님이 앉는 자리도 걸레를 가지고 흠 하나 없이 닦는다니까요. 더러 피가 묻어있는 수도 있고 오물이 묻어있기도 해요.”

그는 판사로 나를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조금은 무게있게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서 인간의 냄새를 맡았다.

전쟁이 일어나고 도시가 파괴되기 전 시리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여행길에 대통령의 인척이고 그 위세가 대단했던 재무장관 부부를 만났었다. 여행길에서 익숙해지자 어느 날 저녁 장관은 이런 과거를 털어놓았다.

“육이오 전쟁 때 제가 잠시 거지 노릇을 했어요. 제가 다른 거지 아이들보다 밥 얻어오는 재주는 탁월했어요. 어느 집 아줌마가 인정이 있고 언제 가야 밥을 줄지를 내가 눈치채고 다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귀족 풍모의 그는 어려서부터 도련님으로만 자란 것으로 생각했었다. 권위를 내려놓은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여유롭게 노년을 보내는 법조인들을 주변에서 본다. 그들은 얼마나 벌거벗고 자신 앞에 마주 설 수 있을까. 넝마주이출신 법조 선배가 있다. 시장 바닥에 떨어진 재활용쓰레기나 박스를 줏으러 다녀도 항상 책을 손에 든 걸 본 과일가게 주인이 이년 간 시장 국밥집에서 밥을 먹게 해 주었다. 그 넝마주이는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됐다. 개천에서 용이 나온 것이다. 우리 시절은 용이 자기의 고향이 개천이었다고 말하기를 꺼렸다. 흙수저 출신인 자신을 숨기고 금수저인 것 같이 위장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검사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어떤 분은 그 어머니가 머리에 함석 다라이를 이고 창녀촌을 돌아다니던 젓깔 장사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지금 그의 부인이나 아들딸들이 철저한 귀족의식을 가진 걸 보면 아이러니한 세상 같다. 재벌이나 장관이나 법관들이나 다 한꺼풀 벗겨 위로 올라가면 대부분 거기서 거기 아닐까.

어떻게 살았건 간에 살아온 모든 인생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멋있게 마무리하는 방법이 아닐까.

물론 무덤 속까지 그 비밀을 가지고 가야하는 경우는 예외다. 세월이 흐르고 황혼에 이른 요즈음에야 비로서 나 자신을 솔직히 바라보려고 애쓴다. 쓰라렸던 실패와 절망을 많이 떠올린다. 그리고 부끄러운 점 감추고 싶은 점을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경청을 해주는 사람 앞에서 자기의 치부를 말하는 것은 깨끗한 강물에 상처를 닦는 것 비슷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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