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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그 죽음에 이르는 병을 딛고 3

운영자 2010.11.09 11:05:51
조회 474 추천 0 댓글 2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본격적으로 내 공부를 돕기 시작했다. 내가 다른 데 신경쓰지 않도록 세심히 마음 써 주었다.


  한 번은 부대에서 부부동반 회식이 있었다. 군의 회식에는 묘한 특징이 있다. 상관이 주는 술을 받지 않으면 부인이 세 배의 벌주를 마셔야 하는 것이다. 그날 아내는 나에게 잔이 올 때마다 자청해서 벌주를 세 잔씩 비우다. 그 날도 나는 집에 돌아와 밤늦도록 법서를 읽었다. 취해 누워 있던 아내가 얼마 후 일어나 커피를 타 가지고 왔다.

  “이번에는 당신이 합격할 것 같으 느낌이 들어요.”

  아내가 찻잔을 책상 모퉁이에 놓으며 말했다.


  “왜?”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동안은 책을 앞에 두고 공상만 하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내가 들어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해 있어요. 오죽했으면 당신 같은 사람이 붙으면 나도 고시 공부하겠다고 했을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래, 이번에는 머리털이 다 빠지도록 열심히 해볼 거야.”


  나는 아내에게 다짐했다.


  처음으로 법률 공부 자체에 흥미가 느껴졌다.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부각된 자유권과 평등권 등 헌법상의 권리에 빠져들었고, 행정처분으로 국민이 침해받은 권리를 구제하는 행정법의 의미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각종 법서들을 읽을 때마다 전체 속에 숨어 있는 화두 같은 핵심이 한 단어 또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마가 끼여 있기도 했다. 그 동안 내가 좋아했던 역사를 빼고 정부는 국민윤리라는 과목을 2차 시험에 새로 추가했다. 발밑에 몰래 설치해 둔 지뢰 같은 그 과목의 내용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부의 방침에 무조건 순응하는 논리를 머릿속에 가득 처넣으라는 것 같았다. 관에 의해 정의된 논리를 일방적으로 앵무새처럼 외쳐야만 점수가 나올 그런 과목이었다. 나는 그 과목 때문에 또 불합격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사형수의 남은 날같이 소중한 하루하루가 흘렀다. 고시를 한 달 앞둔 어느 날 새벽, 열어젖힌 창문으로 보이는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그 무렵 나는 지하상가에서 산 찬송가 테이프를 계속 듣고 있었다. 믿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노래 자체로도 그냥 좋았다.


  반짝이는 별을 쳐다보던 나는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기도하는 방법도 모르고, 뭐라고 기도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정말로 절실한 마음을 담아 포근한 품을 가졌을 그분에게 호소하고 싶어졌다. 나는 책상 위에서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이제 저의 잘못을 알 것 같습니다. 당했던 설움에 보복을 하고,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누르면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나는 고시를 꿈꾸었습니다. 그런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칼을 주지 않았던 하나님의 행동은 마땅합니다. 하나님,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정말 그게 아닙니다. 저 정말 괴롭습니다. 그 동안 제 가슴에 쌓여온 건 지독한 열등감과 박탈감뿐입니다. 이대로 그냥 주시면 사랑하는 아내와 딸아이마저 비뚤어진 마음으로 괴롭힐 것 같아요. 하나님, 저는 가슴 속에 병이 들고 말았어요. 오직 한 가지를 추구하다가 좌절하는 절망의 병 말이죠. 이 병을 고쳐주세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비로소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기도를 계속했다.


  “하나님, 제발 한 번만 합격시켜 주세요. 저 절대로 판검사 하려고 부탁하는 거 아닙니다. 저 그런 것들 안 할 거에요. 두고 보세요. 합격으로 제 절망의 병만 고쳐주신다면 연탄 구루마를 끌어도 평생을 행복하게 보낼 겁니다. 제가 앞에서 구루마를 끌고 아내가 뒤에서 미는 험한 생활을 하더라도 항상 기쁠 겁니다. 제가 하나 더 약속드릴께요. 저 교회에 나갈 겁니다. 열심히 하나님 믿을 거에요. 진짭니다. 그러니까 제발 한번만..”

  찌는 듯한 한여름, 동국대학 석조건물에는 열기가 확확 일었다. 머리에 띠를 두른 결연한 표정의 청년,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40대의 아저씨, 눈에서 한 맺힌 퍼런 불이 이는 수험생들이 시험장을 꽉 메웠다.


  “야, 시험장 응원 나오는 거 이걸로 마지막이다.”

  먼저 합격한 김판사가 딸 정아를 안고 말했다.


  “아빠, 시험 잘봐.”

  정아가 큰 눈망울을 굴리며 소리쳤다. 아내는 죄인같이 내 눈치만 보았다.


  지독한 더위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문을 써대는 시험장은 차라리 고문장이었다. 약한 체력으로 더위를 이기지 못해 픽픽 쓰러져 나가는 수험생도 있었다.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시험장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는 못 올 장소였기 때문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답안지를 서나갔다. 국민윤리라는 새 과목만 아니라면 어디서 어떤 문제가 나와도 기본 점수 이상은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그대로 쓰러져 다음날 아침까지 정신없이 잠을 잤다.


  나흘째 오후, 마지막 과목인 형사소송법의 답안지 작성을 마쳤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시험장에서 나와 아내를 보는 순간 온몸에서 맥이 쭉 빠지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 더 이상 못하겠어. 다시는 이 시험장에 안 올 거야, 너무 지쳤어.’

  나는 회한 어린 눈길로 시험장 석조건물을 바라보면서 가슴 속으로 외쳤다.


  한 달 후 부대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데, 책상 위 전화 벨이 울렸다. 총무처 고시과에 근무하는 친구였다.


  “애, 너 부대 근무는 하지 않고 공부만 했냐?”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아직 사정은 끝나지 않았지만, 넌 성적이 최상위권이라 당연히 합격이다. 축하한다.”

  정신이 아찔해져 오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드디어 제일 늦게 20대 마라톤의 결승점에 홀로 도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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