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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보증과 전도사

운영자 2010.03.09 11:42:13
조회 377 추천 2 댓글 1

  지난해 연말, 갑자기 면도날 같은 한파가 몰아치던 날 오후였다. 몇 년만에 몰아닥친 강추위로 수은주가 영하 10도를 내려가고 있었다. 찬바람이 말처럼 광장 위로 몰아치는 영등포교도소 면회실로 키가 작고 펑퍼짐한 얼굴을 가진 50대 말의 여인이 들어갔다. 납작한 코에 넓은 입을 가진. 고생에 찌든 초라한 아낙네였다. 반대편에는 바짝 마르고 궁색한 모습의 60대 남편이 나왔다. 길쭉한 얼굴에 비해 약간 콧날이 두꺼운 코밑에 뻐드렁니가 입술 사이로 나와 있었다. 작은 눈이 선량해 보였다.


  “에구, 이 영감아! 춥지 않우?”

  늙은 아낙네는 원망 반, 동정 반이 섞인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좀 춥구만!  추운데 뭣 하러 온 거요?”

  영감은 아내의 눈치를 흘낏 보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와 뺨에 골 깊은 주름이 가득 들어서 있는 아낙의 얼굴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영감이 얼굴을 돌려서 앙상한 가지가 메마른 겨울 하늘 위로 손가락질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감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전농동에서 가나안 상회라는 명목으로 25년 동안 쌀가게를 경영해 온 사람이었다. 교회 장로로서 쌀가게에 누가 찾아와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따뜻한 차 한잔 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이었다. 직원이 횡령을 해도 차마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용서해주곤 했다. 그 부인은 그런 남편을 항상 못난 사람이라고 원망했다. 그런 부인 역시 교회의 전도사였다. 하나있는 딸은 신학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앞으로 어머니를 따라 주님의 종으로서 인생을 바치기로 서약을 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감이 잘 아는 사람 하나가 돈이 급해 융통해 쓰려고 하니까 수표를 발행해 달라고 해 그렇게 해준 것이 부도가 났다. 그 사람을 너무 믿었던 것이다. 당장에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으로 구속이 됐다. 정미소에서 쌀을 가져오고 돈을 주지 못한 것이 사기로 또 고소당했다. 시련이 오면 세 박자로 겹쳐서 온다 했던가.


  다만 채권자들은 영감의 아내가 연대보증만 서면 수표도 돌려주고 고소도 취소하겠다고 말하며 부인의 연대보증을 요구했다. 그 영감의 선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 보증서는 것을 그 부인은 철저히 거절했다. 자식이나 아내는 굶겨도 남에게 입은 옷까지 벗어주는 남편이 그 탓에 감옥생활까지 하는 게 너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기 때문이었을까. 자식하고 살아야겠다는 좁은 생각에서였을까. 아는 교회 목사 사모의 소개로 그 사건을 맡았던 나는 도중에 불같이 분노했었다. 먼 하늘나라만 바라보며 당장 깊은 구렁에 빠진 남편이 뻗친 가냘픈 손을 뿌리치는 아내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법정의 방청석에 와서는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 아낙네가 너무 미웠다. 그렇게 빌면서도 남편을 위한 보증은 서지 않다니. 나는 그녀의 눈물을 교활한 악어의 눈물로 단정했다. 그녀의 믿음을 바리새인의 회칠한 무덤같다고 생각했다. 저주해 주고 싶고 힐난하고도 싶었다. 그러다가 수은주가 이상 저온으로 영하 10도까지 내려가자 그 아낙네는 불현듯 남편 생각이 나 영등포교도소로 면회를 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 자신이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 기도만 하면 된다고 믿는 그 아낙네의 믿음에 대해 깊은 회의를 했다. 그가 믿는 주님은 도깨비 방망이처럼 모든 걸 들어주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창문으로 칼바람이 스며들던 그날 오후 여섯시 경 갑자기 전화가 왔다. 중년의 남자 목소리였다.


  “변호사님, 저.. 그 사건의 주심판사입니다. 한번 그 사건 보석신청 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나는 얼떨떨했다. 변호사가 가서 부탁을 해도 들어줄까 말까 한 게 보석으로 석방해 주는 것이다. 그걸 얼굴도 모르는 담당 판사가 저녁 늦게 전화까지 하면서 권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내가 신청서만 내면 석방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번개같이 절차를 밟았다. 그 다음날 저녁 굳은 몸을 차디찬 바닥에 뉘려던 순간 그가 석방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변호사님, 제가 굳이 연대보증 안 선 건 전도사일을 하는 데 시험이 들까봐 그런 거에요. 이기적으로 생각해서나 남편이 귀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어요. 교회일은 더더욱 조심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 추운 날 오후 남편을 감옥에 두고 돌아와 보니 전도사 일이고 뭐고 연대보증을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찬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정말 주님께 간구했어요.”


  부부가 함께 인사를 하러와 그 아낙네가 한 말이었다. 간구하는 그 시간에 판사가 나에게 보석을 신청해 달라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그들 늙은 부부를 통해 살아있는 주님을 몸서리치도록 무섭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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