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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시리즈 번외편《 그리하여 자이모쿠자는 성우의 길을 걷는다 》1/2

ㅁㄴ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3.09 00:54:04
조회 9884 추천 27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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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도 학년도 바뀌었지만, 봉사부의 풍경은 이전과 변함이 없다. 햇볕이 드는 창가에 자리 잡고 조용히 책을 읽는 유키노시타와 그런 유키노시타 옆에 꼭 붙어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싱글싱글 스마트폰을 들여보고 있는 유이가하마. 실로 평온한 분위기다. 

 그런 두 사람에게서 어제부터 읽던 책으로 시선을 되돌린 나였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 장도 채 넘기지 못했건만 노크 소리와 함께 부실 문이 열린 것이다. 


 "오랜만이구나 히키가야 하치만!!" 


 최근엔 잇시키에게 밀리는 감이 있지만, 툭하면 봉사부에 찾아와 하찮은 의뢰를 하기로 정평이 난 자이모쿠자였다. 어제도 봤는데 오랜만은 무슨 오랜만이냐……. 이제는 일일이 태클을 거는 것도 지겹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 역시 같은 심정이었는지 자이모쿠자의 얼굴을 확인하자 관심이 식었다는 듯 고개를 홱 되돌려버린다. 


 "히키가야, 네 담당이란다."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떨군 유키노시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이제는 완전히 내 담당이 되어버린 건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토츠카라면 모를까 땀내나고 징그러운 사내자식을 담당해봐야 귀찮고 짜증 날 뿐이지만, 이 부실에서 자이모쿠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인 것도 사실이다. 씁,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빠르게 끝내도록 할까. 


 "자이모쿠자, 이번 소설도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묘사도 난잡해서 읽기 힘들었고. 네, 끝. 잘 가라." 

 "하, 하치만?! 본관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만?!" 


 자이모쿠자가 당황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인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도 황당하다는 양 쓴웃음을 지었지만, 내심 내게 동감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 귀찮아…….


 "후우, 오늘은 뭐하러 온 거냐?" 


 마음을 다잡고 그렇게 묻자 자이모쿠자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가방에서 종이 다발을 꺼냈다. 응,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표정 하지 마라 하치만. 이번 작품은 예전에 쓴 것들과는 다른 혼신의 역작인 것이다." 

 "그 말 전에도 들었거든? 네 혼신의 역작은 대체 몇 번을 나오는 건데?"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혼신의 역작이란 것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불쏘시개였다. 

 그런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이모쿠자가 흐응 하고 오만방자한 포즈를 취하더니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 게이지가 상승할 것 같은 썩소를 짓는다.

 

 "이번에는 정말로 이전과는 다른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여 최근 유행하는 요소들을 넣고, 무거운 스토리를 싫어하는 최근의 오타쿠 독자들에게 눈높이 맞춰 가벼운 느낌으로 썼으니까."

 "독자들에게 눈높이에 맞췄다는 헛소리는 한 번이라도 수준 높은 글을 쓰고나서 해라."


 자이모쿠자에게 현실과 타협했다느니 유행하는 요소를 넣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솔직히 조금도 기대되지 않는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때도 역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이 녀석, 꼬박꼬박 소설을 쓰고 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실력이 안 는단 말이지. 뭐, 그래도 저번에 유키노시타에게 영혼까지 털린 후로는 쓸데없이 장황하고 집요한 묘사는 좀 줄어들었으니까 아주 발전이 없는 건 아닌가. 

 하지만 이런 발전 속도여서는 자이모쿠자의 소설이 노잼을 탈출하는 것보다 내가 이승을 탈출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야, 자이모쿠자. 너도 이젠 슬슬 우리 말고 소설 투고 사이트나 게시판에 올려보는 게 어떻겠냐? 우리나 거기나 가차 없이 까는 건 별반 다르지 않을걸?" 

 "흐, 흐음…… 확실히 그건 그럴지도……." 


 자이모쿠자가 언제나 자신의 소설을 가차 없이 혹평하고 있는 유키노시타를 힐끗 쳐다본다. 그러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유키노시타와 눈이 맞자 흠칫 몸을 떨고는 재빠르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마치 악명 높은 일진과 눈이 마주친 빵셔틀을 보는 것 같군. 우리 유키노시타 양도 알고 보면 상냥하고 좋은 아이니까 구역질을 할 만큼 무서워할 건 없지 않나…… 안심해라…… 안심해라, 자이모쿠자. 


 "므, 므흠. 그렇지 않아도 이번 소설의 평가가 괜찮다면 소설가가 되자 사이트에도 투고해볼 생각이었다."

 "……그런 조건이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는 건 영원히 무리 아니냐?"


 아무래도 나는 졸업할 때까지 계속 자이모쿠자의 졸작 소설을 읽게 될 운명인 것 같다. 나란 아이는 어쩜 이리 불행하담!

 하지만 뭐, 내키지 않는 지겨운 의뢰라도 의뢰는 의뢰다.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 일이다."

 "에에……."


 손을 쭉 내밀어 자이모쿠자로부터 넘겨받은 원고를 대신 건네자 유이가하마가 으엑 하고 표정을 찡그리고, 유키노시타가 후우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원고를 받는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지만, 현실은 반이 되기는커녕 세 배가 되었단 말이지.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이번에는 자이모쿠자가 가져온 원고지의 양이 평소보다 적다. 뭐, 적다고 해도 일반적인 라노베 한 권의 2/3 정도는 되는 분량이지만, 이 정도라면 부활동이 끝나기 전까지는 충분히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 보자, 제목이…… 이세계에…… 야, 잠깐. 이거 설마 이세계 환생물이냐?"

 "호오, 제목만으로도 그것을 눈치챌 줄이야. 과연 내가 인정한 남자군."

 "제목에 떡하니 이세계라고 써놓고서 무슨 헛소리야." 


 바보야? 죽는 거야? 

 어이가 없어 그렇게 말하자, 자이모쿠자가 크흠 하는 소리와 함께 팔짱을 끼며 말한다.


 "아무튼, 이전에 네가 했던 조언을 받아들여 이번에는 학원 이능 배틀물이 아닌 이세계 환생 판타지에 도전해본 것이다."

 "……아~ 확실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네. 요즘 인기 절정인 이세계 환생 치트 하렘무쌍."


 이세계 환생 치트 하렘무쌍이란 주인공이 이세계에서 환생해서 치트 능력으로 무쌍을 찍으면서 하렘을 건설하는 소설이다. 소년 점프의 표어가 '우정, 노력, 승리'라면 이세계 환생 치트 하렘무쌍의 표어는 '치트, 승리, 하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자위적인 요소가 강하다 보니 높은 인기와 더불어 태반이 불쏘시개인 걸로도 유명하다.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설마 진짜로 써올 줄이야……. 


 "므흠, 이세계 환생 치트 하렘무쌍은 아니다. 치트적인 능력을 얻지도 무쌍을 찍지도 않으니까."

 "하렘은 있는 거냐……. 어쨌든 이세계 환생물이잖아."

 "이…세계 환생……?"


 저번에 한 번 들었을 텐데 이미 잊어버린 모양인지 나와 자이모쿠자의 얘기를 듣고 있던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고 등으로 죽은 주인공이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다른 세계에서 환생하는 소설이다."


 덧붙여 트럭에 치어 죽은 주인공이 신에게 치트급의 능력이나 아이템을 부여받고 이세계에서 환생하는 내용이라면 높은 확률로 지뢰작이다.


 "그래? 요컨대 판타지구나?"

 "뭐, 그렇지. 가끔 현대 배경의 게임이나 만화, 소설의 세계에서 환생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판타지지."

 "만화나 소설의 세계에서 환생한다고? ……혹시 팬돌이 팬의 세계로 환생하는 작품도 있니?" 

 "그건 이세계 전생물이라기 보다는 팬픽이네. 팬돌이 팬의 세계로 환생하는 작품은 아마 없을걸? 만화나 소설의 세계라곤 해도 보통은 그 소설에만 나오는 가상의 작품이니까."  

 "……그래."


 유키노시가타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말한다. 

 그런가, 유키노시타는 팬돌이 팬의 세계에 가보고 싶었던 건가……. 하기야 나도 초등학교 땐 프리큐어의 세계에 가서 큐어 화이트와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니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뭐, 만나서 하고 싶은 건 전혀 다르겠지만. ……다르겠지? 만약에 같다면 앞으로 유키노시타 양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 같으니까 곤란한 거야요.


 "헤에…… 그렇구나." 


 별 관심 없어 보이는 투로 그렇게 말하더니, 유이가하마가 건네받은 원고지를 대충 훑어본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살며시 원고지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자이모쿠자의 의뢰에도 관심 좀 가져 주지 그러냐……. 


 "……므흠!" 


 유이가하마가 자이모쿠자의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자이모쿠자 역시 라노베는커녕 독서 자체에 흥미가 없는 유이가하마의 감상까지는 굳이 들을 생각이 없는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어째선지 오늘은 유이가하마가 원고지를 내려놓는 모습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모으려는 듯이 크게 헛기침을 한다.


 "이번 소설은 이전과 달리 초심자도 읽기 쉽도록 난해한 표현을 되도록 줄인 것이다. 그러니 부디 이번만이라도 읽어봐 주지 않겠나?" 


 유이가하마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자이모쿠자가 엄청나게 진지한 분위기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시선은 미묘하게 유이가하마를 벗어나 부실 창문을 향해있다. ……너 혹시 유령이라도 보이니?


 "……아, 나 말이야?"


 유이가하마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자이모쿠자가 부실 바닥을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귀여운 여자애랑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게 부담스러운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알게 된 지 벌써 1년은 됐으니까 이젠 슬슬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냐? 이 녀석, 이차원 여자에겐 가차 없이 욕망을 쏟아내는 주제에 삼차원 여자랑 대화하는 건 정말 서툴다니까.

 그건 그렇고 이렇게 유이가하마에게까지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니 이번에는 평소보다 신경 써서 쓰긴 쓴 모양이군. 

 그러나 라이트 노벨 같은 건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만 재미있게 읽어 주면 충분한 물건이다. 취향도 아닌 사람에게 억지로 포교해봐야 서로 피곤해질 뿐이다. 라노베에 대한 흥미도 지식도 없는 유이가하마가 뼈와 살이 되는 비평을 해준다든가, 긍정적인 평가를 해줄 거라곤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다.

 하지만 뭐, 반대로 그런 유이가하마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어낸다면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뭐,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 이런 기회라도 없으면 너 전혀 책 안 읽으니까."

 "실례잖아! 나도 책 정도는 읽는다고."


 유이가하마가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리며 나를 째려본다.

 응, 그거 패션잡지를 말하는 거지? 아니지, 유이가하마니까 교과서를 말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웅~…… 그러면 오늘은 나도 읽어볼까?"


 별로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이렇게 부탁하는 걸 거절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인지 유이가하마가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원고지를 다시 집어 든다. 

 다소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는 태도였지만,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지 자이모쿠자가 흠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 짓는다. 


 "이번 작은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르니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뭐야, 이 녀석. 단순히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역시 기대는 안 된단 말이지요…….



× × ×



 유이가하마가 휴우 하고 어깨에서 힘을 빼며 다 읽은 원고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평소 독서를 하지 않아서인지 유이가하마가 글을 읽는 속도는 나와 유키노시타보다 현저하게 느렸고, 덕분에 우리는 유이가하마가 다 읽을 때까지 20분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뭐, 부활동이 끝날 때까지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고, 헤에~ 아~ 하며 다채롭게 표정을 바꿔가며 소설을 읽는 유이가하마라는 드문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딱히 불만은 없지만.


 "자아, 그럼 어디 감상을 들어보도록 하실까."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신경 거슬리게 옆에서 내 반응을 힐끔힐끔 살피던 자이모쿠자가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말한다. 처음엔 마지못해 읽던 유이가하마 도중부터는 흥미를 보이며 읽어서 그런지 그 얼굴에는 전에 없을 만큼 강렬한 우월감이 서려 있다. 

 그러나 그런 거만도 태도도 잠시. 맞은편에서 눈을 내리뜨며 생각에 잠겨있던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자 자이모쿠자가 흠칫 몸을 떤다. 아마도 지난 1년간 유키노시타에게 가차 없이 털려온 탓일 것이다.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반사적으로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마치 파블로프의 개를 보는 것 같군. 뭐, 자이모쿠자의 경우는 개라기보다는 곰이지만.


 "미안해. 역시 난 이쪽 계통 소설은 취향이 아닌 것 같아……."

 "끄, 끄응……."


 평소라면 여기서부터 유키노시타의 가차없는 혹평이 시작됐겠지만, 오늘의 반응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자이모쿠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목소리도 평소와 달리 쌀쌀맞지 않다. 따스한 것까진 아니어도 미적지근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네 소설 중에서는 가장 괜찮았어. 특별히 재미있었던 건 아니지만, 읽는 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어. 제대로 완성도 되어있지 않던 예전 것들과 달리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한 여지를 두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로서 제대로 완결되어 있고. 뭐, 군데군데 의미 모를 독백은 많았지만 말이야."

 "오, 오옷? 그, 그런가……."

 "우응~ 나도 괜찮았던 것 같아. 뭔가 RPG 같더라? 이번엔 어려운 단어도 많이 안 나와서 읽기 쉬웠어."

 "오, 오오……!"


 혼신의 역작이니 뭐니 하며 한껏 큰소리를 쳤지만 내심은 불안했던 거겠지. 자이모쿠자는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전에 없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떨리는 목소리로 탄성을 흘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직 감상을 말하지 않은 내게로 고개를 돌린다. 안경 안쪽에서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눈빛이 좀 짜증 난다.

 

 "솔직히 놀랐다 자이모쿠자. 네가 써온 소설에 재미를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오오오오! 하치만이여, 너라면 이 소설의 재미를 이해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너만은 본관의 이 절묘한 드립과 클리셰 비틀기를 이해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놀랍게도 자이모쿠자의 이번 소설은 재미있었다. 자이모쿠자가 썼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았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했습니다.)

 아직 라노베 1권도 안 되는 분량이니 단언하기는 이르지만 이런 느낌으로 순조롭게 써나간다면 출판사에 스카우트 되어 정식으로 출판하는 것도 불가능한 꿈은 아닐 정도다. 

  

 "응, 확실히 교통사고로 죽어서 이세계? 에서 환생한다는 거 신선했어."

 "아니, 그건 이 바닥에서는 완전 식상한 전개니까."

 "어, 그래?"


 나 같은 헤비 라노베 독자에게 있어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설정이지만, 이런 류의 소설을 읽은 적 없었던 유이가하마에게는 그 진부한 설정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모양이군. 하지만 칭찬받아야 할 건 죽어서 환생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라노베 작가 지망생인 히키코모리 주인공은 신작 라노베의 점포 특전 한정판을 사기 위해 오랜만에 멀리 외출을 했다가 트럭에 치일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트럭에 치여 죽는 것이 이세계 전생물의 정석이지만, 자이모쿠자는 그것을 한번 비틀어서 주인공이 가까스로 트럭을 피하게 했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주인공은 그 직후 위험하다며 한 박자 늦게 자신을 밀친 지나가던 여고생으로 인해 옆 차선을 달리던 차에 치여 죽게 된 것이다. 차에 치여 죽은 건 마찬가지지만, 치어 죽는 과정은 그래도 나름 신선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점을 설명해주자 유키노시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유이가하마도 멍한 표정으로 헤에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보아하니 유이가하마는 잘 이해가 안 된 모양이군. 뭐, 유이가하마는 진부한 클리셰조차 신선하게 느끼고 있는 상태니 클리셰 비틀기가 잘 와 닿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힛키, 혹시 주인공이 플레임을 데리고 이세계로 가는 것도 식상한 전개야?"

 "아니, 그건 제법 신선한 전개다. 대부분은 그냥 치트 능력이나 아이템을 받고 환생하거든. 그렇다고 할까, 환생을 시켜주는 여신이 이렇게 대놓고 주인공을 무시하는 경우부터가 드물다."


 그런 내 설명에 유키노시타가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원하는 능력이나 아이템을 준다는 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었지만, 주인공이 그것을 이용해 여신을 이세계로 데려가는 건 확실히 인상적이었어." 


 음, 그건 확실히 인상적이지. 그 후로도 여관에 묵을 푼돈도 없어서 여신과 함께 막노동한다든가, 저렙의 몬스터 사냥을 갔다가 관광을 당하는 등 기존의 이세계 전생물의 클리셰를 비트는 전개들이 이어지긴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그 장면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한가지 의문스러운 게 있는데……." 

  

 턱에 손은 얹은 유키노시타가 그렇게 운을 떼며 자이모쿠자 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우리 세 사람의 대화를 흠흠 하고 흡족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자이모쿠자가 헉하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유키노시타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여신 플레임 말인데, 일본 지역의 환생을 담당하는 여신의 이름이 어째서 영문 이름인 거니?" 

 "아, 네? 아, 특별히 깊은 뜻은 없습니다……."

 "아, 그건 그거다. 그 뭐냐, 죽도라고 하면 별 느낌 없지만, 영어로 뱀부 블레이드라고 하면 뭔가 멋지게 느껴지잖아? 대충 그런 거다." 

 "므, 므흠. 그 말대로다."

 "아~ 그렇구나." 

 "……별로 멋지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아무래도 영어권 나라에서 몇 년간 유학한 경험이 있는 유키노시타에게는 잘 와 닿지 않는 모양이군.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처럼 익숙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에겐 같은 의미더라도 여신 화염보다 여신 플레임 쪽이 뭔가 더 멋지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일본 노래에 쓸데없이 영어 가사가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니까.

 

 "아, 맞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이 사가밍이란 여자 마법사 말이야. 혹시 사가밍…… 사가미 미나미가 모델인 거야?" 


 아, 그건 나도 좀 신경 쓰였다. 뭐, 자이모쿠자가 우리 반 사가미를 알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고, 유희부 사가미의 TS 모에화일 리는 더더욱 없을 테니 그냥 우연이겠지만. 사가밍이란 이름은 아마도, 아니, 분명 전혀 다른 누군가를 의식한 이름이리라.


 "므흠? 아니, 사가밍은 본관이 직접 생각한 이름이다만. 그 사가미 미나미인가 하는 여자와는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그래? 사가밍이라고 하니까 자꾸 사가밍이 생각나서 신경 쓰였어. 뭐, 사가밍은 이런 이상한 소리 안 하지만." 


 뭐, 사가미가 모델이었다면 전투 때마다 '너는 내가 지킨다……!'며 아군에게 방어마법을 걸고, 적의 공격을 방어마법으로 대신 막을 때마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도망쳐!!'라고 소리치고, 아군이 데미지를 입을 때마다 '지킬 수 없었어…….'라며 쇼를 하는 머리가 이상한 중2 마법사(방어마법 밖에 못 씀)는 나오지 않았겠지.


 "아무튼, 재미있었어. 이 정도라면 중2가 되고 싶어 하는 라노베 작가인가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구나. 작가가 돼도 괜찮을 정도는 아니지만, 글솜씨는 저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졌으니까. 같은 사람의 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후후, 선비가 사흘을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날 때는 눈을 비비고 마주해야 하는 법이지."

 

 검호 장군에서 여몽 장군으로 승급이라도 한 건지 자이모쿠자가 중지로 안경을 척 고쳐 쓰면서 오만방자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자이모쿠자의 태도에도 유키노시타는 피식 웃을 뿐이다.


 "그래, 정말로 괄목상대구나."


 유키노시타가 따스한 시선으로 자이모쿠자를 바라본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유키노시타가 자이모쿠자에게 이런 미소를 보여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거다. 자이모쿠자의 성장이 진심으로 기쁜 거겠지. 하기야 언제나 낙제점만 받던 아이가 90점을 받아왔으니 오랫동안 공부를 봐준 사람으로서 기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알게 된 지 1년도 넘었지만, 여태껏 자이모쿠자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해주지 않는 유키노시타와 중2라는 모멸 어린 별명으로 부르고 있는 유이가하마. 그런 두 사람이 자이모쿠자의 성장을 진심 어린 미소로 축하하고 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복잡한 미소를 짓던 자이모쿠자도 결국 한줄기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싸늘한 날씨조차 잊게 하는 훈훈한 분위기가 부실 안을 따스하게 감싼다. 

 아아,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다……. 

 자이모쿠자의 소설이 표절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뭐, 표절작이니까 출판 따위는 절대 무리겠지만."

 "코헉!?"


 정곡을 찔린 자이모쿠자가 화들짝 놀라며 괴상한 신음을 낸다. 그리고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거덕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하, 하치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건 본관이 창작한 거다만……." 


 뻔뻔하게 표절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자이모쿠자였지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까지는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추어 소설을 표절하면 안 들킬 거로 생각했나 본데, 소설가가 되자 사이트에 올라오는 소설은 나도 종종 보고 있다고." 


 어디에서 연재된 소설을 표절한 건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자 허억 하고 자이모쿠자의 말문이 막힌다. 파랗게 질린 얼굴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 수상 쩍인 모습에 유이가하마가 얼굴을 찡그리고, 유키노시타도 미간을 찌푸린다. 


 "어? 이거 표절한 거였어?

 "어, 표절작이다. 표절의 정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표절작이다."


 유이가하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휴 한숨을 쉬고, 유키노시타는 두통을 진정시키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히키가야, 자세히 설명해 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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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지갑 절대 안 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5/20 - -
공지 판타지 갤러리 이용 안내 [977/2] 운영자 13.01.18 404758 119
14852719 판타지 갤러리 서버 이전 되었습니다. [15] 운영자 21.09.02 12000 23
14852718 역겨운 냄새만 안나면 자랑했다고 차단할 이유가 있나 망아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8613 290
14852717 아니 난 라만차이거보고말한건데 [1] 재미교쓰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2924 8
14852716 서버주 대우 받고싶으면 게임사에 요구하든지 그걸 왜 유저에게 요구해? ㅇㅇ(223.38) 21.09.02 1475 7
14852715 비틱질 말고 걍 전진박아도 차단먹나 [2] 창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2132 0
14852713 싱글벙글 올드보이.jpg [1] ㅎ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7322 23
14852712 D.P 군대의 찐한 맛 나네 니에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2378 0
14852710 커브사고싶긴한데 좀무서운게 [3] 재일교4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2165 0
14852707 가웨인이 댓글 다는거 불편하지 않냐? ㅇㅇ(223.38) 21.09.02 1101 2
14852706 저런 유동이 그 겜갤에서 말하는 무과금 박탈감이란거냐... [3] 라만차의기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923 1
14852705 불멸을 그대에게 마지막화 보고울었다 ㅜㅜㅜㅜㅜㅜㅜㅜ [1] 김해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2077 1
14852704 진짜 인간육신 존나 이기적인거같음 유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896 3
14852702 베넷 상시에서 나오는거 아님? 창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067 0
14852701 40대 가장 폭행 여초반응.jpg [3] ㅎ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7785 26
14852700 유산균 지금부터 먹는 게 근데 큰 도움이 될까 [2] ‘파타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793 0
14852699 그냥 잘나왔다고 자랑하는게 왜 비틱질이냐 망아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987 0
14852698 크로스커브 현지가는 300중반인데 [2] 보빔으로세계정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631 0
14852695 일단 코코미는 거를거임... 김아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061 0
14852694 근데 쿠죠 사라 이년 라이덴 2돌 박는동안 4돌함 창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979 0
14852693 던파 오늘 들가서 헬 돌릴 생각에 기대되다가도 한숨나옴 엘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885 1
14852691 근데 무과금 비틱도 아니고 돈 지르던사람이 잘뜬건데 [2] 창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631 0
14852690 통두만 탈조센하네 아 김해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932 0
14852689 라이덴 돌 모아서 천장칠수있을거 같은데 2돌을 할까?? 재미교쓰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964 0
14852688 아 졸리네... [5] 유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587 0
14852686 원신늒네 다음 감우복각 뽑아야...? [8] 라만차의기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639 0
14852685 일본이랑 우리나라랑 연결시키면 수도권집중 막지않음? [4] ㅇㅇ(175.119) 21.09.02 1686 3
14852684 라만차 자짤 예쁜데 왜 차단함 ㅇㅇ(223.38) 21.09.02 987 0
14852683 이거 볼때마다 존나 웃김ㅋㅋㅋㅋ [2] 치둑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798 0
14852682 유라라이덴카즈하종려 [2] 김아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494 0
14852681 디퓌 궁금해서 넷플릭스 결제하려는데 베이식 480p는 무냐 [1] 래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481 0
14852678 저 아연이임? [6] Lui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632 0
14852677 라이덴 2돌박는데 300연 넘었나 창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3618 0
14852676 서양식 역사 얘기 중 좋은 예시가 식인이잖음 [7] ‘파타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840 0
14852674 빡긁? Embri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906 0
14852673 아 진심수라나찰완성형 플롯 완성했다 마르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831 0
14852670 지금 정부 정치 외교 꼬라지 보면 좋은 소리 나올 [1] 샛별슈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550 0
14852669 수영 가르치고있는데 제자가 저카면은 [1] ㅇㅇ (117.111) 21.09.02 1792 0
14852668 원신 이나즈마 스토리 꼭 밀어야함? [5] 종이먹기싫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526 0
14852667 귀화할지 영주권할지고민 ㄷ [6] 재일교4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1604 0
14852665 응애 [2] ☁(92.9)(59.23) 21.09.02 1533 0
14852662 원신 법구중에 양판소 있는거 좀 웃김 뜸부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957 0
14852661 이런 엉덩이 통통한 암컷년 있으면 어떡함? [2] ㅇㅇ(58.230) 21.09.02 3344 1
14852658 라만차 갤에 비틱질밖에 안하잖아 [5] ㅇㅇ(223.62) 21.09.02 1651 2
14852656 대학교로 돌아가게해줘 종이먹기싫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581 0
14852655 동생이 일본으로 귀화하겠다고 하는데 [5] ㅇㅇ(125.128) 21.09.02 1154 0
14852654 크퀘 징짜 희망계가 왜 희망계임 도도가마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307 0
14852653 가테갤 안보고 치니까 카마엘 리더로 치는거 몰라씀 [4] 라만차의기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402 0
14852651 ㄴ TS신도시맘돼서 평일오전부터 카페에서 수다떰 ㅇㅇ(218.144) 21.09.02 174 0
14852650 님들 카카오페이 공모주 청약 할거임? [1] 든든허스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2 24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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