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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몸의 점심, 타이타닉의 저녁. 연어와 아스파라거스.

Nitr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3.27 13:45:34
조회 5031 추천 68 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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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글을 읽다보면 '잘 쓴 글인데 좋아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랜드가 보여주는 모습이야 폴 고갱을 모델로 삼아 그려내는 거니 예외로 친다고 해도,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 필립이 밀드레드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이나 '인생의 베일'에서 바람난 아내에게 복수하려고 중국 오지로 기어들어갔다가 정작 자신이 콜레라에 걸려 죽어버리는 윌터를 보고 있노라면

문장의 흡입력과 소설 뒤에 숨겨진 인생의 진리에 대한 고찰에 감탄하기 전에 숨 넘어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갑갑한 기분이 엄습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서머셋 몸의 소설 중에도, 비록 주인공의 찌질함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있으니 바로 단편 소설인 '점심(The Luncheon)'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작가로서 이름은 조금씩 알려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수준.

하지만 그의 자부심은 한 여인이 보낸 "프랑스에 잠시 들르는 김에 작가님을 만나서 문학에 대해 토론하며 점심 대접이나 받고자 한다"는 팬레터에 도저히 거절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중년의 여성팬을 만나며 속으로는 점심값을 걱정하다가 "나는 점심엔 별로 많이 먹지 않아요"라는 말을 듣고 안심하는 것도 잠시.

한 가지 요리만 먹겠다며 연어를 주문하더니, 정작 연어를 기다리는 동안 캐비어를 주문하고, 캐비어에 곁들여서 샴페인을 주문하고, 파리에 왔으니 아스파라거스를 안 먹고 가는 건 섭섭하다며 아스파라거스를 주문하고,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마지막엔 제 철도 아닌 복숭아를 집어먹으며 작가의 한 달치 식비를 거덜내 버립니다.


여기서 소설의 주인공 (아마도 서머셋 몸 본인)을 절망시킨 메뉴, 연어와 아스파라거스를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소설 내에 등장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이름은 포엿(Foyot). 

파리의 국회의원들이나 드나드는 고급 레스토랑이라는데, 예전에 이미 문을 닫은지라 세세한 메뉴와 레시피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포엿 소스라는게 있기는 한데 연어 요리에 어울리는 소스는 아닌지라...

그래서 할 수 없이 클래식 프렌치의 기본, 에스코피에의 레시피를 참조합니다.

우선 준비해야 하는 것은 식초, 소금, 통후추, 당근, 양파, 파슬리, 월계수잎, 그리고 타임(Thym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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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재료들을 넣고 끓여서 육수를 만듭니다.

이렇게 만든 육수를 쿠르부용(court bouillon)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식 해산물 요리에 빠지지 않는 재료입니다.

연어를 삶을 때는 식초를 주로 넣은 쿠르부용을, 조개 등을 삶을 때는 와인과 레몬이 들어간 쿠르부용을 만드는 등 해산물에 따라서 재료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이렇게 만든 육수로 해산물을 삶으면 채소와 허브의 맛이 배어들 뿐 아니라

산성화 된 육수 덕에 재료를 좀 더 단단하게 삶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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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부용을 만드는 동안 소스를 준비합니다.

예전에 에그 베네딕트(http://blog.naver.com/40075km/220902711776) 만들 때도 등장한 바 있는 홀랜다이즈 소스를 먼저 만들어 줍니다.

홀랜다이즈 소스는 허브 우려낸 화이트 와인과 달걀 노른자, 버터, 레몬즙으로 만드는데

중탕으로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며 거품기로 휘저어야 하는 데다가 시간이 지나면 분리되기 때문에 대량으로 미리 만들어 놓을 수도 없어서 손이 많이 가는 소스입니다.

하지만 히팅 보울로 온도 맞춰놓고 거품기 돌리니까 완전 편하네요. 

그냥 재료만 순서대로 슬슬 넣어주면 신경 끄고 있어도 알아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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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랜다이즈 소스만 갖고도 충분히 맛있지만, 이번에는 휘핑한 생크림을 섞어서 모슬린(Mousseline) 소스를 만들어 줍니다. 

국내의 요리법을 보면 무슬린 소스라고 많이들 읽는데, 외래어 표기법상 모슬린이라고 읽는 게 맞을 듯 하네요. 

모슬린 직물처럼 가볍고 색깔이 밝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으니까요.

휘핑크림과 홀랜다이즈 소스를 1:1로 섞어서 음식을 서빙하기 직전에 부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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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토막이 통채로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냄비나 팬에 연어 껍질이 아래로 가도록 해서 놓고,

쿠르부용을 부어서 삶아줍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절대로 부글부글 끓여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너무 고온으로 삶아버리면 연어의 지방이 하얗게 새어나오면서 오버쿡 되어버립니다.

덜 익은 건 좀 더 삶으면 되지만 너무 익은 건 어떻게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김이 나고 거품이 날락말락 한 상태에서 10분 기준으로 연어 상태에 맞춰서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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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라거스가 나왔다. 큼직하고 즙이 많은 것이 절로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독실한 셈 족 사람들이 불에 구운 고기를 제물로 바쳐 여호와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듯이, 무르녹은 버터의 냄새가 내 코를 벌름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염치도 없는 그 여인이 큰 입 가득히 아스파라거스를 우겨넣고 씹어 삼키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태연하게 발칸 반도의 연극계 정세에 대해 논의해야만 했다."

- 서머셋 몸, "점심" 중에서


연어가 조리되는 동안 아스파라거스도 삶아줍니다. 

요즘은 재배기술이 발달한데다가 아스파라거스를 기르기 적합한 환경의 국가에서 수입을 하는 덕에 나름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채소로, 프랑스에서는 '귀족들의 채소'라고 불릴 정도였지요.

오죽하면 루이 14세가 궁중 정원사에게 아스파라거스를 길러내라고 특명을 내릴 정도였으니까요.

소설에서는 버터를 녹여서 삶아낸 듯 하지만, 이번에는 모슬린 소스가 있는 관계로 소금간을 한 물에 삶아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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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를 잘라서 접시에 깔아주고, 연어와 아스파라거스를 놓은 다음 모슬린 소스를 뿌리고 딜을 한 가닥 얹으면 완성입니다.

서머셋 몸의 애환이 녹아있는 연어와 아스파라거스 요리이지요.

서머셋 몸의 점심. 그리고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타이타닉의 저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타이타닉 호의 일등실 손님들이 저녁 정찬으로 먹었던 메뉴 중의 하나가 '모슬린 소스를 곁들인 연어와 오이'였거든요.

물론 이것만 먹은 건 아니고, 10코스 정찬 중에서 세 번째로 나왔던 요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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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콤하면서도 고소한 모슬린 소스는 연어 뿐만이 아니라 아스파라거스나 오이와도 궁합이 잘 맞습니다.

살이 단단하게 요리된 연어와 서걱거리며 씹히는 느낌이 좋은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있노라면 발칸 반도의 연극 정세 까지는 모르겠고 

그저 여성, 그것도 연애의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는 한참 연상의 여성 앞에서 허세 한 번 부리려다 된통 당하는 와중에도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남자의 심정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고 서머셋 몸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점심'을 읽으면서 가벼운 기분으로 웃을 수 있는 것은

(여자)후배들에게 학생식당이 아니라 비싼 밥 사겠다며 주머니 탈탈 털어 허세부리던 과거의 내 모습을 투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한 편으로는 치기어리고 찌질해서 이불을 펑펑 차게 만들지만 또 한 편으로는 슬며시 웃음짓게 만드는 순진함이 남아있던 그런 모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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