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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문학대회 참가작] -274℃, 눈의 마녀 이야기 (2/4)

엘사v안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17 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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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53℃

 

  마녀의 한걸음 한걸음이 닫는 곳마다 다시는 녹을 수 없을 것 같은 냉기가 휘몰아쳤다. 마녀는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동생에게 내려진 저주를 풀어야 하지만 동생을 생각하면 할수록 상황은 나빠져만 갔다.

    

  동생에게 굳게 약속을 했지만 정말로 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한 것처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이 목소리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도달했을 때 이 모든 것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당연히 치르리라. 마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움직였다.

 

  

10. 17℃

 

  여왕은 평소 가벼이 보일 수 없다. 그것이 통치자의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 여왕은 다르다. 루나드, 아그나르, 엘사에게 있었던 위엄과 어떻게 보면 차갑게 보이는 행동. 뭐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그런 모습은 현 여왕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평소와 같이 일상 대화 하듯이 얘기했을 뿐이다.

    

  여왕은 포크로 찍었던 고기 조각 하나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냅킨으로 입을 닦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을 나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여왕의 눈가는 퉁퉁 부어있다.

 

  “한동안의 일정은 크리스토프에게 맡겼어. 카이가 많이 도와줄 거야.”

 

  뜬금없는 선언에 크리스토프가 목이 막히는 듯 컥컥대고, 두 딸 또한 들고 있던 식기를 허공에서 멈춘다.

 

  “여왕의 명령. 다른 의견은 받지 않겠어.”

 

  여왕은 멍하게 멈춰있는 두 딸을 차례차례 돌아본다.

 

  “엘사? 안나? 내일 떠날 거야. 오늘 자기 전까지 준비를 마치도록 해.”

 

.

.

.

 

  셋은 이렇다 할 말이 없다. 여왕이 직접 나섰지만 수행원도 없다. 명확한 목적지도 없다. 흔한 장식도 없는 평범한 마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여행의 전부다.

 

  “그 눈의 마, 아니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죠?”

 

  마침내 안나가 온 몸을 배배 꼬다 못해 여왕에게 질문한다.

 

  “눈의 마녀 말이지?”

 

  안나가 한 번 배시시 웃는다.

 

  “그 마녀는 말이지. 잘 모르겠어.”

 

  “네?”

 

  “만나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어릴 때 헤어지고 나서 13년 뒤에 대관식 때 한 번, 얼음 성에서 한 번. 그리고 북쪽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 그것 말고는 없었으니까.”

 

  여왕은 안나의 볼을 콕 한 번 찔러본다.

 

  “참 이상한 일이지. 얼마 보지도 못한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다시 보고 싶은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그걸 한 번 물어볼 생각이야.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

 

  마차가 갑자기 멈춘다.

 

  “무슨 일이야?”

 

  여왕이 날카롭게 묻는다.

 

  “갑자기 사람들이 튀어나왔습니다.”

 

  마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사람들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냐? 여긴 왜 지나가려고 하는 거지?”

 

  엘사의 손에 냉기가 서리는 것을 본 여왕은 그녀의 팔을 잡고 진정시킨다. 여왕은 마차의 문을 열고 천천히 내려온다.

 

  “아렌델의 안나 여왕입니다.”

    

  순록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무로 된 봉을 잡고 마차를 둘러싸고 있다. 그 중 대표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춰 머리를 숙인다.

    

  “노덜드라의 허니마린입니다.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최근 들어서 이곳에 들어와서 숲을 망치는...”

    

  허니마린은 고개를 살짝 들어 여왕을 본다. 아니, 정확히는 그 옆에 있는 엘사를.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외친다.

    

  “눈의 마녀다!”

    

  미처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허니마린만이 굳건히 서있다.

    

  ‘지금 언니보고 눈의 마녀라고 한 거야?’

    

  ‘그러게.’

    

  안나의 속삭임에 엘사는 담담히 대답한다.

    

  “잠깐, 이 아이는 눈의 마녀가 아닙니다.”

    

  여왕의 말이 무색하게 눈앞에는 허니마린을 제외하곤 쥐새끼 하나조차 없다.

    

    

11. 23℃ ~ -162℃

    

  끝이 보이지 않던 안개가 갑자기 옅어졌다. 20여 간 지내온 이곳의 안개가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졌던 탓일까. 19살, 허니마린은 점점 불안해졌다. 무기랄 것도 없는 봉 하나를 들고 텐트를 나섰다. 저 멀리서 라이더가 사색이 되어서 뛰어온다.

    

  “누나! 도망쳐!”

    

  허니마린과 라이더는 이곳에 안개가 자욱했을 때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순록과 가까웠던 라이더는 안개가 허락하는 모든 곳을 가본 사람. 그런 그가 저렇게 겁에 질리다니.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안개의 바깥에 있던 뭔가가 오고 있다. 함께 갇혀 있던 매티어스가 말한 적이 있다. 저 밖에는 멋진 세상이 있다. 하지만 라이더의 표정으로 보아 최소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라이더가 허니마린의 손을 잡고 숲의 안쪽으로 뛴다.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눈의 마녀? 여왕? 모르겠어. 그게 나타났어.”

    

  “뭐? 전설에 나오는 그 여왕?”

    

  라이더 가리킨 곳. 안개가 사라진 하늘. 매티어스는 언제나 하늘은 푸르다고 말했지만 허니마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색의 하늘이었다. 마치 눈같이 아무 색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한기. 참을 수 없는 지옥 같은 차가운 느낌이 온 몸을 파고들었다. 저 멀리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얼음동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라이더는 품속에서 차가운 돌 하나를 꺼낸다. 손가락으로 살짝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에 푸른빛이 감돌고 있다.

    

  “라이더?!”

    

  허니마린이 미처 놀라기도 전에 라이더가 허니마린의 품에 돌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뭔지 알지? 누나가 보관해 줘.”

    

  “그럼 너는...”

    

  “옐레나 족장님이 나한테 맡긴 거지만, 난 자신이 없어. 하지만 누나라면...”

    

  라이더는 하던 말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여느 사람들과 같이 얼어붙었다.

    

  .

  .

  .

    

  새하얀 곳, 어떤 변화도 없는 곳. 이런 곳에서는 아주 작은 소리,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눈의 마녀는 이 지옥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허니마린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허니마린은 잡고 있던 봉을 쥐고 눈앞에 있는 마녀를 겨눴다. 마녀는 편안하면서도 위엄서린 푸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잠깐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해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이미 백여 명의 사람들을 죽인 눈의 마녀가 허니마린에게 말했다. 허니마린이 꿈쩍도 하지 않자 눈의 마녀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봉의 끝부분에 살짝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마녀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순식간에 얼어붙더니 칼로 자른 듯 툭, 하고 땅에 떨어졌다.

    

  순간 허니마린은 정말로 이 마녀가 허튼 짓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허니마린은 곧 봉을 슬그머니 치웠다.

    

  마녀는 얼어붙은 그루터기에 살짝 기대고는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으로 톡톡 쳤다. 허니마린이 옆에 앉자 마녀는 입을 열었다.

    

  “서로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데 누구부터 시작할까요?”

    

  마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니마린이 선수를 쳤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마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궁금하네요. 왜 이런 저주가 날 따라다니는지. 난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허니마린은 품 안에 있는 그 돌을 꽉 움켜쥐었다.

    

  “우리 노덜드라인에게는 전설 하나가 내려오고 있죠. 바로 당신에 대한 전설이.”

    

  “참 흥미롭네요.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눈의 여왕이 나타나 안개를 걷어내고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내용이었죠.”

    

  “그 전설이 맞길 바라야겠네요.”

    

  마녀의 대답에 허니마린은 라이더를 가리켰다.

    

  “저걸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죠.”

    

  마녀의 귀에 저 속에 갇혀 있을 사람의 비명이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는 사람 아닌가요? 당신은 그렇게 슬퍼 보이지 않는 걸요?”

    

  “지금 전 너무 무서우니까요. 다행히 당신이 아무 일 없이 여길 떠나면 정말로 슬퍼지겠죠. 저건 내 동생이니까요.”

    

  마녀는 자신의 동생을 생각했다. 자신만 없었더라면 평범한 왕족으로 자라 마침내 왕위에 오를 미래의 여왕을. 그리고 동생이 얼어붙었을 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기억했다.

    

  “이해해요. 하지만 난 정말로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어요. 나도 동생을 저렇게 만들어서 이 저주를 풀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요. 전설이 맞는다면, 아마 해방의 시간은 좀 더 걸릴 것 같아요. 우리의 대화도 그 과정이겠지요.”

    

  허니마린은 처음으로 마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마녀는 희망의 미소 속에 슬픔을 한 잔 따라 음미하고 있었다.

    

  “그쪽의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니까 제 질문을 해볼게요. 당신은 어떻게 이 추위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죠? 당신도 이 저주를 타고 났나요? 원하지 않는 힘 때문에 평생 외톨이로 살아야 하는 이 마법을?”

    

  “그건...”

    

  허니마린은 마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녀를 믿고 진실을 얘기할 수 있을까?

    

  허니마린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것을 본 마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말하기 싫다고 해도 이해해요. 당신의 말처럼 나는 이제 '아무 일 없이' 떠나도록 할게요. 동생을 안아주도록 해요. 우리의 대화를 모두 들었을 테니까. 그뿐만 아니라 내 저주를 받은 사람 모두.”

    

  허니마린은 벌떡 일어서서 라이더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이 저주가 풀리면, 언젠가 다시 와서 죗값을 치르도록 할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마녀는 정말로 무심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분히 북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 않아 자신의 손을 끌어당기는 허니마린 덕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허니마린은 돌 하나를 마녀에게 보여주었다.

    

  “이 돌은 오래 전에 당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마녀가 만든 거예요. 가지고 있으면 저주? 마법? 뭐라고 부르든 당신으로부터 피해갈 수 있어요.”

    

  마녀는 그 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약, 이 돌을 연구한다면 마법의 비밀을 풀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돌을 가져간다면 저 사람은.

    

  “만약 이게 저주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면 가져가세요. 하루 빨리 이 저주를 풀어주세요.”

    

  “그러면 당신도 얼어붙을 거예요.”

    

  “괜찮아요. 지금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내가 희생해서 그만큼 저주를 빨리 풀 수 있다면...”

    

  마녀는 돌아와서 그 돌을 허니마린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희생하지 마세요. 희생이란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세요. 남은 사람을 생각해요. 저 얼음 속에 갇혀서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들을 생각해요. 당신이 할 일은 저 사람들을 돌보는 거예요.”

    

  마녀는 문득 자신의 동생을 생각했다. 서로 사랑하기에. 정확히 그만큼 남은 자의 고통은 커진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그리워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그리움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선망, 상대에 대한 환상, 그리고 사랑으로 바뀌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결국엔 서로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아프지 않을 텐데. 마녀는 이 당돌한 소녀도 그 절망의 구덩이로 끌고 갈 수 없었다.

    

  “당신은 동생을 사랑하나요? 그리고 동생은 당신을?”

    

  “당연하죠.”

    

  “그럼 더욱 안 돼요. 당신의 동생은 그곳에서 당신마저 이 지옥에 들어오기를 바라지 않을 거예요.”

    

  허니마린은 마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고 맑은 그 눈은, 애절하게 자신을 말리고 있었다.

    

  “힘들 거예요. 내가 지금 겪고 있으니까 잘 알아요. 하지만 선택을 해야 해요. 살아가는 건 그런 거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마녀는 살짝 웃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정말 우습죠? 나도 내가 우스운데.”

    

  허니마린은 돌을 품속에 넣었다.

    

  “우습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의 저주와 싸우고 있는 거죠?”

    

  마녀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2. 17℃

    

  마차는 다시 달린다. 

    

  “희생하지 마세요.”

    

  여왕은 마녀가 했던 말을 읊조린다. 마치 자기에게 하는 말인 듯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그 때 한스의 칼을 막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이 여정의 끝에서 그 답을 알게 될까?

    

  자신의 희생이 이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아렌델의 겨울이 사라지고 덕분에 마법을 타고난 엘사는 더 이상 시리지 않은 겨울마다 초죽음이 되어서 돌아오는 이 현실이? 만약 그때 한스의 칼에 그 마녀가 죽었다면 나의 슬픔을 제외한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었을까? 나는 내 언니를 죽인 남자와 결혼하여 끔찍한 여생을 보냈을까? 여전히 동상의 상태로 한스의 아렌델이라는 상황을 영원히 지켜봐야 했을까? 한스는 처형되고 왕을 잃은 아렌델이 서서히 멸망하는 것을 보았을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결말은 아니었다. 대체 이 비극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마차가 멈춘다. 이번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마땅히 왔어야 할 곳에 온 것이다. 문을 열면, 신선하고 무거운 바다의 공기가 피부를 간질인다.

    

  어둠의 바다. 북쪽의 끝. 엘사는 고개를 들어 어둠의 바다 끝을 가리킨다. 이 바다를 건너면 답이 있을까. 그 마녀를, 언니를 만날 수 있을까.

    

  한편 안나는 엘사가 가리킨 곳과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곳에 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된 배 한 척이 고고하게 서있다. 여왕의 머릿속에서 밝혀진 그 날의 진실. 아그나르, 이두나, 눈의 마녀, 여왕, 엘사, 안나. 마법, 또는 저주라 불리는 단 하나의 비밀을 찾기 위해 들렀던 곳. 바로 여기. 대를 이어서, 30여 년의 세월을 통해 한 자리에 모인 그들. 여왕은 그렇게 무너진다.

    

    

13. -177℃

    

  마녀는 천천히 걸었다. 아토할란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8살 무렵, 모든 일이 시작됐을 때 엄마가 불러줬던 노래에 담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강. 어둠의 바다에 이르러서야 문득 생각나는 그 날의 기억. 결국 이곳이었다. 그 노래를 불러주었던 날과 모든 일의 시작이 같은 날이었다는 건 우연일까?

    

  끔찍하게 고생했을 부모님의 항해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아렌델에서 여기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작은 발을 자박자박 움직여 걸어왔던 것처럼 마녀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커다란 파도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그대로 아름다운 장식으로 변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물결은 아토할란으로 통하는 매끈한 길이 되었다.

    

  아토할란이 선명하게 보이고 동굴의 입구가 보일 때 기다려왔다는 듯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마녀의 귀에 울렸다. 맞게 도착했구나. 마녀는 기뻤다. 이제 씻지 못할 죗값을 치를 시간, 아렌델과 동생에게 드리워진 저주를 풀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4. 17℃

    

  31년 만에 움직이는 배는 조금 삐걱대긴 해도 그런대로 쓸 만하다. 구멍과 부식된 선체는 엘사가 얼음으로 메꾸고 얇은 얼음으로 만든 돛이 배를 실어 나른다. 그렇게 얼음으로 뒤덮인 기묘한 배가 어둠의 바다의 파도에 맞서 싸운다.

    

  “엘사.”

    

  여왕의 부름에 엘사는 고개를 돌린다. 마침 큰 파도 하나를 막아낸 뒤라 조금은 여유롭다. 하지만 신경 쓸 것은 많다. 어떻게 보면 이 갤리선을 혼자 움직이고 있는 셈이니까. 

    

  “네가 왜 태어났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왜 이런 힘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이 여정은 단순히 챕터의 끝일까, 아니면 완전한 이야기의 끝일까. 끝이 다가올수록 남들과는 달랐던, 마녀의 그것과 같은 엘사의 삶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안나 또한 언니가 무슨 말을 할지 내심 기대한다. 홀로 아렌델의 겨울을 만들어내고, 마녀의 부름에 달려갈 수밖에 없고, 이 커다란 배를 혼자 움직이는, 말 그대로 도구로써의 삶.

    

  항상 곁에 있었지만 그만큼 알 수 없었던 사람. 언니는 인간일까? 아니면 인간보다 낮은, 혹은 더 높은 차원의 무엇일까. 그 마녀도 비슷한 삶을 살았을까. 누가 이런 비극을 만들었고, 누가 이런 이야기를 누벼 잇고 있을까.

    

  “엄마.”

    

  엘사는 파도가 조금 잔잔해진 틈을 타서 그녀의 엄마, 안나 여왕에게 다가온다.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여왕은 엘사를 안아준다.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침대에서만 지냈던 그 삶. 겨울을 만들고, 스스로 감금했던 그 나날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에 와야만 했어요. 이곳에서 내가 누구인지. 난 왜 마법을 타고났는지. 이곳에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엘사는 엄마의 품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안나를 바라본다. 나의 동생.

    

  “이 여정의 끝이 누구에게나 만족할 만한 결말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뭘?”

    

  엘사의 입에서 갑작스레 하얀 김이 새어나온다. 안나는 그 때 온전히 느낀다. 매번 침대에 처박힌 언니의 심정을 이해한다고는 했지만 거짓말이다. 마법이 없는 자신은 언니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엘사가 추위를 처음 이해한 이 순간, 안나도 언니를 이해한다. 그건 보통의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안나는 지금까지 두루뭉술했던 마음의 방향을 확실히 잡는다. 집에 돌아가게 되면 바로 실행하리라. 안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평생 느껴본 적이 없는 이 감각. 이게 춥다는 거죠? 사실 이곳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거였어요.”

    

  여왕은 벌떡 일어서서 조용히 말한다.

    

  “돌아가자.”

    

  “하지만...”

    

  여왕은 성큼성큼 다가와 엘사 앞에 우뚝 서서 딸의 눈을 직시한다.

    

  “여왕의 명령이다. 엘사. 당장 이 배를 돌려서 노덜드라 쪽으로 돌아가.”

    

  엘사는 정말로 놀랐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배를 돌린다. 엄마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말임을 알기에 엘사는 아토할란 쪽을 바라본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진실의 공간을.

    

  “희생하지 마.”

    

  여왕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새어나온 말이었지만 지금에서야 그 때 마녀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든다. 여왕은 엘사의 어깨를 잡는다.

    

  “날 생각해. 네 동생을 생각해. 네 아빠를 생각해. 난 그 때 선택지가 없었지만 넌 있어. 널 잃을 바엔 차라리...”

    

  여왕은 거기까지 말하고 아토할란 쪽을 굽어본다. 저기 어딘가에 살아있을 눈의 마녀를. 그리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 말을 결국 하지 못한다. 여왕은 차분하게 말한다.

    

  “엘사. 우린 아렌델로 돌아갈 거야. 여왕의 명령으로. 반박은 받지 않겠어.”

    

    

15. -258℃

    

  마녀는 계속해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편안하고 고된 여정으로 발걸음이 늦어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목소리는 자신을 애타게 찾는 것 같기도 했고, 달콤하게 유혹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인위적인 느낌이 나는 돔에 도달했을 때, 목소리는 뚝 끊겼다. 마치 이곳이 그곳인 것처럼. 마녀는 조심히 돔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정확히 중간에 섰다고 생각했을 때, 돔의 바닥으로 부터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빛줄기가 돔의 최상부에 닿자, 돔의 내부를 타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펼쳐지는 기억의 조각들. 마녀는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그 사건에 눈길을 주었다. 동생의 머리에 실수로 마법을 날렸던 날. 저 일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언젠가 반드시 일어났을 운명 같은 일이었을까.

    

  “그게 너의 시작이었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마녀는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흑발의 날카로운 머리를 위로 한껏 올리고 금빛의 간단한 왕관, 푸른빛의 몸에 쫙 달라붙은 드레스, 하늘거리는 반투명한 레이스. 그러고 보니 얼음 성을 만들 때 저런 디자인의 옷을 생각해본 적도 있었는데...

    

  손을 곱게 모은 흑발의 여자는 마녀의 기억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다가왔다.

    

  “비극이지. 비극이야.”

    

  “넌 누구지?”

    

  마녀가 물었고,

    

  “이걸 만든 사람이자 널 부른 사람. 난 아토할란이야.”

    

  아토할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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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겨울왕국 갤러리 이용 안내 [200185/10] 운영자 14.01.17 128879494 3816
5489135 도착했다 ㅇㅇ(118.235) 08:57 5 0
5489134 아침 8시에 일어나 9시까지 병원 가야하는데 [1] ㅇㅇ(118.235) 03:42 18 0
5489133 엘시이이이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22 19 1
5489132 AI 접기로 햇어요 [2] ㅇㅇ(222.107) 05.10 35 0
5489131 갓데 갓데ㅋㅋㅋㅋ [4] ㅇㅇ(221.152) 05.10 31 0
5489130 졌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JungNu*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15 0
5489129 요즘 미싱 배우고 있음 듀라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24 1
5489128 끝내기홈런 ㅅㅅ 엘링글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20 0
5489126 대준수 역전호무란 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 천연효모식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14 0
5489125 졌티끄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ㅇ(221.152) 05.10 22 0
5489124 뉴욕피자 맛있네요 [4] ㅇㅇ(221.152) 05.10 33 0
5489123 안-시 금요일 오후 안-시 ㅇㅇ(118.235) 05.10 15 0
5489122 퀸 안 시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14 1
5489121 안시이이이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14 1
5489120 프갤보다 엘갤이 좋음 [5] Frozen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53 0
5489119 겨울왕국 TMI) 이거 모르스 부호인거 알고 계셨나요..? [1] ㅇㅇ(222.107) 05.10 62 0
5489118 겨갤 진짜 보트탄건지? ㅇㅇ(221.152) 05.10 24 0
5489117 대 엘 시 [1]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22 0
5489116 엘-시 [1] ㅇㅇ(118.235) 05.10 25 0
5489114 가짜 [1] ㅇㅇ(118.235) 05.10 48 0
5489113 간만에 디씨왔는데 프갤ㅈ망했노 [4] ㅇㅇ(211.234) 05.10 74 0
5489112 엘시이이이이 [1]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0 35 1
5489111 아 이제 진짜 안온다 잘있어라ㅂ [2] 멍붕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59 0
5489110 오늘의 꿈은 루프물 [1] ㅇㅇ(222.107) 05.09 47 0
5489109 요즘 여자들한테 아줌마라고 부르면 싸움거는거래 [4] ㅇㅇ(222.107) 05.09 68 0
5489108 겨울왕국 갤러리를 변화시킨 6인의 열사들 [8] 멍붕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123 0
5489107 제가 경어쓰기 캠페인 실천하니 님들도 예의가 있어진거죠 [3] ㅇㅇ(221.152) 05.09 43 0
5489106 ㅋㅋㅋㅋㅋ아니 이 점수차에서 만리런스찌는 ㅇㅇ(221.152) 05.09 21 0
5489105 이제 내려갔네 ㅇㅇ(221.152) 05.09 27 0
5489104 태칰투수 좀 불쌍한... ㅇㅇ(221.152) 05.09 22 0
5489103 1OVB 기증받습니다 [1] ㅇㅇ(222.107) 05.09 44 0
5489102 이겼삼 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 [4] *JungNu*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37 0
5489101 홍어는 못 먹고 [1] ㅇㅇ(118.235) 05.09 34 0
5489099 대관시 ㅇㅇ(118.235) 05.09 25 0
5489098 홍어 먹으러 간다 [1] ㅇㅇ(118.235) 05.09 36 0
5489097 미안한데 [1] ㅇㅇ(223.38) 05.09 33 0
5489096 스카웃제의는 흔하죠 [1] 천연효모식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55 0
5489095 코구 입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JungNu*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24 0
5489094 여앙님의 시간 안시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18 0
5489093 대 안 시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20 0
5489092 신난다 [4] ㅇㅇ(223.38) 05.09 61 0
5489091 뭔 바이러스 놀이 하는것도 아니고 [4] 멍붕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49 0
5489090 가왕 거성이 부른 명곡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죠ㅇㅇ [3] ㅇㅇ(223.39) 05.09 52 0
5489089 아시발 꿈에서 존나 재밌는 만화 스토리 떠올렸었는데 [5] 멍붕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53 0
5489088 님들 근데 [3] 천연효모식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56 0
5489087 요즘 디씨를 거의 안하게 되네여 허허 [9] ㅇㅇ(211.243) 05.09 79 0
5489086 엘-시 [1] ㅇㅇ(118.235) 05.09 32 0
5489085 귀엽지 [9] 천연효모식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09 72 1
5489084 ㅅㅂ 집정리하다가 ovb찾아가지고 화나서 갤왔음 [4] 겨갤러(121.161) 05.09 8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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