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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대회 우승작] 군밤과 초콜릿 - 1

쉽게쓰여진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19 22: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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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나

나는 눈을 감고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빠구나. 나는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빠가 천막을 들추고 들어올 때마다 숲의 찬 바람이 휭 불어 들어와 아빠 냄새를 실어다 주었기 때문이다. 아빠에게서는 항상 순록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노덜드라의 다른 남자들에게도 순록 냄새가 났지만, 아빠에게서 나는 냄새는 약간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잘 씻는 순록에게서 나는 냄새라 해야 할까? 아빠가 가져오는 냄새에는 숲의 청량감과 개운함, 포근하게 쌓인 눈의 향, 그리고 가끔씩 약간의 달콤함이 섞여 있었다. 달콤함이 풍길 때는 어김없이 아빠의 품에서 열매와 견과류가 나오곤 했다. 오늘의 아빠에게서도 달콤한 냄새가 났다.


“이두나, 자니?”


자그맣게 속삭이는 아빠의 목소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는 척을 하다가 아빠가 가까이 다가오면 깜짝 놀라게 해드려야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실눈을 뜨고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커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으악!”


내가 소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키자, 아빠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그런 아빠의 표정이 너무 웃겨서 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깜짝 놀랐잖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내 모습을 보며 아빠가 짐짓 화난 듯 말했다. 하지만 아빠의 입가에도 감출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하하, 아빠 표정이 너무 웃겨요, 하하!”

“흠, 언제까지 그렇게 놀릴 수 있을까?”


아빠는 나에게 윙크를 하더니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내 앞에서 흔들었다. 주머니에서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밤의 향기가 풀풀 풍겨왔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냄새였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아빠는 팔을 들어 주머니를 잡으려는 내 손을 피했다.


“주세요, 아빠! 제발...”


나는 두 손을 모아 비볐다. 내 간절한 태도를 본 아빠는 바닥에 앉아 내 코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네, 댐이 완공된 것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있는 날이잖아요.”

“그래, 아렌델에서 사람들이 올거야.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해, 알겠지?”

“당연하죠, 저 믿으시죠?”


순간 아빠의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스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궁금해할 틈도 없이 아빠는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 아빠는 우리 딸을 믿고 있단다. 너라면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빠는 두르고 있던 자주색 스카프를 풀어 나에게 둘러주었다. 평소 아빠가 늘 두르고 다니던 스카프였다. 거기에는 아빠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이제 이건 네가 가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고마워요, 아빠.”


나는 아빠에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관심사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군밤은요?”

“정말, 어쩔 수 없구나!”


아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군밤이 든 주머니를 건넸다. 나는 주머니에서 밤을 한 움큼 꺼내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었다. 이 맛, 이 향기! 군밤을 먹는 이 순간에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군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아닐까? 나는 눈을 감고 군밤의 풍부한 맛을 음미했다.


“너무 맛있어요!”


아빠도 말없이 주머니에서 군밤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아그나르

나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원래는 자야 할 시간이었지만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이야기 속 인어 여자아이의 상황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평생을 살던 바다에서 낯선 땅으로 올라온 그녀의 처지가 너무나 가엾게 느껴졌다. 내가 왕자라면 이 아이한테 글자를 가르쳐줄 텐데, 책 속의 왕자는 너무 바보 같았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그나르, 자니?”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읽던 책을 서랍에 집어넣고 군사학 교재를 펼쳤다. 아버지는 동화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물론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이 정도는 궁정 생활에서의 눈치로 알 수 있는 법이다.


“아뇨, 들어오셔도 돼요.”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아버지의 넘긴 머리와 콧수염을 볼 때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음에도 괜히 주눅이 들곤 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항상 나라를 책임지는 최고 권위자로서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권위에는 의무가 따르며, 의무를 가진 자에게는 위엄이 저절로 다가온다고. 하지만 난 거울 속에서 눈곱만큼의 위엄도 찾을 수 없었다. 왕이 되면 달라지려나?


“아그나르,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지?”

“네, 아버지. 댐의 완공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는 날이죠.”


아버지는 말없이 내게 다가오셨다. 책상의 불빛이 아버지를 비춰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압도되어 움츠러들었다. 아버지께선 군사학 교재가 펼쳐져 있는 책상으로 시선을 내리셨다.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간 나는 동화책을 집어넣은 서랍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것을 눈치챘지만, 아버지 몰래 서랍을 닫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책상으로 손을 뻗으셨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러려면 일찍 자야겠지.”


툭, 책이 덮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군사학 교재의 낡고 헤진 표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굵고 다부진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가볍게 건드리셨다.


“물론 왕이 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그만큼 자기 관리도 중요하단다.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까 공부는 이쯤 해두고 자려무나.”

“네, 아버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마음은 꿈에도 모를 아버지는 뒤돌아 문을 향해 걸어가셨다. 아버지의 등은 너무나 넓었다. 마치 자연의 흐름을 막는 댐처럼, 그의 등은 웅장하고 고고해 보였다. 아버지가 그 넓은 등으로 짊어지고 있는 무게를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버지 같은 왕이 될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멈칫하시더니 고개를 돌리셨다. 아버지는 따스함과 결의가 뒤섞인, 뭐라 따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아그나르, 네가 나 같은 왕이 될 필요는 없어. 네가 다스릴 아렌델은 내가 다스린 아렌델과는 다른 나라가 될 거다. 내일을 기점으로 말이지.”


노덜드라와의 평화 교류가 그렇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걸까? 아버지는 허공을 응시하며 말씀을 이으셨다. 마치 내가 아니라 아버지 당신께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일은 긴 하루가 되겠구나.”



이두나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렌델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라고 우리랑 크게 다르진 않았다. 사실 난 아렌델 사람들의 피부가 하얗다길래 몸 안쪽의 혈관과 근육이 비쳐 보여 굉장히 징그럽지 않을까 내심 염려하고 있던 차였다. 아렌델 사람들은 노덜드라의 문화에 대해 생각보다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마치 불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며, 그들은 자연과 정령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그들이 녹크를 타고 호수 위를 달리는 모습, 바위 거인의 작품들을 보며 감탄하는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내심 놀랐다. 이런 광경들을 통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였지만, 그들의 복장을 보고 속이 터질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복장은 우리와 다르게 몸에 딱 달라붙고 갑갑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움츠리고 있는 남자아이를 봤을 때, 옷이 답답해서 몰래 벗으려 하는 건가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 노덜드라의 선진적이고 편안한 복장을 소개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말을 걸려 다가가려는 순간,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진하고 덩치가 큰 아렌델 사람이 그 아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아이가 있었던 곳에서는 처음 맡아보는 달콤한 냄새만이 어렴풋이 맴돌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말을 붙이려 했던 것은 아렌델 사람들 중 내 또래가 걔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른들에게 말을 붙이기는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니까. 그래서 나는 내 주변을 맴도는 게일과 함께 있었다. 게일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친구이자 보호자였다. 높은 곳의 밤과 도토리를 따야 할 때 날 들어 올려 주기도 했고, 반대로 떨어져 크게 다칠 위험에 처한 나를 구해주기도 했다. 게일은 내 품에 들어가거나, 내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리도록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게일이 그런 장난을 칠 때마다 마음 한쪽을 눌러오는, 어릴 적 모닥불 주변에서 엄마에게서 밤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신화를 들으며 느꼈던 것만 같은 푸근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풍겨왔고, 그러면 나는 게일에게 웃어 보이면서도 눈가가 촉촉해지곤 했다.


“으악!”


게일이 갑자기 내 몸을 붕 띄웠고, 나는 당황해서 저절로 비명이 나왔다. 평소에도 게일은 나를 공중에 내던지는 장난을 치곤 했다. 하지만 평소의 장난과는 느낌이 달랐다. 지금의 게일은 거칠고,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게일의 떨림이 공중에 뜬 나에게도 전해져 왔다.


“게일, 갑자기 왜 그래?”


게일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기 중에 비릿한 냄새가 감돌았다. 순록의 가죽을 벗길 때 나는 냄새, 생명의 불꽃이 눈에서 희미해져 가는 들짐승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 냄새에는 훨씬 커다란 잔인함과 비극이 담겨 있었다. 나는 사람의 피 냄새를 처음 맡아보았다.


내 발밑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상처 입고,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란 속에서 구별할 수 있는 단어는 ‘지도자’, ‘배신’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게일은 나를 지켜주기 위해 나를 허공에 띄우고 나무 사이에 숨겨놓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내려가 싸움을 말리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살기에 압도당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아까 그 남자아이는? 마침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남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나무를 내려가 그 아이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어떤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보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아이의 시선을 따라간 나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아렌델의 왕과 아빠가 싸우고 있었다. 항상 인자하던 아빠가 그렇게 누군가를 죽일 기세로 덤벼든다는 것이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왜 싸우는 거예요, 아빠?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싸움에 열중하고 있는 왕과 아빠는 점점 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돼요, 아빠, 아빠까지 잃을 순 없어요, 내 의지와 달리, 나의 발은 너무나 느렸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바위가 내 옆으로 날아왔다. 바위가 일으킨 충격에 나는 멀리 날아가 땅에 세게 부딪혔다. 다행히 풀이 자라 있어 몸의 고통은 크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한 충격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낭떠러지를 바라보았다. 방금 본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아빠가?


그때 희미한 신음이 나를 충격에서 벗어나게 했다. 소리를 내는 남자아이는 바위에 부딪혀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게일을 불렀다.



아그나르

나는 아직 왕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의 부재가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댐의 완공식을 기점으로 아렌델이 달라질 것이라 하셨다. 그러나 이런 방향의 변화는 당신도 예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매티어스 중위 등 다른 신하들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비극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마법의 숲에서 일어난 사건의 사후 처리에 머리를 싸매야 했다. 이런 나에게 소렌센 경은 내가 업무에 적응할 때까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왕의 막중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마법의 숲에서 나를 구해준 것도 소렌센 경이라고 했다. 그는 큰 몸집에,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진하게 길러 굉장히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어야 나를 그 난장판에서 구할 수 있었겠지. 그는 매티어스 중위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 또한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일찍부터 가깝게 지냈을 텐데. 나는 그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소렌센 경은 한 여자아이와 나를 함께 구해 수레에 태웠고, 그 여자아이는 제 발로 보육원에 들어갔다고 했다. 나는 그 여자아이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 아이도 소중한 가족을 잃었겠지.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이두나

아렌델의 왕이 나를 찾아왔다 했을 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왕이 갑자기 왜 나를? 혹시 내가 노덜드라 출신인 걸 알고 벌을 주려는 건가? 나는 어디로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이 보육원에서 그런 건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고양이 앞에 끌려가는 생쥐와 같은 심정으로 왕에게 나갔다. 그리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내 앞에는 내가 구해주었던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 아이는, 아니 왕께서는 나를 보자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 이름이 이두나였지?”

“맞습니다, 전하.”

“그래, 너도 마법의 숲에서 슬픈 일을 겪었다 들었어.”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내가 구한 아이는 아빠를 죽인 원수의 아들이었다. 그 아이는 내 기분을 알지 못하고 계속 자신과 나는 같은 처지라며 재잘거렸지만 나는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자괴감과 비참함에 범벅이 될 뿐이었다.


“이두나!”


보육원 원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왕에게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 아이가 아침부터 몸이 좀 안 좋았거든요.”

“아, 아니에요. 그것도 모르고 제가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다음에 건강할 때 다시 찾아오도록 할게요.”


나는 떠나는 왕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이후 원장에게 된통 깨졌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왜 구했을까? 어째서 본능은 내가 그 아이를 구하게끔 한 걸까? 나는 끊임없이 되뇌었고, 그럴 때마다 괴로움이 더욱 커져만 갔다. 아빠가 사라진 절벽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 또한 천길 깊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아빠를 잃은 슬픔으로 미쳐 날뛰려는 마음을 다른 생명을 구한 행위로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 생각을 비웃고 너무나도 차갑고 잔인한 진실의 칼로 나를 깊숙하게 찔렀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지 분노를 넘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빠, 미안해요. 나는 아빠를 죽인 원수의 아들을 구하고 말았어요. 진실을 모르고 그저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내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에서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마법의 숲에서 맡았던 비릿한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숲에서 빠져나온 이후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왕은 매일매일 나를 찾아왔다. 나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혼자 이야기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위엄이 넘쳤던 사람이었고, 자신은 동화를 좋아하고... 왕의 이름이 아그나르라는 사실도 알았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왕과 만나는 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 왕은 자신의 지위라는 매듭을 이용해 나를 서서히 옭아매고 있었다.


소렌센 경이라는 작자는 왕보다 더욱 나를 괴롭게 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항상 경멸이 느껴졌다. 출신도 모르는 아이에게 줄 관심은 없다는 거겠지. 듣자 하니, 자신이 왕과 나를 마법의 숲에서 구했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건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나는 왕이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소렌센 경을 의지하는 걸 볼 때마다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왜? 나는 왕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데.



아그나르

아버지는 내게 당신과 같은 왕이 될 필요는 없다 하셨다. 그 말을 들었던 당시의 나는 적잖은 안도를 느꼈다. 나는 아버지처럼 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아버지는 나를 믿지 못하고 계셨던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가 한 말은 사실 당신이 모든 만찬을 마련해둘 테니 나는 그저 숟가락만 얹으면 된다,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즉위식을 마치고 왕이 된 내가 아버지에 대해 제일 처음 느낀 감정은 경쟁 심리였다. 아버지에게 지지 않는 왕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슬픔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했다. 내가 이두나를 찾아가는 것에도 이런 이유가 숨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결코 할 수 없을, 누군가의 닫혀있는 마음을 여는 행위로 나의 자질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가 넘어야 할 첫 번째 과업이었다.


하지만 이두나는 내게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와 있는 내내 닫힌 문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문은 적어도 나에게 원인 모를 적대감을 드러내진 않는다. 이두나가 가끔, 아주 가끔씩 (그녀는 나와 함께 있을 때 대부분의 시간 동안 허공이나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나를 향해 그 커다란 눈동자를 돌릴 때, 나는 거기서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본다. 그 호수에 일렁이는 사나운 물결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말을 멈춘다. 불편한 침묵이 우리 둘을 감싸고, 나는 말 없이 자리를 뜬다. 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가 보육원에서 느꼈던 쓰라린 감정은 다른 생각으로 서서히 치환된다. 나는 어느새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고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다시 닫힌 문과 대화하기 위해 성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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