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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단편] 말라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듯이

눈꽃으로오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24 22: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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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단편] 말라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듯이



⋇이 소설은 제258회 예술의 밤에 제출된 ‘[예술의밤/만화] 안풍커플 새드엔딩_manhwa (https://gall.dcinside.com/frozen/4494054)’ 를 읽고 떠오른 안나의 이야기를 쓴 글입니다.

만화를 읽고 오시면 글의 내용을 이해하시기 더 편하리라 생각됩니다.


* e-book 모드는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


1.

축축히 젖은 베개의 촉감에, 나는 눈을 떴다.

어둠 깔린 창 밖에는 역시나 비가 오고 있었다.

얼굴에 번진 눈물을 닦아내며 일어나 침대 끝에 몸을 걸쳤다.

언제나처럼 방 안에는 비 냄새와 함께 젖은 건초 냄새가 가득했다.



2.

언니와 내가 각각 자연계와 인간계의 정령이 되어 양쪽의 화합을 담당한 지 어느덧 십수 해가 흘렀다. 정령이 된 뒤에도 나는 아렌델의 여왕, 안나로서 국정을 가꿔나가야 했다.

여전히 언니에 비해 부족한 실력이지만, 내가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국민 한 명 한명을 기억하고 보살피며 통치하려 노력했다. 시민들의 불평불만은 거의 없었고 소문을 듣고 이주해온 외부인들도 많은 걸 보면, 그럭저럭 괜찮게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날마다 여왕으로서 서명해야 할 서류는 탑을 쌓았고 교역협상은 줄을 이었지만, 그 대가로 나는 사랑하는 언니와 함께 영생을 약속받았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원래대로라면 나 역시 여느 사람들처럼, 오늘같이 빗줄기가 먹구름에 미끄러져오는 날에도 퍽 운치를 느끼며 잠시 펜을 내려놓고 차 한잔의 여유를 즐겼을 터였다. 매번 비를 타고 바람에 흘러드는 그 향만 아니었다면.



3.

가끔 악몽에 시달렸다. 단풍이 흐드러지는 숲 끝에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가 있었다. 바다 위로 녹크를 타고 언니가 달려왔다. 우리는 울며 껴안았고 언니와 나는 함께 정령이 된 것에 기뻐했다. 갑자기 사라졌던 안개가 다시 내려앉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당황한 내가 돌아보면 그곳엔 한 사람이 서 있다. 가죽 옷에 등이 넓고, 머리는 노란색인 것 같은데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울컥대는 그리움에 그를 불러보려 하지만 이름이 혀 끝에 걸려 나아가질 않는다. 허공에 손끝을 내저어봐도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지겹도록 꾼 꿈들 속에서 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조심스레 다가서서 그의 등에 손을 뻗는 순간, 그는 하얀 안갤 녹아 흩어진다. 난 주저앉고, 그 위로 거대한 돌덩이가 나를 덮친다.


꿈에서 깨면, 창 밖은 항상 비가 오고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늘 이불은 땀에, 베개는 눈물에 젖어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방에는, 축축한 비 냄새가 지독했다. 성 안의 다른 이들은 잘 느끼지도 못하지만 나에게만 유독 강렬하게 코에 박혀오는, 젖은 건초가 쌓인 눅눅한 헛간 냄새 같기도 하고 때로는 순록이나 말 떼 냄새 같기도 한 것.

가득한 냄새는 내 안의 공허함을 더욱 키웠다. 대체 무엇인지 모를, 잔혹하지만 아련한 그 느낌. 무언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공허함의 정체를 파헤치려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보아도, 항상 단단한 안개에 가로막혔다. 다른 모든 기억은 선명한데, 안개 속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냄새가 끔찍이도 싫다면 국가의 모든 헛간과 순록 농장을 저 북쪽으로 치워버리기라도 해보련만, 바람에 실려올 때마다 가슴을 움켜쥐게 만드는 서글픔과 애처로움은 물감처럼 뒤섞여 눈가에라도 찍어두고 싶게 만들었다.


결국 옅은 한숨과 함께 슬리퍼를 신고, 카이의 뒤를 이은 시종장에게 부탁해 코코아 향기로 비 냄새를 지워내기로 했다.

곧 방에는 달콤함이 퍼졌지만 코 끝에는 비 냄새 한 톨이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4.

아침이 밝았다. 광장으로 나가 국민들의 터전을 돌아보는 날이었다. 시내 시찰은 내가 여왕의 직무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언젠가 카이는 시찰 중의 내 표정이 가장 아늑한 집에서만 볼 수 있는 그것이라고 했다. 꽤나 정확한 비유였을 것이다. 언니와 떨어져있던 세월동안 1년에 몇 번 허락되지 않았던 외출에서 만난 아렌델의 시민들은 나의 친구들이었고, 혼자가 아닌 시간을 함께해 준 더없이 소중한 또 다른 가족이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 그 자녀들, 자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여왕을 반겨주는 시민들의 웃음은 나에게도 행복이었다. 그들과 주고받는 생생함이 지난밤 울적했던 마음을 다시금 활기차게 만들었다.


"안녕, 꼬마야! 어머, 올슨 주니어 씨 안녕하세요? 다쳤던 팔은 좀 나아지셨어요?"

"여왕님,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덕분에 이제 멀쩡하지요."


한참이나 계속된 인사에 숨이 차와, 시장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시장 방문 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수많은 향기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맛있는 빵의 향기, 파란 니트에 밴 고양이 냄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코올 향이 물씬 느껴지는 사우나 증기부터 달콤한 과일 향까지. 모든 향은 각 상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 올라탄 고유의 향기였다. 항상 깔끔하고 정제된 성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차가운 냄새와는 다른 새로움을 주는, 나만의 기쁨이었다.


향기를 즐기며 걷다 보니 어느새 꽃집 앞에 멈추었다. 진열된 꽃송이들이 햇빛을 머금어 각자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기를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꽃들이 귀여워 송이마다 살피던 시선이 어느 노란색의 꽃에 멎었다. 마치 갈고리에 걸린 듯, 왠지 그 꽃에 걸린 눈길을 떼어낼 수 없었다.

"안녕하셔요, 여왕님!"

"소렌슨 부인, 건강해보이시네요! 크로커스가 너무 예뻐요."

"우리의 공식 꽃인 만큼 신경써서 가꾸고 있지요. 한 송이 가져가시겠어요?"

"아니에요, 고맙지만 크로커스는 성 안에도 많아서요. 그런데 이 꽃은 무슨 꽃이에요?"

나는 유독 눈에 밟혔던 노란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로단테에요. 수수한 듯 하면서도 우아함이 깃들어있죠. 그러고 보니 꼭 여왕님을 닮았네요."

"어머, 친절하셔라. 향기가 좋네요."

"네, 생화로도 예쁘지만 이 꽃은 말려서 꽃병에 보관해도 색이 오래 간답니다. 그래서 꽃말도 '늘 기억해'에요."

예쁜 생화를 늘 기억하기 위해 말려버리다니. 너무 억지로 만들어낸 의미 같잖아. 퍽 모순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예쁜데 말라버리면 조금 슬프지 않을까요? 이왕이면 싱그럽게 생화로 보관하는게..."

"여왕님의 취향대로 하시면 되지요. 하지만 드라이플라워도 나름대로 간직한 것이 있답니다."

부인의 말도 일리 있었지만, 굳이 살아있는 꽃을 말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집무실이 허전해서 장식을 좀 놓을까 하던 차였는데, 꽃병에 물 담뿍 주고 꽂아놓으면 좋겠네요. 고마워요 부인, 다음 휴일에 데리러 올게요.“



5.

향기에 잔뜩 취해 떨던 수다는 시끄러운 와장창 소리와 함께 뒤에서 들려온 화난 외침에 의해 끝을 맺었다.

"그러니까 비키라고 했잖아! 앞을 보고 다녀야지, 이게 얼마짜린 지 알아?“


"진정하세요 부인, 무슨 일이에요?"

다가서며 묻자 꽥꽥 소리를 질러대던 여인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쓰러진 한 노인이 있었다. 처음 보는 분인데. 아렌델 시민인가? 아직도 모르는 시민이 있다니, 나도 더 노력해야겠군.

"괜찮으세요?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다가가서 부축하는 찰나, 눈물이 빠르게 넘쳐 볼을 타고 흘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지금 왜? 언질도 없이 들이닥친 당황을 미처 돌려보내기도 전에, 가슴이 죄어오고 머리속은 온통 어지러웠다. 무언가 의식 저편에서 물결처럼 밀려와 나를 익사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잡을 수 없는 감정의 갈피가 숨을 타고 넘쳐흘러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 냄새, 순록 냄새가 코끝을 넘어 눈에 시려오고 있음을 깨달은 건 잠시 뒤였다. 비 오는 밤마다 나를 괴롭혔던 향이 처음 보는 노인에게서 느껴진다는 것에, 막 걸음을 돌린 당황이 다시 문을 쿵쿵댔다.

"여왕님? 괜찮으세요? 아니 저는 그냥... 노인이 다칠까봐..."

소리를 질러댔던 그 여인이 내 안색을 살피며 우물쭈물 변명했다. 그래, 시민들에게 여왕이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얼굴에 떠오른 혼란을 재빨리 감추며 서둘러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노인을 마저 부축해 일으켰다.


노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그의 눈에도 눈물이 서려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심장이 저려왔다.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서 익숙한 그리움이 비 냄새를 타고 올라온다. 머릿속에선 짙은 안개가 박동보다도 빠르게 요동쳤다.


"괜찮습니다."

노인은 내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를 붙잡고 싶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디라도 가서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계속해서 가슴을 울렸다.

"부담 갖지 마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사람을 불러서...”

"괜찮다니까! 평생을 얼음장수로 살아왔소. 이정도 충격은 문제 없소."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성은 그를 보내주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간절히 붙잡고 싶은 마음은 머리보다 입을 먼저 움직였다.

"아니면 성함이라도 알려주세요, 병원에서 진단이라도...“

무거운 공기를 타고 노인의 망설임이 전해졌다. 잠깐의 정적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 비요르그먼이오."


"폐하, 이제 가셔야 합니다!"


호위병의 말에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그는 나를 뿌리치고 도망쳤다. 황망하게 바라본 멀어지는 그의 등이 너무도 익숙했다. 더 작아지고 굽긴 했지만, 꿈의 안개 속에서 항상 봐온 그 등이라고 뇌세포 하나하나가 외치고 있었다. 온 몸이 떨려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시민들이 여왕의 선의를 거부하고 도망친 남자를 욕하며 나에게 걱정스레 다가왔다.


'웃어, 안나. 여왕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해.'

온 힘을 끌어 모아 정신을 다잡으려 했지만, 마음은 머리와 엇나가기로 작정한 듯 손은 덜덜 떨리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다. 그가 이름을 말한 순간부터 내 몸도 머리도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아니, 미쳐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게는, 오직 그 등 뿐이었다.


발작하듯 다리를 박차고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었다. 구두를 신은 발에서 피가 나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다리 근육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마다 마치 구역을 나눈 것처럼 안개가 차례차례 증발하고, 감춰졌던 기억들이 칼날처럼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좋냐고요? 완벽해요! 하하, 키스할 수도 있겠어요.’

‘나 여기 있어요, 뭘 하면 되죠?’

‘내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을 사랑해요, 안나.’

퉁명스러웠던 첫인상, 알고 보니 누구보다 따듯했던 마음. 사랑 전문가 친구들, 심장이 얼어 죽어가는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던 큼지막한 손. 노덜드라의 숲 속에서 불안해하는 연인을 안아주던 넓은 가슴, 죽음이 목을 치려는 순간 번개처럼 나를 낚아챈 순록 위로 올려다본 얼굴. 위험에 뛰어든 나를 나무라지도 않고 자신이 뭘 하면 되냐며 믿음으로 안아주던 용기. 숲가 절벽 끝 해변에서 건네주던 반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약속.


“크리스토프!”


숨은 턱 끝에 차고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울렁이는 마음은 목 놓아 그 이름을 외쳤다.

그는 언제나 내 옆을 지켰는데, 나는 머저리같이 너무도 쉽게 놓아주었다. 미련했던 그 때의 나를 지금의 고통이 채찍질해주길 바라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저 멀리 오두막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저기 낡아 금이 간 벽, 헤진 지붕. 옆으로 쌓인 건초 위로 놓인 당근 뭉치, 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녹슨 양동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다가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괘종시계가 처량하게 울어대는 그늘진 방 안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노인이 보였다. 방 안에는 그가 토해낸 피비린내 뿐, 그에게서는 더 이상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와 함께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이 나를 중력처럼 내리눌렀다. 온 세상이 기울어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기어가다시피 다가간 노인의 앞에는, 종이 위로 그의 삶이 향했던 마지막이 번져 있었다.


'안나, 당신만이 내 삶의 이유였기에...'





나는 그 자리에 영원히 주저앉았다.


말라버린 꽃은, 다시는 피지 않았다.





6.

막 지기 시작한 단풍이 협곡을 수놓고 바람은 장난스럽게 크로커스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들었다 놓는다. 밭에는 늙은 호박이 거름 되어 흙에 녹아들고 있다. 광장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분주한 모습이 변하지 않는 도시의 풍요로움을 과시하고 있었고 성은 여전히 굳건히 서 있었다. 많은 것이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가장 큰 변화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변하지 않은 성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남향의 창으로 쏟아져오는 햇볕이 따가웠다. 나는 창 너머의 아렌델을 향해 서 있다.


기억을 찾은 날로부터 벌써 십여 년이 흘렀다. 잃었던 기억의 공허한 자리가 그리도 억울했던지, 그 날 이후의 일들은 기억을 빼곡히 메워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성으로 돌아온 나는 올라프를 붙들고 몇 시간을 흐느끼다 탈진해 쓰러졌다. 왜 그 때 그의 말을 들었느냐고, 그 물약이 무엇인지 의심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냐고. 그 때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어땠는지 보았어야 하지 않냐고, 아니 그 표정이 미치도록 그리우니 어땠는지 말이라도 해달라고. 내 손은 그를 원망하듯 작은 몸을 붙잡아 흔들었지만 그건 사실 나 자신에게 쏟아내는 회한이었다. 내 기억을 두 번이나 지운 그 망할 트롤마저 잠에 빠져든 지금, 책임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기에.

마지막 기력을 다해 고통을 토해내며 나는 빌었다.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왕관의 무게만도 버거운데 영생의 다리까지 지탱하고 싶지 않다고. 그를 다시 한번만 보고 싶다고, 잊으랬다고 정말 잊은 내 부족함에 용서를 빌고 싶다고.


그 날, 나는 쓰러졌지만 하늘은 깨어있었나보다. 내 소망이 반쪽짜리로나마 이뤄진 걸 보면. 평균적인 인간에 비해 현저히 더디긴 하지만, 확실히 내 몸은 노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밤 뒤에도 야속한 새벽은 찾아왔고, 정령으로 살아온 세월 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시간과 함께 내 몸을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소리없이 다가온 손이 내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언니, 왔어?"

걱정어린 눈빛이 내 눈을 마주했다. 항상 그랬듯 언니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두 눈 속에는 생각으로 쌓아올린 빙하가 층을 이루고 있었다. 빙하 가장 위에 자리한 마지막 축적층은, 오롯이 나에 대한 걱정과 슬픔이었다.

"이제 표가 나기 시작하네, 안나."

갈색 머리 속 숨어있던 몇 가닥의 백발을 손에 얹은 언니가 말했다.

"그러게, 이것도 나름 괜찮지 않아? 내가 워낙 예뻐야 말이지."

언니의 걱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나는 일부러 더 밝게 대답했다. 동생의 빤히 보이는 재롱에 언니는 피식 웃었지만 여전히 얼굴에선 걱정이 머물렀다.


"역시... 그 생각 중이었니?"

나에게 돌아온 기억은 차례차례 다른 사람들에게도 찾아갔는지, 엘사도 올라프도 크리스토프에 대한 기억을 되찾았다. 함께 그를 추모하며 옆에서 다독여주는 엘사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예전에 정신이든 인생이든 어떻게 되었을 것이다.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광장의 활기 뒤로 협곡에는 수많은 배들이 제각기 다른 화물을 싣고 넘실대고 있었다.


"여전히 같은 마음이지...?"

"응 언니. 원래대로 돌아간 것뿐인데 뭘."

죄책감을 숨긴 대답이었다. 나의 언니, 소년기를 나 때문에 오직 홀로 버텨낸 불쌍한 사람. 닫힌 문 열리고 드디어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 해방되어 비로소 동생과 영원히 함께할 기회를 얻었건만, 스스로 영생을 포기하겠다는 철없는 동생을 둔 언니는 지금의 처량한 나로서도 안타까웠다.

"언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언니는 입을 달싹거리는 듯 했지만, 이내 꾹 다물었다.


언니가 전에 말한 적이 있다. 네 사랑은 너무도 커서 모든 사람을 담아내지만, 그래서 사랑 앞에 너무 무모하다고. 언니가 바라보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눈의 여왕이 악당을 물리친 뒤에는 그들 모두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지만, 그 시절의 내 사랑은 지금과 조금 달랐다.

언니가 아토할란에서 너무 멀리 들어갔던 그날, 난 사랑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바위거인을 도발하고 댐을 부수며 결국 극복해낸 듯 보였겠지만, 사실 그 때의 고통은 두려움으로 자라나 가슴 한 켠에 영원히 담겼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사랑으로 고이 보내줄 수 있다는 내 생각은 오만이었다. 나는 그걸 이겨내기엔 너무도 약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지금의 나는 사랑하는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번만은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으레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내리는 가장 어리석지만 솔직한 선택이자, 항상 사랑 앞에 지나치게 무모했던 내가 드디어 나를 앞세운 유일한 결정.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모두를 챙기겠다는 선언이었다.

정해진 삶을 언니 옆에서 보내다가 때가 되면 그를 만나러 가겠다는, 두 사랑을 모두 담아내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언니는 나를 몇 번 설득하려 했지만 내 마음은 처음으로 언니와 다른 길을 걸었고, 언니는 차마 나를 막을 수 없었는지 어느 날부터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단지 빙하를 한 층 더 얹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볼 뿐이었고,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걸 녹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옅은 한숨과 함께, 언니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꽃송이를 꺼내 내 머리에 꽂아주었다.

"요즘 일이 많아 집무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것 같아서 오는 길에 자연에게서 잠깐 빌려와봤어. 예쁘지?"

모양을 잡아주며 언니가 말했다.

"응, 수수하면서도 화사한데? 그런데 자연의 정령이 꽃 이렇게 막 꺾어와도 되는거야?"

"잠깐 빌린거야. 으이구."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나는 쿡쿡대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쁘다. 고마워 언니."

"잘 어울린다. 이 꽃이 뭐냐면..."

"...로단테."

창문으로 비친 꽃이 눈에 익었다.

"아, 알고 있었네?"

"응, 예전에... 꽃집에서 들었어. 꽃말이 '늘 기억해'라고..."

예기치 못하게 그 날의 기억에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늘 기억해. 이제 와서 무엇을. 꽃집 주인에게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도 나는 모든 걸 잊고 있었다. 다시금 가슴이 저려왔다.

"맞아. 하지만 그거 말고도 다른 꽃말이 있어. 영원한 사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거든."

'영원한 사랑...'

또 다른 장면이 스쳤다. 나처럼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신기하다는 그 사람에게 안겨, 지키지도 못할 영원을 약속했었지.


떨군 내 고개를 들어올린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나, 영원히 너를 사랑하는 언니가 있다는 걸 늘 기억하렴."

그래, 걱정해주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러는 건 도의가 아니다. 나는 상념을 지워내며 언니와 눈을 마주치곤, 웃으며 껴안는 것으로 커다란 마음을 대신했다.

"집무실 책상에 꽂아놓고 볼 때마다 물을 주며 이 언니를 생각해, 알겠지?"

엘사가 과장스럽게 장난을 걸었다.

"하하. 그럴게. 하지만 이건..."

채 마치지 못한 말 대신, 머리에서 꽃을 떼어 손에 살풋 얹었다. 노란색 꽃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말려서 갖고 있고 싶어."

살짝 젖은 중얼거림은 나에게만 들렸을 것이다. 손 안에 피어오른 기억을 아스라이 매만지다가, 이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웃음을 띠고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일 좀 도와주고 가."

"야, 내가 은퇴한 지 얼마인데 이걸..."

"아 사랑한다며!"

"에휴, 알겠어 알겠어. 조금만이다? 제가 어디에 필요하신가요, 여왕님?"


재잘대며 복도를 걷다 돌아본 창 밖으로, 노란 꽃잎이 휘날렸다.



7.

밤이 깊어오고 엘사는 돌아갔다. 나는 침실에 홀로 남아 손에 잡힌 주름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창 밖으로 펼쳐진 하늘에 시선을 돌렸다.

초저녁 때까지만 해도 별은 강을 이루어 마치 썰매가 지나간 얼음길처럼 반짝였는데, 하늘도 잘 때가 되니 이불이 필요했는지 어느새 조금씩 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오늘도 얕은 비가 흩뿌릴 모양이었다.

한참 바라보던 내 코끝에도 비 냄새가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스-읍'

한 줌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정겨운 비 냄새가 포근했다. 향기가 널찍한 품을 내어주듯 느껴져 허공에 잠시 몸을 기댔다가, 이내 침대 옆의 작은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깃펜을 잡고 끝을 깨작거리다, 종이에 짧게 써내렸다. 나도 모르는 옅은 미소가 입꼬리에 걸려있음을 깨달은 것은 펜을 놓을 때가 되어서였다. 편지를 바라보며 뒷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가 몸을 뉘었다. 왠지 오늘 밤에도 비가 오겠지만, 오랜만에 베갯잎이 젖지 않을 것 같았다.


어둠을 타고 내린 달빛이 책상 위 편지를 포근하게 비추고 있었다. 감겨온 눈 위로 빗소리가 따듯했다.




8.

크리스토프,

말라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아요

그런데도 꽃을 말려 보관하는 건,

그에 담긴 마음이 기억 속에 영원히 향기로워서래요.


크리스토프,

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어요

당신이 날 위해 준 마음처럼

뜨겁게 뜨겁게 살아갈게요


그러다

단풍도 피고 지고 얼음이 얼고 녹다

천천히 당신과 같은 온도 되거든


하늘이 깨어나는 날, 달려갈게요

당신에게 닿아 속삭일게요

당신의 향기는 내 기억 속 영원한

단 하나의 마법이었다고


그러니 기다리고 있어요

활짝 핀 로단테 가득 안고서

이번엔, 내가 당신께 찾아갈게요.

그땐 우리, 같은 추억에 웃어요.


서로에게 삶의 이유였던

다시 피울 그대에게,

잊힐 리 없는 사랑 담아

당신의 안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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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8670 [그림] 올벤쳐 [22] FlightF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4.23 162 9
5487990 님들 저 생일임다 [15] Pris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29 204 8
5487495 예술의밤) 아렌델라이프 #27 [10]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0 272 20
5487149 푸갤라미 근황 [21] K2CHi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3 405 12
5486537 예술의밤) 아렌델 라이프 #26 [12]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29 363 18
5485752 솔직히 스벤은 가능이다 ㅋㅋ [14] 트루데미지노무현(223.39) 23.12.30 930 10
5485751 속초에서 좆목중 [35] 겨갤러(223.39) 23.12.30 1258 23
5485570 라디오) 오토마톤 정령님 [8]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23 349 20
5485348 ※복귀 갤러들을 위한 차기작 정보 및 갤 상황 정리※ [30] ㅇㅇ(116.41) 23.12.18 1102 73
5484986 [231206] 겨울왕국, 겨울왕국2 일일관객수 [18] FlightF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07 492 13
5484950 [231205] 겨울왕국, 겨울왕국2 일일관객수 [12] FlightF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06 205 13
5484669 [231202] 겨울왕국, 겨울왕국2 일일관객수 [12] FlightF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02 414 12
5484618 겨갤 이상하면 개추 [16] 감자국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01 754 19
5484617 망갤테스트 [27] Nobless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01 791 25
5484418 [그림] 10주년 축하합니다!! [13] PoytailPoy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27 352 19
5484374 예술의밤) #278 겨울왕국 [15]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26 396 30
5484298 엘사카페 아까 좆비비는애들 대체 뭐냐 ㅋㅋㅋ [16] 겨갤러(223.39) 23.11.25 1028 18
5484297 엘사카페 재미있었으면 개추ㅋㅋㅋㅋㅋ [20] 감자국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25 936 20
5483517 추워지면 나도 모르게 입장 ^^ [23] 메박_점장형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1.07 700 22
5483252 예술의밤) #276 마녀의 밤 [13]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30 402 22
5483106 예술의밤 할로윈 특집?? [15] 충북청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27 564 24
5482940 레전드 뉴짤 떴다 [16] FlightF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23 1057 18
5482675 ai)윙크 자가격리 [11] 익명_y9J31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17 818 34
5482623 엘갤 이주 잘잘못을 탓할거면 2년전에 했어야지 [14] ㅇㅇ(106.101) 23.10.16 736 18
5482599 프갤러들이 엘갤 안갤로 간 이유를 알겠다 [8] ㅇㅇ(118.235) 23.10.15 1012 31
5482519 프갤럼들아 맞을래? [22] 렛잇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0.13 538 9
5481886 [[ 와 진짜 존나 귀여운거 찾음.... ]] [14] ㅇㅇ(112.147) 23.09.25 875 11
5481689 업데이트)재업) 엘사 vs 안나 인기 차이 [16]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9.19 96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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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1668 오랜만에 그림 그려옴.. [14] 겨갤러(1.220) 23.09.19 542 24
5481664 캠퍼스라이프 #29 [9]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9.18 372 16
5481467 사람들이 쥬디홉스를 욕하는 이유 [11] 쥬디홉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9.13 745 18
5481142 404 ERROR 예술의 밤 공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12] 예술의밤총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9.06 33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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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0883 [이륙요청!] 제 402회 예술의 밤 통합링크 <자유주제> [9] 예술의밤총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8.28 15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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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0065 예술의밤) 아렌델 라이프 #25 [6]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07.31 31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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