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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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에서 5월의 첫날은 참 활기찬 시기야. 얼어있던 강이 녹아 피오르를 다정하게 껴안고, 꽃과 나무들은 눈송이를 벗겨내 한껏 몸치장을 하기 시작해.
봄을 맞아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건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겨울 동안 문을 닫고 쉬던 가게들과, 추위 속에서는 작업을 할 수 없었던 여러 분야의 인력들이 활동을 재개하거든. 대부분의 새로운 가게들도 이 시기에 개장을 하지.
*
"올라프 잘 하고 있어. 조금만 왼쪽으로... 아냐 너무 많이 갔어! 다시 오른쪽으로... 좋아. 거기야! 딱 거기 놔."
올라프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마지막 케이크를 진열했어.
"올라프~ 너무 고마워. 너 없었으면 정말 막막했을 거야."
꼬마 눈사람은 어깨를 으쓱이며 안나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지.
이제 엘사의 인테리어링만 끝나면 바로 개장을 할 수 있어. 안나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지만 마무리는 꼭 자신이 하고 싶다고 했지.
"언니~ 장식은 다 끝났....... 와우!"
천장에 매달린 얼음 샹들리에와 벽지에 눈꽃으로 수놓아진 크로커스 문양이 반짝여. 진열대 위로는 찬연하게 빛나는 결정들이 쌓여있고, 문 앞에는 눈송이로 새겨진 Welcome 카펫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엘사만이 할 수 있는 우아한 인테리어지.
"안나, 이 정도면 마음에 드니?"
"마음에 드냐고?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걸!"
안나는 개장을 앞두고 잔뜩 들떠있었어. 동생이 기뻐하는 건 좋지만, 엘사는 걱정이 사그라들질 않아.
"안나... 얼떨결에 허락하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해. 평생 공주로 살아온 네가 꼭 이런 도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안나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어.
"걱정 마. 나는 일탈의 여왕, 엘사의 동생인걸?"
"........ 그렇네"
안나의 의연한 대답에 엘사도 안심이 됐는지 씨익 웃었어.
"다 됐으면 나는 이만 성으로 돌아가 볼게. 5월의 시작이라 업무가 꽤 많거든. 으~"
"네~ 화이팅하셔요. 여왕님."
엘사가 미간을 찡그리며 가게를 나갔어. 안나는 언니에게 손을 열심히 흔들다가 문이 닫히자 깊게 숨을 들이마셨지.
"좋아. 이제 진짜 시작이야. 연습하던 대로만 하면 돼. 어려울 것 없다고."
*
정오쯤 되었을까, 문이 열리고 대망의 첫 번째 손님이 들어왔어.
"어서 오세요~ 붉은 머리 빵집입니다."
안나의 영업용 미소에도 손님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계산대로 걸어 들어왔어. 덩치는 크고, 어울리지 않는 롱 코트를 입은 사내였지. 가장 특이한 점은, 괴상한 순록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거야.
"나는 퍼토스 리크라는 사람이올시다."
"멋진 이름이네요. 리크 씨.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아니 나는.. 음... 뭐가 제일 맛있소?"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프가 튀어나와 설명하기 시작했어.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 제가 간단히 설명해 드리죠. 한 자매가 살았어요! 그중 하나는 마법을 가지고 태어났고 다른 하나는....."
"올라프...... 결론만 말씀드려."
"결론을 말하자면, 저희 빵은 다 맛있어요!"
안나가 올라프를 주방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어.
"간단히 끼니를 때우실 거면 모카크림빵이나 미트볼 샌드위치도 좋구요. 월초니깐 가족을 위한 케이크도 괜찮겠네요."
"당근 빵은 없소?"
안나와 올라프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어.
"당근 빵이 뭐야?"
"어... 다음번에 오실 때에는 제가 만들어 놓을게요."
"그럼 그냥 샌드위치로 주쇼."
리크 씨는 가까운 테이블에 터벅터벅 걸어가 앉았어. 그 모습을 본 안나가 올라프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작게 속삭여.
"이건 기회야. 저 떠돌이 양반의 입맛에 맞는 샌드위치를 내놓는다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우리 가게 소문을 내줄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저 사람 당근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샌드위치에 당근을 왕창 넣어버려. 너 샌드위치는 만들 줄 알잖아. 네가 만드는 동안 나는 말을 걸어서 행복을 캐낼게."
안나는 올라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후, 사내가 앉은 테이블 옆에 의자를 하나 끌고 와 마주 보고 앉았어. 그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지.
"리크 씨? 그 가면을 보아하니 평범한 분은 아닌 것 같고,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주실 수 있나요?"
"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사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자꾸 목소리를 떨었어.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제 빵집 첫 번째 손님에게는 돈 대신 이야기로 빵값을 받고 싶네요."
"굳이?"
"강요는 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구나 맘속에 묵혀둔 재미난 이야기는 있죠."
"딱히 없는데..."
"아 그럼 첫사랑 얘기라도 해봐요! 남자가 까탈스럽구로..."
안나의 고집에 리크 씨도 포기했나 봐. 한숨을 푹 내쉬었어.
"휴... 알겠소. 그렇지만 별로 재미는 없을 거요."
퍼토스 리크의 이야기
*
나는 어렸을 적 두 부모를 잃었다. 겨우 걸음을 뗀 아이에게 부모의 부재는 그리 버겁진 않았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은 이상적인 가족이었다면 이별에 있어 큰 상실을 느끼겠지만, 나의 부모는 사람의 말을 가르치기도 전에, 나를 버렸으니까.
길거리에 나뒹구는 이 작은 것이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버려진 인형이겠거니, 이미 죽은 아이겠거니, 지나치기만 하더군.
그 상태로 방치되어 3일을 쓰레기통 안에서 살았다.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아이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 굶주린 까마귀와 시궁창의 새앙쥐밖에 없었지.
마지막 날, 산 채로 뇌를 파먹힐 뻔한 나는 겨우 누군가에게 구원받을 수 있었다.
나를 키운 것은 '말하는 돌덩이'들. 생김새는 사람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의 심장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따뜻했다.
돌덩이들에게서 7살엔 사람의 말을 배웠고, 14살엔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언젠간 이들을 떠나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17살이 되던 날, 가장 나이 많은 돌덩이 할아범의 허락을 받고 사람들이 사는 왕국에 내려가기로 했다. 그때는 설렘으로 가득 찬 나머지, 돌덩이들이 눈물 흘리며 작별을 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군.
나는 철없이 기뻐하며, 가볍게 인사하고 산을 뛰어내려갔다.
"너 따위 비렁뱅이에게 줄 일자리는 없다."
"왕께서 듣고 싶으신 건 힘든 백성의 사연이지, 짐승새끼의 옹알이 따위가 아니다. 썩 꺼져라!"
"꺄악! 치한이야! 누가 도와줘요...!"
그날에 왕국에서 들었던 말들 중 기억나는 것은 대충 이 정도.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더군. 아마 평범한 사람들에겐 내가 '말하는 돌덩이' 정도로 보였겠지.
*
"아니 잠깐만요!"
가만히 듣고 있던 안나가 테이블을 쾅 내려쳤어.
"첫사랑 만난 이야기한다면서 왜 슬픈 내용이에요? 행복한 이야기를 하라고!"
"...... 이제부터 하려고 했소."
안나가 의심쩍은 눈빛으로 째려봤어.
"이상한데........ 일단 계속해보세요..."
*
사람들에게 두드려 맞고 쫓겨나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다시 산을 올랐다. 내가 울면서 돌아오자 돌덩이들이 굴러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더군.
그때 깨달았다.
내가 돌덩이들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간다면, 나를 버린 부모와 다를 게 무엇인가. 내겐 이 작고 투박한 돌덩이들이 가족이었다. 사랑을 가르쳐준 가족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 다시는 사람의 곁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그렇게 4년이 더 흘렀다.
나는 평생 숲속에서 돌덩이들과, 동물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지. 모르는 새에, 나는 부쩍 자라 성인 남성이 되었고, 내 몸은 숲을 내려가 사람을 만나라며 강요하고 있었다.
공감, 이해, 관계, 소속감, 동질감, 가정, 성욕, 여자.
숲에선 충족되지 않는 수만 가지 욕구들이 나를 괴롭혔다. 인간이라면 응당 취해야 했을 것들을 평생 가지지 못한 채 살아온 남자. 나는 거의 미쳐가고 있었지.
보다 못한 돌덩이 할아범이 내게 말하더군.
"분명 왕국 어딘가에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여인이 있을 거다. 조만간에 나타나겠지. 그때가 되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 여인과 좋은 가정을 꾸리거라."
그때는 할배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여자를 만나기 한 시간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날은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먹을 음식과 급히 쉴 곳이 필요했다. 정말 싫었지만 사람이 있는 숲속 오두막 가게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할아범의 말대로, 그곳에서 운명의 첫사랑을 만났다.
*
"..................."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이 뒤는 별로 얘기해 주고 싶지 않군."
안나가 속 터진다는 듯이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어.
"아니 결국 첫사랑 이야기는 거의 없었잖아? 당신 인생이 정말 고통스러웠다는 건 알겠어요. 근데 내 빵집에서만큼은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라고 이야기를 시킨 건데!"
"이게 왜 고통스러운 이야기였지?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소. 내 첫사랑과 잘 살고 있으니까."
그때 올라프가 당근으로 범벅이 된 샌드위치 두 개를 들고 왔어.
"주문하신 당근 샌드위치입니다! 참고로 하나는 서비스에요. 딱히 저희 가게 서비스가 좋다며 소문내고 다니란 건 아니고요. 헤헤"
리크 씨는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안나도 따라서 벌떡 일어났지.
"그 첫사랑이랑은 어떻게 이어진 거죠? 돌덩이 가족은 결국 버린 건가요? 그 가면은 왜 쓴 거죠? 궁금한 게 정말 많은데 대답 안 하고 그냥 갈 건가요?"
리크 씨가 잠시 멈춰 섰어.
"그 질문들에 대해선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걸."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서려 하자, 안나가 다급히 외쳤지.
"잠깐만요. 진짜 마지막으로 이것만 대답해 줘요."
안나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를 바라보며 물었어.
"붉은 머리 빵집에서 보낸 시간이 행복했나요?"
"......... 행복했소."
*
리크 씨가 문을 나오자 수많은 인파들이 빵집 앞에 모여들었어. 다들 첫 번째 손님의 소감이 궁금했겠지.
"이봐, 여왕님 명령대로 당신이 나오기 전까진 아무도 안 들어가고 있었어. 정말 공주님이 빵을 만들고 주문도 받는가?"
"빵 맛은 어때? 우리 빵집이 밀리진 않겠지?"
"올라프는요? 올라프도 같이 있어요?"
리크 씨는 잠자코 있더니 사람들에게 말했어.
"이제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맛은 아직 안 봤지만....... 서비스는 좋더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빵집으로 들어갔어.
리크 씨는 조용히 인파 속을 헤쳐 나와 옆 골목의 마차 뒤로 걸어갔지. 그곳에서 순록 한 마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가면과 코트를 대충 벗어던지고는 순록에게 샌드위치를 물렸어.
"무우우우~~"
"걱정 마 스벤, 안나는 빵집 운영도 잘 할 것 같아. 그럼~ 누구 여자인데."
그는 남은 샌드위치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었어. 당근이 듬뿍 들어간, 첫사랑의 맛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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