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링크
3부
05. 아렌델 성 - 1820년 6월 21일
“안나는 네 마법을 좋아하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안나는 지금 아주 약하거든.”
엄마가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안나와 함께 사라진 내 옛 추억들이 점차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태어난 지 몇 시간 되지 않는 안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작았다.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을 지우기 전에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안나의 탄생 앞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내 동생은 마법을 쓰는 언니를 좋아하게 될 거다. 틀림없이. 누가 그런 언니를 가져 보겠어.
“안나가 얼른 커서 나랑 놀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3살이 된 엘사가 침대 곁에서 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사는 즐거워 보였지만 그 나이답지 않은 꼿꼿함을 보였다. 나는 저 때부터 여왕이었구나. 나는 살짝 웃었다. 안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66년의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엄마의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안나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기억을 지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 누구도 볼 수 없는 안나의 탄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었기에. 또 그 기억들은 반가웠고,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슬펐다. 안나의 탄생과 함께 죽음으로 향하는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동안 안나를 온전히 느껴야 했다.
06. 아렌델 성 - 1826년 9월 3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모두의 예상대로, 안나는 언니와 마법을 좋아했다. 이 아이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한 나라의 공주, 마법을 쓰는 언니, 그리고 그 언니는 안나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안나가 원하는 것은 모두 언니의 손안에서 피어올랐다. 심지어는 전용 마법사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언니는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현실적으로 행복해 보였다. 이대로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만, 어느 날 새벽 두 자매의 관계는 살짝 어긋났다.
이날 저녁, 두 자매는 조금 특별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마법의 숲 놀이,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아토할란의 이야기. 그리고 변함없이 새벽 놀이를 시작하는 엘사와 안나.
“엘사! 프슷!”
하는 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엘사!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작은 악동 하나가 엘사를 흔들고 있었다.
“안나, 가서 더 자.”
“잘 수가 없어. 하늘이 잠을 깨서 나도 깼어. 이제 나가 놀아야 해.”
“너 혼자 놀아.”
엘사가 안나를 팔로 밀어서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잠시 뒤, 안나가 다시 올라와서 엘사의 눈꺼풀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같이 눈사람 만들래?”
엘사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다음은 상황이 꽤 복잡하게 흘러갔다. 넓은 공간. 마법. 안나의 기대와 감탄. 사고. 해결책. 트롤의 마을. 지워지는 기억. 고립. 그리고 닫히는 문.
그날은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자자고 했지만, 엘사가 요청을 거절했다. 두려움은 곧 통제할 수 없는 마법이 되어 엘사의 주변으로 퍼졌다. 엘사는 다른 누군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엘사가 침대에 다시 누웠다.
나는 이 일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복잡하게 흘러갈 앞으로의 미래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토할란이라는 보험에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핑계로 그동안 묻어 놨던 비밀들. 괴로울 것이 틀림없어서 다가갈 수 없었던 공포를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엘사는 울고 있었다. 트롤의 마을에서 돌아올 때까지 의연하게 있었던 그 엘사답지 않았다. 얼어붙은 수분이 방 안 가득히 얼음 결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작은 눈송이가 되어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떠돌아다녔다. 어린 엘사가 잠이 들었지만, 눈송이들은 여전히 남았고, 침대는 서서히 얼어붙었다.
나는 그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울다 지쳐 잠든 그 애의 눈가에서 흘러나온 얼음을 슬며시 빼주고 싶었지만 내 손은 유령의 그것처럼 눈두덩을 통과했다. 나는 그 애의 머리 쪽에 걸터앉아 머리를 한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런 감촉도 없었지만 그런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안나가 나를 위해 그런 일을 할 정도로 행복했고 너도 그럴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 일의 끝은 해피엔딩일 거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모든 일의 시작을 마주하고 있었다. 잠시 창을 통해 하늘을 보았다. 북쪽 하늘엔 오로라가 걸쳐져 있었다. 안나의 말대로, 하늘이 깨어 있었다.
나는 복도로 나섰다.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문을 지났다. 당연하게도 경비원은 나를 볼 수 없었고 닫혀 있는 문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나는 유령처럼 문을 지나갈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아렌델 뒷문으로 나와 계단을 걸었다. 강인지 바다인지 모를 곳을 배경 삼아 바위 하나에 걸터앉았다. 강 건너 북쪽엔 눈으로 덮인 높은 산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엘사? 드디어 온 거야?”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눈덩이 3개로 만들어진 눈사람 하나가 나뭇가지로 된 앙상한 팔을 흔들며 나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당근으로 만든 코, 검은색 돌 세 개를 박아 넣은 몸. 조금 작은 눈뭉치를 뭉쳐 만든 두 발. 호기심 많은 동그란 눈과 커다란 입.
나는 눈을 비볐다. 그리고 눈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그 눈사람을 보았다.
“넌 누구야?”
“아 참 그렇지. 넌 기억이 없지.”
눈사람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는 올라프야!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렸다고?”
“그래, 참 오래 기다렸어. 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 알고 있어? 참 모르겠구나. 그래서 날 만든 거니까. 넌 네 생각보다 아주 똑똑해.”
올라프는 아장아장 걸어서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젠가 네가 이곳에 찾아오면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
나는 올라프를 안아 들었다. 올라프가 흐흐흥 하고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내 한쪽 뺨에 그 앙상한 팔을 얹었다.
“지금 네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올 수 있었는지는 몰라.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건 네가 아니야. 넌 장난을 좋아하고 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초콜릿을 좋아해. 안나가 생각했던 말도 안 되는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만큼 안나를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네가 한 가장 멍청한 실수일 거야.”
올라프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짜 너라면 절대로 안나를 잊지 않을 거야. 앞으로 영원히 살아가면서 안나를 그리워한다고 해도. 그런 게 너니까. 앞으로 13년 동안 고독이 시작될 거야.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지만, 너와 안나는 그 끝없는 시간을 버티면서 서로를 생각했어.”
“올라프.”
“음?”
“아니 그냥. 이제 들어갈까?”
“어? 아직 전해 달란 말이 남았는데?”
“가면서 얘기해도 돼.”
나는 올라프의 손을 잡고 다시 엘사의 방으로 향했다. 올라프는 정확히 과거의 내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이제 더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난 참 철저한 사람이었나 보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를 받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이런 것까지 만들다니 말이야. 거기다가 내가 이곳에 올지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나저나 13년의 고립이라. 나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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