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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대회 우승작] 얼어붙은 이방인 - 27

엘사v안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10 01: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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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아렌델 성 - 186313/ 현재 1973


나는 42살 먹은 아렌델의 여왕, 안나의 재롱을 보고 있었다. 대화에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안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가 이 시간대에 오면 안나는 이런 대사를 영원히 반복할 거다. 안나는 정말로 내 대사를 생각하면서 대본을 짰을 거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얼마든지 이곳을 방문할 수 있다.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다면 안나의 대사에 맞게 내가 대사를 짜면 된다. 한 나라의 여왕이 밤이 되면 혼자 이러고 있다는 우스운 비밀을 알고 싶다면 안나가 저대로 뭘 하든지 내버려 두면 된다. 아무리 안나라도 이런 부끄러운 비밀을 들킨다면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까? 나는 안나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나에게 사형을 내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건 그것대로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안나가 내 기억을 지운 진짜 이유를. 안나가 이런 상황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즐거웠다. 안나가 죽을 때까지 20년 남짓 남았다. 나는 안나의 말을 힌트 삼아 안나의 비밀 연극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대체 이런 연극을 얼마나 많이 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미래의 엘사는 안나와 노는 걸 그냥 재미라고 했다. 확실히 이런 건 재미있었다. 그 엘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토할란의 심연에 빠진 이후, 나는 한 번도 진심으로 즐거운 적이 없었다. 그저 안나와의 추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다. 대부분은 슬펐다. 안나는 이제 죽었고 이곳에 있는 건 안나의 기억일 뿐. 살아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언뜻 미래의 엘사가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 생각이 났다.

안나가 날 생각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친언니에 대한 사랑. 영원히 살아가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괴로움. 어쩌면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신성함. 얼음 마녀와도 같이 차갑고 도도한 완벽한 여왕뭐 그런 비슷한 것들이 모두 합쳐졌겠지.

나는 안나가 펼치는 연기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 맞아. 대관식 날 그때 그랬어. 기억나지?”

안나는 행복해 보였다. 오히려 내 기억을 지우지 않았더라면 느낄 수 없는 행복이었다. 안나는 내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걱정 없는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내 기억을 지울 때까지 둘 사이에서 오갔던 보이지 않던 물밑 작업들. 이런 게 있었기에 두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안심하며 패비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었다.

안나는 자기가 우습게 보인다는 것도 아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자신의 연극을 마음껏 이용해서 즐기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런 재미를 한 번에 끝내는 건 옳지 않아 보였다. 안나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건 항상 마지막에 먹어야 했다. 지금 안나가 까먹고 있는 초콜릿처럼. 안나는 지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은 손대지 않았다.

언니는 머리가 좋잖아? 이런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지?’

안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때로는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었으니까. 아니, 절대 말로 하면 안 되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니까. 지금 볼 수 없어도 다음에 보면 된다. 내게 남는 건 시간뿐. 명작이란 보면 볼수록 그 맛이 깊어지는 법이었다. 안나가 남긴 메시지를 지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계속해서 보고 다시 한번 볼 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디테일이 보이게 될 테니까. 나는 그렇게 안나의 연극을 지켜보며 안나가 말해주는 다음 시간대를 기억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토할란으로 향했다. 이번에 목적지는 안나가 말해주는 시간대가 아니었다. 나는 그걸 최대한 오랫동안 즐겨야 했다. 그리고 다음 연극은 어떤 내용일까 상상하는 기대감을 마음껏 느끼는 것도 그걸 즐기는 방법의 하나였으니까.

나는 문득 길고 길었던 과거에서의 여행의 끝을 느끼고 있었다. 안나의 연극을 즐기려면 이제 이곳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이곳에 갇혀서 영원히 아토할란과 함께 하는 건 이제 아무 의미도 없다. 처음에 생각했던 66년은 아니었지만, 안나와의 추억을 찾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주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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