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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그대.”

따갤러(218.154) 2023.09.20 05:25:58
조회 177 추천 1 댓글 0

내 발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발소리 뿐 아니라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이다. 숲이 아니면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들리는 고요의 공간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되돌아오는 길에선 공허함이 밀려오고 후회가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숲 속은 다르다. 늘 정겹고 감사한 마음을 안겨준다. 숲은 내 바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던 지난날의 시간을 역전 시켜준다. 고요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해준다.

그저 내 감각이 읽어 들이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사실이 벅차다. 심장을 뜨겁게 하는 멋진 문장을 만나거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감미로운 선율을 듣거나, 아름다운 그림을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을 숲이 전해주었다.

가을 숲이라 하면 보통은 아름다운 단풍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단풍에게 뒤지지 않는 것으로 발걸음 소리도 있다니 대단한 발견을 한 기분이었다. 그러므로 새소리나 물소리만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작은 걸음 소리에 기쁨을 느낀 건 직전에 만난 아기 단풍나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숲으로 막 들어서는데 단풍잎이 보였다. 손가락 정도로 작은 잎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혹시 떨어진 잎인가 해서 살짝 들춰보니 세 가닥으로 뿌리내린 아기 나무였다. 조금 위에도 작은 단풍나무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훨씬 큰 것이었고, 여전히 초록빛으로 성성하게 서 있었다. 헌데 그 어린 것이 벌써 겨우살이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니 눈물겹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주변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 겨우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너무 가늘어서 조금만 센 바람이 불어도 금방 꺾이거나 쓰러질 것 같고, 누군가 모르고 밟았다면 다시 살아나기도 어려울 만큼 작은 것이 제 살 궁리도 다한다 싶었다. 스스로 약한 것을 알아차리고 일찌감치 몸 단속에 나선 것인가 생각하니 감동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단풍나무를 보고 난 뒤에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 감동 이 채 가시기 전이었기에 색다르게 들려왔을 수도 있다. 내가 내 발소리에 취하기도 하는 가을 숲이라니, 아직 단풍 들지 않은 숲길에서 내 몸이 단풍이 된 듯 기뻤다. 그러고 나니 몸도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다. 쓸데없는 욕심 몇 가지가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더 풍물이 들었던 것일까.

그러면서 문득 <걱정 말아요. 그대〉가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이 노래를 큰 소리로 재생 시켰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버리고
(중략)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거친 음색의 전인권 목소리로 먼저 듣고, 이적의 노래로 다시 들었다. 이적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가슴에 파고들면서 어루만져 주었다. 가녀린 아기 단풍나무조차도 힘을 내어 살아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가사 하나 하나가 마음속 깊숙이 스며들면서 긴 시간 외부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새끼손가락처럼 작은 나무에게서조차 적지 않은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다니.
가슴 뜨거운 오후 산책이었다.

-김건숙, <비로소 나를 만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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