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Carl Gustaf Wrangel: 구스타프 아돌프의 스승이었던 Herman Wrangel의 아들. 이후 토르스텐손의 뒤를 잇는 중요 캐릭터.
<그림 2> Matthias Gallas: 악명높은 Merode Bruder의 대장. 바네르의 활약에 프랑스를 압박하는 것을 놓아둔 채 북부로 파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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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의 제국군 가담>
비트스토크의 전투에서 승리한 스웨덴군은 Eisenach까지 진격하다가, 이후 작센에서 겨울철 숙영지를 만들고 그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습니다. 바네르는 Wrangel의 병력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으로 파견하여 그 지역을 점령하는 한편,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Gerog Wilhelm 변경백을 위협하여 그들의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이것은 스웨덴의 참전 초기 구스타프 아돌프가 했던 똑 같은 행동이었지요.
하지만, 요한 바네르는 뛰어난 장군이기는 했지만, 구스타프 아돌프의 포쓰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게오르규 빌헬름 변경백은 브랑겔의 병력이 그를 위협하자, 오히려 황제에게 접근하여 스웨덴에 대항하는 병력을 일으킵니다.
<라이프치히 공성전>
Leipzig는 작센의 수도였습니다. 물론 현재 수도 내에 작센 대공은 없었지만, 이곳의 점령은 작센 남부로 내려 갔을 때, 스웨덴군의 통신망 및 보급선 확보에 매우 중요했지요. 바네르는 내친 김에 라이프치히를 점령하려 합니다. 1636년-1637년의 겨울을 작센에서 보낸 바네르는 1637년의 캠페인을 라이프치히 공성전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느 사람에게나 약점이 있듯이, 기동전의 대가인 바네르는 공성전에 좀 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또한 라이프치히 내의 수비군은 작센 영토 내에서 바네르의 스웨덴군이 벌인 잔혹한 약탈과 방화 행위를 똑똑히 알고 있었으므로 필사적으로 격렬하게 저항하지요. 하지만 서서히 라이프치히는 붕괴되어 갔습니다.
Grimma 성문 아래 대규모로 묻은 폭약을 두 번에 걸쳐 폭발시켰으며, 여기에 대포의 포격이 더해져 성벽에는 약 10m 너비의 돌파구가 생겼습니다. 스웨덴군은 공성용 사다리를 설치하고 단창(短槍)과 수류탄, 도끼를 지참하기 시작하는 등 본격적인 공격 준비를 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이미 밤이 왔기 때문에 사격은 멈추었고, 공격은 다음 날로 미루어졌습니다.
<후퇴하는 바네르>
다음날 아침, 스웨덴군의 대공세를 대비하며 긴장하고 있던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은 스웨덴군이 후퇴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지요. 작센군의 잔존 병력과 부르군디에서 후퇴한 갈라스의 병력이 라이프치히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바네르의 병력이 14,000명이었는데 반하여, 갈라스의 병력은 47,000명에 이르고 있었지요. 3배가 넘는 병력차이로는 바네르도 어찌할 수가 없었으며, 그는 Torgau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네르는 이곳에서 참호를 파고 수비 태세를 갖추었지만, 제국군은 서서히 바네르를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바네르는 적에 비해 3분의 1의 병력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보급, 군대의 질 등 모든 면에서 적에 비해 큰 열세에 있었지요.
<바네르 군의 상황>
그 당시 바네르군에는 용병 이외에도 핀란드 및 스웨덴에서 온 국민병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구스타프 아돌프가 이끌었던 1631년 당시의 정예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야전과 공성전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으며, 대부분 병으로 죽었습니다. 베테랑 병사들은 계속해서 줄어 갔지요.
스웨덴-핀란드군은 충성심이 강했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도 드물어 요새를 경비하는 데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스웨덴 신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경험이 워낙 부족해서 야전에는 매우 약했습니다. 야전의 대가인 바네르는 선택권이 있다면 스웨덴군이나 스코틀랜드 용병, 아일랜드, 잉글랜드 용병 보다는 베테랑 독일 용병대를 선호했다고 전해 집니다.
또한, 그 당시 병사들은 기본적인 위생학을 몰랐으므로, 진영은 오물과 시체, 배설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미 이런 것에 면역성을 가지고 있는 베테랑 독일 용병들은 버틸 수 있었지만, 스웨덴 신병들은 질병으로 뭉텅이로 쓰러져 갔지요. 1637년의 여름은 특히 더위가 심했으며, 이로 인해 전염병은 더 무시무시하게 번져 갔습니다. 결국 병에 견뎌 냈던 베테랑 용병들조차 한 덩어리로 쓰러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웨덴군의 경험 많은 장교 대부분은 스웨덴의 신병을 교육시키기 위해 스웨덴으로 소환되었으며, 젊은 귀족들이 전쟁 경험을 쌓기 위해 이들을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바네르는 이러한 긴장하고 젖비린내 나는 소년들을 좋아하지 않았지요. 바네르는 옥슨쉐르나에게 이 소년들은 진짜 군인의 부츠가 어울리는 나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불평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면서 패배를 직감한 고급 장교들부터 일반병에 이르기까지 탈영이 끊이지 않았고, 병으로 쓰러지는 병사는 늘어만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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