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악몽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이야기는 서진이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흘러나오곤 한다. 때로는 자신도 몰랐던 진심에 서진이 놀라기도 한다. 새로운 이야기. 그것은 서진과 하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 하나씨!!"
하나가 원망과 혐오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의 손에는 서진이 방금 그린 장면이 들려있다.
"이게 뭐죠?"
"그건.."
"왜 로빈인 척 하는 거죠?  왜 로빈이  남긴 작품들을 당신 것 인것처럼 구는 거죠?"

"왜냐니요? 내가 로빈이에요, 로빈이 나라구요!"
"무슨 소리야?  당신이 로빈을 죽였잖아,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로빈인데!"
"내가 로빈이에요, 당신과 사랑했던 기억이 다 내 안에 있어!"

"당신이 빼앗은 거야, 그 기억마저.. 두 사람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괴물이야!"


소스라쳐 눈을 뜬다.

퇴근하고 나면 서진은 새 작품에 몰두했다. 그 안에서 그는 의심없이 두려움없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이면 다시 불안하고 나약한 내면의 나, 가 고개를 든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구서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그녀에게 뭐라 말해야할까?
하나씨, 내가 실은 로빈이에요..
라며 내가 로빈인 증거를 보여줘야하는 것일까?
내 안의 로빈의 흔적을 보여주어야만 그녀는 비로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일까.
지금 이대로는, 온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나, 가 아닌 것일까.

밤마다 서진은 조각난 기억들, 여러 가지 얼굴을 지닌  자기 자신과 뒤엉켜 신음했다.

기억속의 하나가 속삭인다.

"로빈, 우리 내년에도 또 가요. 그리고 내년엔 꼭 작품으로 상 받아요.
봄이 되면 별장에 농장을 꾸며봐요. 동물도 키워봐요."

하나의 바람에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천진하고도 소박한 그녀의 바람을 들으며 가슴이 아렸었다. 어떤 약속도 할 수 없는 사람. 내일이 없는 사람.

겁이 난다.
이런 나라서,그녀를 잃을까봐.
또 다시 그녀를 힘들게 할까봐.
발걸음이 무너진다. 늪에 빠지는 것처럼 온 몸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구서진, 눈을 떠!! 여기서 도망치면 나 다시는 당신 안 볼 거야!!"

저 깊은 어둠으로 도망치던 서진은 불현듯 눈을 뜬다.

"상무님, 자기 자신을 믿어봐요.
잘 했어요, 잘 해낸 거에요.
바람대로 되었네요. 더 좋은 사람이 되었잖아요."

그래요, 하나씨. 당신이 걱정하고 사랑했던 나는.. 괴물이 아니었죠?
나는.. 당신의 바람대로 조금씩 좋아지고 있죠? 잘 해내고 있는 거죠?

서진은 눈은 들어 악몽 속에서 떨고 있는 하나를 바라본다.
고요하게 그녀를 안아준다.
\'하나씨, 겁먹지 마요. 난 이제 도망치지도 나 자신을 파괴하지도 않을 거에요.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줘요. 내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