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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34.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247) 2019.04.14 21:31:33
조회 648 추천 4 댓글 1


34.

금요일 오후.
하나의 마음은 바빴다. 이제 마지막 자문 회의다. 이제 세부적인 내용은 대체로 원더랜드 기획팀으로 넘어갔으나 모든 것이 마무리될 때까지 하나가 준비할 것은 여전히 많았다.
단원들과 다시 한 번 프로그램 내용을 바쁘게 정리하고 있을 때, 구회장이 하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연락이 왔다.

"요즘, 서커스단 일로 많이 바쁘다면서요?"
"네, 회사에서 신경써 주신 덕분에 여러 가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 며칠 서진이랑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어요. 분명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내 말을 잘 알아듣고 떠나줬다고 생각하는데, 왜 굳이 이제와서 서진이를 다시 만나는 지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 장단장을 보자고 했어요."
역시, 구회장은 하나와 서진이 만난 것을 알고 있었다.

"서커스단에서 리오프닝을 위해 새로운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로빈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퍼레이드이기 때문에 상무님과 만난 것일 뿐,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 개인적으로는 아무일도 없었다, 서진이한테는 아무 감정이 없다.. 그 말인가?"

하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침착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해야 한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면, 서진에게 두고두고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때는."
"제 자신이 많이 혼란스러웠고, 상무님을 걱정하시는 회장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진심으로 상무님께서 새로운 출발하시기를 바랐고, 행여 제가 그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났던 것이지 회장님께서 떠나라는 말씀이 겁이 나서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침착하자. 숨을 삼킨다.
"이번에도 원더랜드에서 리오프닝을 준비하고 있고, 서커스단 체험 프로그램이나 퍼레이드, 베네치아홀 리오프닝 공연 등 원더 서커스단의 부활을 위한 기회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 역할을 하기 위해 돌아왔을 뿐 상무님과 어떤 인연이 되기를 욕심내고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가에 눈물이 고일 것 같아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과거에 로빈과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해서 상무님과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전에 상무님께서 조금이나마 저에게 마음을 주셨다면 그것은 상무님의 특별한 상황 때문이었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변화된 상무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저라도 좋다고 해 주신다면, 저는 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솔직하게 다가가고, 상무님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뭔가? 서진이하고 연애라도 해 보겠다는 말인거요?"
구회장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먼저 욕심내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상무님이 다가온다면 두 번 다시, 상무님을 밀어내지는 않겠습니다."

하나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구회장이 겁나서는 아니었다. 또다시 구회장의 언사에 비참함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이 며칠, 하나도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마음을 진주에게조차 털어 놓을 수 없었다.
우연이든  서진의 우격다짐이었든,  서진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하나에게도 더할 수 없이 설렜다.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서진의 마음을, 하나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서진을 밀어내기만 했던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구회장을 대면하게 되면서 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온 자신의 진심에 그만 자기가 놀라고 말았다.
울음이 새어 나온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마음을 먹고 있었나.


회의를 핑계로 구회장에게서 물러나온 뒤, 하나는 누가 자신의 모습을 볼새라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곧 회의시간이다. 서둘러 흐트러진 얼굴을 정리하며, 하나는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래, 욕심내지 말자. 하지만 상무님이 다가온다면, 이제는 밀어내지 말자. 그 마지막이 상처가 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태연한 척 애쓰며 급히 회의실로 들어서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정신 차리자. 서커스단 단원들의 생계가 걸려있다. 이 일이 잘 성사된다면, 단원들은 나이가 먹어가도 부상 걱정없이 안정적인 일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침착하려해도 테이블 저 너머의  그에게로 자꾸만 마음이 쏠린다. 무엇때문에, 이리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하나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회의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조언을 들으면서 하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서커스라는 분야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야할 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문 위원들이 각자 인사를 마치고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온 몸의 긴장이 풀려 하나는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장단장님! "
공연 기획팀의 김대리다. 서커스단 담당 직원이기도 하다.
"장단장님, 오늘 상무님께서 모두들 고생하셨다고 팀장님한테 카드 주고 가셨대요. 저희 회식 가는데 장단장님도 같이 가요."
"제가요? 팀원분들 가시는데 제가 눈치없이.."
고단한 하루였다. 당장에라도 어딘가에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 프로젝트가 실현되기까지 도움을 받을 팀원들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신세를 졌다. 아직 퍼레이드 건도 남아있어, 하나만 회식에서 쏙 빠지기는 어려웠다.

"아녜요, 저도 참석할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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