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금요일 밤3

"하나씨, 많이 피곤하지 않으면 차 한 잔 하고 들어갈래요?"

긴 포옹을 풀고 잠시  어색하게 서 있던 두 사람. 정적을 깨고 서진이 물었다.

"상무님은 괜찮으세요, 너무 늦었는데."

"금요일이잖아. 내일은 스케쥴 없어요."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하나가 시계를 보이며 말했다.
"아닌데, 지금 토요일인데요? 상무님, 그러지 말고 우리 저쪽 편의점에 가서 맥주 한 캔씩만 하고 가요. "

하나가 서진의 팔목을 잡아끌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직은 여름의 기운이 남아있는 가을 초입. 바람이 기분좋게 지나간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달려가는 자동차의 불빛을 두 사람은 말없이 바라본다.

"상무님, 제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내 카드로 2차까지 엄청들 먹은 거 몰라요?"
"하하, 그랬구나. 그래서 어디있는지 알고 여기까지 저 보러 오신 거에요?"
"..."
"근데 다른 사람들이 막 3차 가자고 하고 그러니까 막 상무님이 화 나고 그러신 거에요?"
"..."
"그리고 제가 혼자 다니니까 걱정되고  막 화나고 그러셨던 거에요?"
"... 아까 다 들어놓고 뭘 자꾸 묻지?"

서진이 약간 토라진 투로 맥주를 삼키며 묻는다.

"좋아서요.질투해주는 게 좋아서요.
걱정해주는 게 좋아서요."
하나가 싱긋 웃는다.

"아빠  살아계실 때도 아빠가 걱정하실까봐 힘들다, 속상하다 그런 얘기 못 했어요. 그래도 아빠는 다 알아차려줬어요. 우리 하나,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이라고 말은 못 했어요. 그래도 그걸로 충분했는데..
근데, 오늘 상무님이 이렇게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와 주셨잖아요. 그게 너무 좋아서요. "

술기운일까, 눈가가 촉촉해진 듯한 하나가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천사의 다리에서 상무님 처음 봤을 때요, 저처럼 속상한 일 얘기 못 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더 지켜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베네치아에서 혼자 지내면서 생각했어요. 그 시절의 상무님은, 속상한 일을 얘기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얘기할 사람이 없었던 거구나. 상무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힘들었구나. 그런데 나마저 상무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여기로 도망쳤구나.. 그게 너무너무 미안해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어요."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곳은 어땠어요?"
서진이 조용한 목소리로 묻는다.

"가라앉고 있는 도시를 보러 갔는데, 거기엔 온통 로빈과 구서진 뿐이었어요.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로빈인가, 가슴이 철렁했어요. 변해가는 나를 로빈이 원망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요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자꾸 상무님 생각이 나는 거에요. 전 상무님 웃고 있는 걸 별로 본 적도 없는데요. 그때 알았어요.
내가, 보고 싶구나.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을.
그래서, 돌아왔어요. 다른 욕심은 없어요. 상무님이 걱정되고,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요."

이걸로 충분하다. 여전히 날 걱정해주는 마음 하나면.

"고마워요, 돌아와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