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하루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리웠던 날들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서진은 하나를 무릎에 눕히고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까페 사장이 데이트를 청했다는건가?"
"네, 그렇다니까요. 나처럼 인형같이 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면서.. "

서진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싫다고 했겠지."

하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진을 올려다본다.

"왜, 싫다고 해요? 나보다도 어린 남자한테 데이트 신청 받아본 건 처음인데.."
"뭐? 연하남?"
"게다가 잘생기고."
"연하남에 미남?"
"거기다 커피도 잘내리고."
"연하남에 미남에 커피까지?  그래서, 데이트를 했다는 건가?"

하나가 코를 찡긋한다.

"제가요,  한국에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남친 있다고, 그러니까 데이트는 못 한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는데.."

순식간에 눈물이 고여 흘러내린다.

"서진씨 얘기를 하려고  하니까, 갑자기 이렇게 눈물이 흘러나와버려서.. 그 사람이 깜짝 놀라 사과하고 가 버렸어요. "

누군가 건드리기만해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았던 그 시간들.
서진이 조용히 눈가를 닦아준다.
하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서진의 목에 팔을 두른다.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안겨서 어리광도 피우고 싶었고."

"잘 됐네, 난 나만 마음 아픈 줄 알고 억울했는데. 또, 얘기해봐요 어땠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나 얼마나 생각했는지..."

하나를 응시한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마음 속의 이야기를 꺼낸다.

"다시 만났을 때, 혼란스럽지 않았어요? 내가  구서진인지, 로빈인지, 알 수 없어서? 혹시.. 괴물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하나의 손이 서진의 뺨을 감싼다.

"바보..  그것때문에 걱정했어요?

어느날 알았어요. 사라질까 두려웠던 건 로빈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소멸을 각오하고 나를 사랑해준 사람은,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닌 단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서진씨는 정말 강한 사람이에요. 그 시간동안 정말 많은  일들을 잘 해냈잖아요. 가까이 가는 게 겁이 날 만큼, 눈부신 사람이 되었어요. 내가 알던 사람이 맞을까, 감히 내가 마음을 주는 것이 욕심으로 느껴질만큼.. 괴물이 아니고, 눈부시게 좋은 사람."

"다시 만날 때, 부끄럽지 않고 싶었어요. 늘 내안의 당신이 날 지켜줬어. 잘 한 거라고, 오늘도 더 나아졌다고."

서로의 눈빛이 따뜻하게 닿는다. 환하게 웃는다. 꿈일까, 싶을만큼 마음이 벅차오른다.

문득, 하나의 눈이 반짝인다.

"서진씨, 우리 내일은 같이 산책 나가요. 햇빛 속에서 마음껏 손잡고 걸어요. 아, 영화관에도 가요. 팝콘도 사 먹고 영화도 실컷 봐요. "
서진은 말없이 웃는다.

"또요?"
"수족관에도 가요, 사진도 잔뜩 찍고. 가평 별장에 드라이브도 가요."

재잘대는 하나가 너무 귀엽다는 듯이, 서진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윽고 입을 연 서진...

"나는..  약속이란 걸 해 보고 싶었어요. 비록 다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내일, 또 그 내일을 꿈꾸고 싶었어요."

"이제, 해봐요, 우리. 나여도 될까, 망설이지 말고 마음이 시키는 거, 다 해봐요."

순간, 서진의 표정이 응큼해진다.
"마음이 시키는 거, 다 해도 된다구요? 그럼 이것도 되나?"

다가온다. 천천히. 망설인 순간들이 아쉽다는 듯이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