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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이 내려가라고 지시" 임성근 직속 여단장 진술
채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MBC는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임성근 1사단장 직속 7여단장의 진술서 전문을 최초로 입수했습니다. 7여단장은 임성근 사단장이 직접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습니다. 작전을 지시하지 않았다, 지시할 권한이 없어 책임도 없다는 것이 임성근 전 사단장의 주장입니다. MBC는 현장에 투입됐던 해병대 1사단 직속 7여단장의 진술서를 확보했습니다. 7여단장은 임성근 1사단장의 직접 지시를 받아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임 사단장은 당시 현장 작전통제권은 육군으로 넘어가 자신은 지휘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7여단장의 진술은 반대입니다. 채 상병 사망 전까지도 작전통제권을 가진 육군과의 원격화상회의, VTC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육군 50사단장이 찾아와 작전 지도를 한 적도 없었습니다. 반면 임성근 전 사단장은 지휘권이 없다면서도 수색 작업 첫날인 7월 18일 현장을 찾아 작전 지도를 한 뒤, 저녁 8시 30분엔 화상회의도 직접 주재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임 전 사단장이 "전반적으로 작전에 대한 평가와 지침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수변으로 내려가서 장화를 신고 작전을 수행하라"는 등 임 사단장의 세세한 지시도 이때 나왔습니다. 7여단장은 자신은 "해병 1사단장의 지침을 받아 작전을 수행한다"며 임성근 전 1사단장이 현장을 사실상 지휘했다고 밝혔습니다. 7여단장은 부대를 이끌고 출동하기 직전까지도 실종자 수색이 주 임무란 사실을 몰랐다고도 했습니다. 그나마 안전 관련 지시는 우선 순위도 아니었습니다. 7여단장은 출발 직전 임 전 사단장으로부터 '실종자 수색 작전에 우선순위를 둬라', '복장은 해병대 적색 상의 체육복에 정찰모로 통일하라'는 지시부터 받았습니다. 7여단장은 구명환이나 로프같은 안전장구를 준비했더라면 물에 빠진 채상병을 구출할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너무 많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임 전 사단장은 실종자 수색 임무를 몰랐다는 건 "일부 인원의 책임전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1348777 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1348774 - [단독] "임성근 사단장이 다 지시"‥직속 여단장의 증언잘가라 부하살인마새끼야 - dc official App- [단독] 박정훈 '항명 혐의' 기소했던 군검사도 입건채 상병 순직 사건을 경찰로 넘긴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의 결정이 항명, 그러니까 명령을 어기고 한 독단적 결정이었다는 게 군의 입장이죠. 그런데 저희 취재 결과 박 전 단장을 항명 혐의로 기소한 군검사도 국방부에 입건된 걸로 확인됐습니다. 박 전 단장이 군검사가 허위 사실로 자신을 구속하려했다고 주장하며 고소했는데, 국방부도 이런 주장을 그냥 외면하긴 힘들다고 판단한 걸로 보입니다. 군 검찰이 지난해 8월 30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해 군사법원에 낸 구속영장 청구서입니다. 박 전 단장이 채 상병 순직사건을 경찰로 넘긴 게 항명이고, 그래서 상관의 명예를 훼손했단 겁니다. 그러면서 박 전 단장이 진술한 이른바 'VIP 격노설'은 "망상에 불과하다"고도 적었습니다. 박 전 단장이 "휴대전화 기록을 다 지웠다"고 진술한 만큼 증거인멸 우려도 있으니 구속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JTBC 취재결과 국방부 조사본부가 이 고소의 내용을 검토한 뒤 해당 군검사를 피의자로 입건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박 전 단장 측의 주장을 그냥 외면하긴 힘들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조만간 해당 군검사의 소환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조사 결과, 박 전 단장에 대한 영장 청구가 무리였다는 정황이 나오면 채 상병 수사 외압 사건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박 전 단장은 이번 고소와 관련해 국방부 조사본부에 나가 먼저 조사를 받으며 대통령실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해병대 사령관과 대통령실이 여러 차례 통화했단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군검찰이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 VIP 격노설이 망상이라면 피해자가 되는 대통령도 조사를 검토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392782
작성자 : 정치마갤용계정고정닉
일본의 섬노예 사건 (일본의 신안)...jpg
전라도의 염전 노예 사건들을 보고 미개하다고 극딜하는 일본이지만, 그런 그들도 예전에는 엄연히 섬노예를 쓰고 있었던 나라야. 이 사건은 나사케지마(情島 - なさけじま) 한자로 '정' 이라는 이름을 가진 섬에서 벌어진 비정한 이야기야. 쇼와 23년 (昭和23) , 서기 1948년 7월, 세토내해(瀬戸内海) 에 떠있는 야마구치현의 야시로지마 (屋代島) 에 초췌한 몰골을 한 19세, 17세의 소년들이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어. 이들은 맞은 편에 있던 나사케지마(情島)에서 조업 중인 어선 등에서 노를 젓는 등, 강제노동을 하던 노예 소년들이었지 옛날부터 나사케지마에는 카지코(梶子 - かじこ) 라 불리우는, 어선의 키를 잡거나 노를 젓는 역할을 아이들에게 맡기는 풍습이 있었어.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가난한 집 아이들을 사다가 3-5년 정도 부려먹고 내보내곤 했는데, 패전 이후 더욱 일손이 부족해지자, "물고기를 배터지게 먹게 해주마" 같은 말로 데려온 뒤 통수쳐서 가혹한 노예 생활을 시키게 된 거야. 이 섬노예 소년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1시가 되서야 잠이 드는 강제 노가다충 생활을 매일 지속해야 했고, 조업을 완전히 쉬는 일부 명절을 제외하고 쉬는 날은 존재하지 않았어. 거기에 매일 지속되는 가혹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거의 식사를 주지 않아서 당초의 물고기를 배불리 먹여주겠다는이야기는 다 거짓부렁이었고 영양실조로 나날이 여위어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물론 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무튼 두 소년의 발견으로 이 사건이 지방 신문에 알려지고, 경찰과 정부의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지. 이 때 당시 발견된 노예 소년 들의 수는 약 50명. 지금의 나사케지마의 인구가 13명인데 비하면 많은 숫자였어. 물론 각자의 사연도 기구했는데, 빚을 갚지 못해 아이가 부모의 차금 대신 팔려온 경우, 전쟁 고아인 경우 심지어는 소년원(그 당시의 감화원-感化院-) 이나 고아원에서 원장의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비밀리에 섬으로 팔아넘긴 경우 등등 근대화 된 사회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줄줄히 터져나왔지. 거기에 해당 사건으로부터 2년 정도 전에 한 소년을 우리에 감금한 뒤 굶겨죽인 사건도 발각되었지. 감금한 범인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모든 정황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섬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행정관계자나 기자, 경찰들조차 이 사건을 이해하는 "척" 을 했을 뿐이야. 패전 이후 일본도, 천조국 성님들에게 "기브 미 쪼꼬레또" 를 외치며 따라다니던 상황이고 모두가 빈곤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입장이라는 사고 방식이 강했고, 당연히 전쟁 고아들도 넘쳐나는 상황이었지. 그런 상황에서 섬노예 소년 하나 둘 쯤 굶어 죽는 것이 무'슨 상'관 이냐는 분위기가 강했고 하다 못해 변변치 않아도 밥이라도 주는 게 어디냐며 이런 섬노예를 "필요악" 으로 까지 보는 인식이 강한 상태였어. 이 사건에서 정부가 해준 것은 12세 이하의 아동에게 노동을 강요하지 말 것, 의무 교육을 받게 할 것 법에 의하지 않은사형(私刑)을 하지 말 것을 문서화 한 것에 불과했고, 섬노예 소년들을 이용한 어업 활동은 그대로 유지되었어. 굶겨죽인 1명의 소년 이외의 소년들에 대한 강제 노동 등은 전부 불문에 부쳐졌고, 실제로도 형사 사건화 되지 않았지. 이 사건으로 10여명의 소년들은 섬을 떠났지만 대다수의 소년들은 섬에 남았어. 섬을 떠나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도,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지. 이렇게 종결되는 줄 알았던 섬노예 사건은 3년 후인 1951년에 학대를 견디지 못한 5명의 소년들이 탈주함으로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 그 사건 당시 정부의 지도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정부가 묵인하는 모습을 보고 강제 노동 등 대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밝혔어. 이 사건을 소재로 NHK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카지코(舵子) 라는 대하 드라마를 만들었고, 1957년에는 분노의 고도 (怒りの孤島) 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지. 이 나사케지마 외에도 이 당시 일본의 농촌이나 어촌 들에서는 인신매매에 의한 가혹한 노동이 강요되는 사건들이 각 지역 풍습으로 남아 있었어. 오키나와 이토만 지방의 이토만우리(糸満売り - いとまんうり) 오키나와 케라마 제도(慶良間諸島)의 케라마우리 (慶良間売り) 오키나와의 빈농이 부농에게 자식을 노동력으로 파는 인쟈(インジャ) 미야기 현(宮城県) 의 모라이코(モライコ) 등 각 지역에서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도시로 노동력이 이동하고, 한국 전쟁 등의 특수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는 60대 중 후반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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