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홍채 1

소리 2007.01.06 00:30:44
조회 115 추천 0 댓글 3




"이봐, 닥터 리." "예?" 브리핑을 마친 후 나오려던 나를 과장이 붙잡았다. 내가 어수룩하게 서 있는 사이 동료 의사들은 갖가지 눈짓들을 하며 나가버렸고 곧 과장과 나만이 남았다. 과장은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책상 앞의 차트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전공이... 아동 심리학이었지, 아마?" "네." "그럼, 이 환자 좀 봐주지 않겠나?" 과장이 심드렁하게 내민 차트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날려 쓴 엉성한 병명이 죽 적혀 있었다. "이... 홍... 채?" "음, 그래. 이름이 독특하지? 남자 앤데 내가 담당하기가 좀 그래서 말야..." "잠깐만요, 수면제 투여량이 너무 심한데요?" 과장은 내 말을 듣자 헛기침을 했다. "음, 그게 말야... 잠을 안 자." 내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과장은 비로소 털어놓았다. "사실이네, 잠을 전혀 자지 않아. 수면제를 투여해도 신경기능만이 마비된 채 뇌는 계속 활동해. 꿈을 꾸는지 알 수는 없네만... 하여튼 한번 봐주게. 아동심리학을 전공했던 의사들을 찾아보니 자네밖에 없더군. 부탁하네." 약간 찜찜한 느낌도 들었지만 난 차트를 받아든 채 과장에게 인사하고 나왔다. 잠을 자지 못하는 소년이라... 나는 차트에 나타난 증상들을 조사하며 소년의 병명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가장 들어맞아 보이는 병례는 '심적 충격에 의한 신경파열증' 이었지만 그 경우 소년은 몸이 경직되어야 하는데 차트에 그런 증상은 없었다. 곰곰히 생각하는 사이 어느 새 병리과에 도착한 나에게 동료 의사인 닥터 최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닥터 리, 과장이 부탁한 건가?" "글쎄... 불면증에 걸린 소년같은데..." "어디 좀 봐." 내가 차트를 건네자 닥터 최는 무심코 넘기며 중얼거렸다. "글쎄... 나야 뭐 아동 전공이 아니니 할 말은 없네만 과장이 환자를 이렇게 떠넘긴 걸 보니 쉽진 않겠는걸? 어이구... 수면제량이 왜이리 많아? 거의 환각상태겠구먼.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이네." 그는 차트를 다시 나에게 넘겼다. "수면제 투여량 과다만 아니면 별 의심할 것도 없는 차트야. 증상도 자세하지 않고... 한번 만나봐." "그래야지. 언제 술이나 한잔 할까?" "그러지 뭐. 오늘 자네 바쁘겠구먼... 환자도 늘었으니 말야." 나는 피식 웃으며 책상 위에 가득한 담당 차트들 위에 그것을 얹었다. "정리 좀 하고 살아. 이거야 원..." 최는 웃으며 가운을 걸치고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난 의자에 편히 앉아서 창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왠지 이 평화로운 풍경에 다른 이의 존재가 허락되지 않아서였다. 한우리 정신병원...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지만 맘 좋은 의사들에겐 가히 천국인 셈이다. 경치도 좋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 아홉 시가 넘었지만 병원 주위에 가득 끼인 안개는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몰랐다.. 회진을 마치고 난 후 나는 그 '홍채' 란 소년을 만나서 차트에 적힌 격리병동을 찾았다. 날은 벌써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간호사에게 차트를 보이며 담당이 바뀌었다고 말하자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더 니 한 구석의 병실로 나를 안내했다. 문을 열면서 그녀는 넌지시 나에게 귀뜸했다. "애는 참 착하고 조용하던데 왜 그런 독방에 격리했는지 모르겠어요. 저번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는 들었지만 애를 보면 전혀 난동이나 뭐 그런 거 부릴 거 같지 않거든요? 하여튼 들어가 보세요." 그녀가 문을 열자 분홍빛의 병실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 하나와... 창살 박힌 작은 창을 향해 돌아누워 있는 초췌한 모습의 소년이 있었다. "힘이 전혀 없길래 묶어두지는 않았어요. 식사는 제대로 하는데 약의 투여량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내가 목례를 하자 간호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소년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새 선생님이시네요. 아동심리학을 전공하셨죠? 내가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소년은 끄응 하며 몸을 일으켜 나를 향해 앉았다. 차트에 적힌 17세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으나 체격은 나이에 맞을 정도로 컸다. 매우 갸냘퍼 보이지만 몸을 받히고 있는 팔은 꽤 단단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잠을 못 잔 탓일까? 붉게 충혈된 가는 핏줄들이 눈동자에까지 미친 듯 보이는 불그스름한 두 눈은 신비로운 광채를 내는 듯 했다. "저, 선생님. 앉으시죠?" 소년이 침대 아래에 있던 의자를 꺼내 앞으로 밀자 난 엉거주춤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은 입가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놀라셨나 봐요?" "그래, 좀 놀랐어." "죄송합니다. 제가 저번 선생님께 아동심리학을 전공하실 분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심리학을 아니?" "조금요. 아버지께서 생전에 공부하셨던 책들을 그냥 틈틈이 읽어본 정도에요." "날 왜 보자고 했지?" "글쎄요...? 그 과장 선생님이라면 불러주실 거 같았어요. 그분... 좋은 분이시긴 한데 절 치료할 만큼의 소양은 갖고 계시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이건 아저씨랑 나만 아는 거에요!"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친한 사람에게 말을 건네듯이 행동했다. 자폐증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당황스런 일이었다. 수면제의 과다복용 상태에 있어야 하는 그앤 거의 코마에(*코마-COMA : 의식불명 상태) 가까워야 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내가 잠시 말을 않고 있자 소년은 또 한번 웃었다. "제가 정상으로 보이나요? 하긴... 기대하신 것보다는 양호하겠죠." 거기서 홍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산 너머로 비치는 붉은 노을을 서글픈 듯이 바라보았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고... 아세요?" 그가 문득 물었다. "그래." "전 차라리 그런 거라고 믿고 싶네요. 제가 가진 이성이 억누를 수 있었던 한계를 넘은 걸까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다시 이야기하긴 싫네요. 과장님께 저에 대해 못 들으신 것 같군요. 듣고, 연구 많이 하고 오세요. 피곤합니다." 소년, 아니 그 홍채란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처음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그 방안에서 계속 있기가 뭣 해서 난 그만 병실을 나섰다. 격리병동을 벗어나 병리과에 도착하니 과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최는 벌써 근무를 마치고 쉬러 간 모양인지 자리에 없었다. 내가 들어서자 과장은 묵묵히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내가 자리에 앉아 과장은 물었다. "그래, 홍채를 만나봤나?" "네." "느낌이 어떻던가?" 느낌? 이럴 때 묻는 질문은 '증세'가 아닌가? 내가 당황하자 과장은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허나... 난 솔직히 이용당한 기분일세. 그 애가 내 맘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단 말야.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과장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뿌연 연기를 훅 내뿜고서야 과장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아인 다른 병원에서 후송되어 왔었지. 원래는 대학의 종합병원에 있었는데 거기서 그 아이를 맡기가 버거웠던 모양이더군. 후에 홍채의 말을 들어 안 이야기네만 그곳에서 같은 병실의 누군가를 목 졸라 죽일 뻔했다고 했어. 그곳에서 우리에게 인계할 때 첨부된 차트엔 분명 없었던 것이었네. 그애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른다고 하더군. 후에 그 병원의 간호사가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던 모양이야." 과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 병원의 격리병동에서조차 그 애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고 하네. 아주 작은 기계음이나 자동차 소리에도 발작 증세를 일으켜서...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밀실이라 해도 소음까진 막을 수 없으니 말야. 처음 실려온 그애의 손은 멍이 들어 있었어. 온 사지가 묶인 채 기절해 있었지..." 과장은 다시 한 모금을 빨았다. "그 애는... 절대 자지 않아. 자는 걸 두려워하는 모양일세. 어떤 강박관념이 강렬하게 의식세포들을 지배하고 있어 보이네만 자세한 것은 모르네. 나에겐 털어놓지 않더군. 아마 저번 병원에서의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나... 알 수가 없었네, 그 애가 입을 열지 않아. 그 애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날 쳐다볼 때마다 난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느꼈네. 다른 환자에게서 느껴지는 마음의 벽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야. 그러면서도 어느 새 그 애의 의식 속에 갇혀버린 채 병실을 나오게 되지. 솔직히-" 과장은 말을 잠시 멈추고 담배를 비벼 껐다. "... 버겁네." 과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구겨진 가운을 쓸어내렸다. "제발... 그 애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네. 그 애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난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과장은 나갔다. 난 담배연기로 자욱한 공기를 바꾸기 위해 창을 열었다. 깊은 숲 속에서 흐르는 찬 공기가 나의 폐를 찔러왔다. 깊고 검은 숲이 문득 무서워졌다. 다음 날은 조금 일찍 그에게 들렀다. 홍채는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간호사가 말했다. "수면제량을 줄여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자지 못하는 애에게 계속 수면제를 투여하니 말입니다." 난 간호사가 왜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긍은 갔다. 간호원도 그동안 차트를 보아왔을 테고, 역시 그 과다한 수면제 투여량은 의심이 갔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번에 진단해 보고 처방을 다시 쓰도록 하지요." 간호사는 묵례를 하며 가버리고 난 심호흡을 하고선 열쇠로 문을 따고 병실로 들어갔다. "아, 선생님. 일찍 오셨군요. 역시 과장님 부탁의 환자라 신경이 많이 쓰이시나 봐요?" 홍채는 무스스 일어나 힘없이 미소지었다. "아니다. 어젠 늦게 왔잖니... 기분은 어때?" "기분이라... 언제나 그렇듯 편안해요. 단지..." "단지...?" "좀 무서울 뿐이죠." "뭐가 무섭지?" "저요. 제가 제일 무서워요." 아주 솔직한 대답이다. 지극한 솔직함- '보통'사람들에게서도 찾기 힘든 성숙한 자아단계. "너의 어디가 무섭다는 거니?" "날 놓칠까봐서요. 날 놓는 게... 너무 두려워요." 이 애... 너무 솔직하다. 뭔가 이상하다. 분명 거짓말은 아닌데... 홍채는 담담하게 계속 이야기했다. "아마 이야기는 대충 들으셨을 겁니다. 그 과장 아저씨... 그래도 꽤 착한 분이셨으니까 대충 말씀을 드릴거라 생각했어요. 저에게 이용당했다고 말씀하시진 않던가요? 그런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 과장님,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콤플렉스 같아요. 자기 방어에 서툰 사람, 선생님도 그래요?" 장난스레 말하는 와중에서도 홍채의 눈은 매우 조심스럽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반응을 기다리는 건가? "내가... 놀라길 바라니?" 홍채는 씨익 웃었다. 긍정인가? "아닌가? 헤..." 홍채는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럭저럭 자기 방어는 잘 하시는 분인 거 같네요. 솔직함으로 자기를 방어하는 게 가장 좋은 수단인데, 그쵸? 왠지... 선생님 좋아질 것 같네요." 그때 내 삐삐가 울렸다. 순간 홍채는 얼굴을 매우 찡그렸다. "제발 좀 꺼주세요. 기계음 따위... 정말 싫어합니다." 난 버튼을 눌러 번호를 확인했다. "어디에요?" "으응... 응급실이다. 누가 발작을 일으켰나 봐." "그럼 다음에 뵙죠. 선생님, 내일두 오세요." 말하고 있는 홍채는... 어딘가 매우 아퍼 보였다. 시트를 손으로 꽉 잡은 손에 핏줄이 서 있었다. "아프니? 기계음 때문에?" 홍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른 사람 부르거나 하면 흥분해서 더 심해져요. 발작... 같은 거 절대 안 할거야. 정 걱정되면 나가실때 간호사님께 말씀드리세요." "그래, 내일 보자." 난 급히 병실 문을 닫고 나왔다. 나오다가 걱정이 되어 병실을 다시 들여다보니 홍채는 숨을 헐떡이며 침대 난간을 붙잡고 있었다. 온갖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나오며 간호원에게 주의를 주고 난 후 나는 곧장 응급실로 달려갔다. 닥터 최와 레지던트 몇 명이 늙은 노인네의 가슴에 전기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발작에 의한 심장마비입니다." "심폐소생술은?" "이미 시도했습니다." 나는 노인의 데이터를 보고서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소생하기엔 노인의 심장이 너무 늙어 있었다. 난 전기 충격기에 들썩이는 갸냘픈 노인의 몸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노인..." 닥터 최가 담담히 말했다. "버려진 모양이야. 거리를 떠돌다 노인 복지회에서 정신 이상으로 판명이 났지. 단순한 치매가 아니고... 종종 발작 증세를 보인 모양이더군." "자네... 환자였나 보지?" "그렇지... 내가 심폐 소생술을 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텐데 싶어. 응급팀은 그 순간에 모두 어딜 있었는지..." "오늘 술이나 한잔 할까?" 닥터 최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휴... 이제 오후 회진 돌아야지?" "그래. 아, 걔는 어떤가?" "누구?" "그 소년 말일세, 과장이 부탁했던..." "아, 홍채 말이로군." "그래, 만나는 봤나?" 난 고개를 끄덕였고 닥터 최는 다시 물었다. "그래, 어떻던가?" "아직 잘은 모르겠어. 상당히 영리하고 심리상태도 매우 안정적이야. 뭔가를 물으면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서 겁도 나고 그런다네." "훗, 글쎄... 너무 안정적인 것도 병일테지. 안 그런가?" "글쎄... 하여튼 좀 더 이야기해 봐야겠어." "그래, 계속 수고하게." 최는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남은 오후 회진을 위해 일어섰다. 병리과를 나가는 최를 보며 난 무안하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자연사가 대부분인 정신병원에서 발작에 의한 죽음은 흔치 않았다. 뭐, 영 없다는 건 아니고 실제로 정신병원엔 죽은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그 노인은... 양로원에서 눈만 감고 있었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터였다. 정신병이란 것은 사실 주관적인 거니까- 실제로, 노인들의 대부분의 정신병은 '치매' 란 증상으로 대체되어 눈감아지고 있는 셈이다. 치매와 정신병이라... 정말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치매는 치료를 포기해도 되는 흔한 '증상' 이고 정신병은 꾸준히 치료해야 하는 '마음의 병' 인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여튼 그 노인... 닥터 최가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일을 마치고 병원 기숙사에서 난 최의 방을 찾았다. 물론 소주 몇 병과 안주거리를 사 든채- 내가 벨을 누르자 부스스한 모습의 닥터 최가 문을 열었다. "아니, 자고 있었다면 그냥 가겠네." "아니아니..." 나의 말에 최는 과민반응이다 싶을 정도로 놀라며 내 손을 잡았다. "닥터 리 기다리다가 깜박 졸았지 뭔가, 어서 들어오게." 난 최의 방을 끌려가다시피 들어갔다. 약간 술냄새가 나는 걸 보니 벌써 한잔 한 것 같았다. 맥주 캔 몇개가 식탁 위에 뒹굴고 있었다. "소주군, 잘 됐네. 맥주는 도무지 취해야지 원... 잠시만 기다리게." 최가 잔을 준비해 오는 동안 난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언제나 그의 방은 남자 혼자 산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내가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사이 최가 자그마한 유리컵을 가져왔다. "언제나 깨끗해, 자네 방은." "닥터 리의 방이 지저분한 거 아닌가? 허허..." 나는 말없이 그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최도 나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최가 먼저 소주를 삼켰다. 난 반잔 정도만 마시고는 다시 그의 잔에 소주를 부었다. 그 모습을 본 최가 피식 웃었다. "자네, 정말로 술 안 마시나?" "그렇다네." "... 왜지?" "글쎄... 이 알코올 앞에서 날 놓아버리기가 무서워서... 인가?" "자네야말로 정신 병원에 어울리는 사람일세. 그렇게 냉정하게 자신을 추스릴 줄 아니..." 최는 또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글쎄... 내가 그런가?" "그래. 자넨 술 친구로는 별로야. 말짱하게 있는 친구에게 술 취해 무언가를 털어놓는다는 건... 조금은 부끄럽네." 최는 혼자서 웃으며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 노인...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네?" "그래, 자네는 눈치챘을 거라 생각했지. 자네 추측이 뭔지 맞춰볼까? 분명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닮았을거라 느꼈겠지. 안 그런가?" 난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또 술을 삼켰다. 그의 얼굴은 달아오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넨... 참 잔인한 데가 있어. 안 그런가?" "그럴 지도... 모르지." 최는 피식 웃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라. 그건 긍정이야. 알곤 있지?" 또다시 한 잔. "그런가..." 난 남은 반 잔을 비웠다. 뜨거운 알코올이 몸을 나른하게 하는 것 같아 싫었다. "그 노인네... 이야기도 참 많았는데... 절대 치매는 아니었지. 물론 정신병도 아니었고." 그는 또다시 잔을 비워냈고 난 묵묵히 그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단지... 가슴 어딘가에서 튀어나오는 충격이 있었을 뿐이네. 하하... 재미있지 않나?" "가슴 어딘가에서 튀어나오는 충격이라... 상처입은 심장의 고통이 나타나는지도 모르겠군." "글쎄... 내가 그 고통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으니 모르지." 최는 병에 남아 있는 소주 전부를 잔에 털어넣었다. "자넨 그 충격을 견뎌낼 자신이 있나? 마음의 고통이 몸 전체로 퍼지는 듯한 충격을 말야." "글쎄... 견뎌낸다면 어떨까?" 최는 잔을 들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긴 뭘 어때, 미쳐버리는 거지." 쓰러져버린 최를 뉘어둔 채 나는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벌써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문을 잡고 난 후 난 항상 두어 번 호흡을 했다. 아무도 없는 내 밀실에 들어가는 순간은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깜깜한 벽을 더듬어 불을 켠 후 난 책상으로 가 앉았다. 너저분하게 흩어진 의학 서적들이 편안하다. 그들은 오늘 하루종일 나만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어제 공부하다 만 노트를 펴면서 난 홍채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럭저럭 자기 방어는 잘 하시는 분인 거 같네요, 그쵸?' 문득, 그가 이미 내 마음을 엿보았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앤 처음 만나는 나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는걸까 하며 난 기분이 나빠졌다. 이제 이곳은 내 밀실이 아니었다. 홍채가 여기 함께 있었다. "우스운 생각이지만, 넌 여기 있을 애는 아닌 것 같다." 나의 말에 홍채는 웃었다. "뭐라구요? 그걸 어떻게 알죠?" "넌 '결핍' 이 아니라 '과다' 한 것에 속해. 그건 치료할 수 있는 성질의 정신병이 아냐. 너 스스로의 심리적인 문제지." 홍채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선생님께서 저에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저에 대해 많이 생각하신 모양이군요. 좋아요, 그럼 묻죠. 제가 왜 여기 있죠?" "네가 전 병원에서 발작을 일으켜서 조용한 이 곳으로 후송되었다고 들었어." "이전엔요?" 홍채가 묻자 난 할 말을 잃었다. 그래... 그의 차트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신상 명세와 진단기록 외엔... 홍채는 그 붉은 눈으로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은 피... 좋아하세요?"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 앤 날카롭게 외쳤다. "아냐!" 눈을 부릅뜬 홍채는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순간, 난 그 애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음을 직감했다. 온 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난 간호사를 부르며 그 앨 진정시키려 했다. 홍채는 내가 팔을 잡자 거세게 날 뿌리쳤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곧 간호사가 달려오더니 커다란 주사를 그에게 놓았다. "뭐지?" 내가 묻자 간호사가 대답했다. "바륨 0.8밀리그램입니다.(*바륨- 수면제의 일종) 발작시 과장님이 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곧 홍채는 힘이 풀리더니 쓰러졌다. 그러나 눈은 절대 감지 않았다. 붉은 빛의 눈알이 번득이며 바륨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 이유야."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거기엔 과장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자, 이것 좀 마시게." "감사합니다." 과장과 난 병동 휴게실에 있었다. 홍채를 진정시킨 후 할 말이 있다며 과장이 데리고 온 것이다. "직접 보니 어떤가?" "예... 솔직히 놀랍군요. 그 치사량에 가까운 바륨을 맞고도 버티다니..." "그래, 그 앤 버티고 있지.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는... 알았나?" "아니오, 단지..." "단지?" "그 애가 자기 이야기를 하더군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아냐고 물었습니다." "어디서...? 그래, 이야기하던가?" "아뇨, 그 이후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그런가..." "혹시 그 애에 대해 더 아는 게 있으십니까?"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가르쳐 줄 순 없네. 그 애가 부탁했어. 자네 스스로 그 애를 통해 알아야만 한다는군." "과장님!" "그래, 환자의 말을 듣는 의사라... 이상하지, 그것도 정신병원에서. 허나 그 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 자네가 그것을 찾게, 그 앨 통해서." 난 화가 난 채 병리과의 내 사무실로 돌아갔다. 과장도 간호사도 미쳐 있는 게 틀림없다! 바륨 0.8밀리그램은 토끼를 영원히 잠들게 할 정도로 과다한 양이었다. 게다가 홍채라는 이놈도 신경계를 통제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의 눈은 절대 자지 않겠다는 듯 부릅뜬 채 바삐 움직었다. REM수면상태(*REM=Rapid Eye Movement, 수면시 뇌파가 각성 상태와 같이 나타나는 기간. 동공이 빠르게 움직이며 흔히 꿈을 꾼다고 알려져 있다)도 아니고... 어느 새 난 또 그 애 생각에 빠져 있었다. 회진을 돌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온통 그 애 생각뿐이었다. 치사량에 가까운 수면제를 버티고, 자기 방어에 능숙한 그 강력한 자기 지배의지는 도데체 뭐지? 나는 결국 회진을 마친 즉시 격리병동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간호사는 면담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수면제가 몸을 마비시키고 있어서 내일 다시 오라는 것이다. 돌아가려다 난 갑자기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 그녀에게 물었다. "잠시만요, 바륨 0.8밀리로 어떻게 하루만에 깨죠?" 간호사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최소 사흘은 수면상태에 있어야 하는데 하루만에 모든 신경을 회복합니다. 근육 일부 조직이 파괴되구요." "근육 일부 조직이요?" 간호사는 찬찬히 설명했다. "사실 수면제 복용과 운동결핍으로 근육 조직이 많이 약해지긴 하지만 저 애처럼 극단적으로 나빠질 리는 없어요. 한번 발작을 일으킨 후의 팔이나 다리 등을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정말 눈에 띄게 마릅니다." "그런데 왜 차트엔 그런 기록이 없죠?" "네?" 간호사는 약간 당황하더니 말을 더듬었다. "없다구요? 담당하시는 과장님께 보고드렸는데..." "지금 그 애의 담당의사는 납니다! 특별한 증상이 발견되면 먼저 나에게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간호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난 그 길로 과장을 만나러 갔다. 마침 과장은 자리에 있었다. "아, 닥터 리. 안 그래도..." "왜 말씀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 애 담당의사는 저 아닙니까?" 나의 과격한 어투에 과장은 잠시 놀란 듯 했다. "자네... 무슨 일 있었나?" "바륨 투여시 발견되는 근육 조직 손실 말입니다." "아... 안 그래도 이야기하려 했네. 나도 얼마 전에 보고받은 걸세." 갑자기 할 말이 없어져버린 나를 보던 과장은 그만 피식 웃었다. "자네...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 아닌가? 자네같이 날카롭고 냉철한 사람이 왜 이리 흥분을 하고..." 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과장은 입가에 웃음을 지운 채 말했다. "그래, 자네한테 좀 더 일찍 말 못한 점 미안하네. 그러나 방금 전의 자네 행동은 경솔했어. 그게 뭔가! 마치 애들처럼..." "죄송합니다." "알면 됐네. 그리고 다음부턴 자네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하지. 내가 그만 잊고 있었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근육 조직의 손실이 일어나는지 아는 게 있나?" 난 공부해 왔던 것들을 되짚어 보았으나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없었다. "... 그런 극단적인 근육의 손실은 처음입니다." "그래..." 과장은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나를 보고 손짓했다. "이만 나가보게." 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과장실을 나왔다. 문득 허탈하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내가 이렇게 흥분했던 이유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멀고 공허한 복도도 허탈했고 가지런히 그어진 색색의 안내선들도 의미없어 보였고 그 위를 걷는 나도 바보같았다. 내 두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갑자기 이게 뭔가.. 싶지? 연습삼아 끄적여본 단편 소설이야. 총 3부로 구성되고.. 임상 심리학과 정신의학쪽에서 쓰는 말들이 조금 등장해. 작년 초까지 모 상담실에서 임상심리 카운슬러로 근무한 적이 있다보니   관심이 많아졌는데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었으면 좋겠어. ^^ 홍채= 근석.. ^^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주위 눈치 안 보고(어쩌면 눈치 없이) MZ식 '직설 화법' 날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9 - -
4434 쳐늦은? 쳐이른? 입갤~ 깍꿍~ [9] 오즉오 07.01.06 146 0
4433 [비타민캡쳐] 368 [2] 싸장 07.01.06 59 0
4432 [비타민캡쳐] 367 [3] 싸장 07.01.06 60 0
4431 앗 이노래는... [4] 소리 07.01.06 83 0
4430 [비타민캡쳐] 366 [3] 싸장 07.01.06 76 0
4429 경험한 바에 의하면 [4] 소리 07.01.06 125 0
4428 [비타민캡쳐] 365 [2] 싸장 07.01.06 62 0
4427 [비타민캡쳐] 364 [3] 싸장 07.01.06 68 0
4426 [비타민캡쳐] 363 [2] 싸장 07.01.06 55 0
4425 [비타민캡쳐] 362 [3] 싸장 07.01.06 100 0
4424 [비타민캡쳐] 361 [2] 싸장 07.01.06 56 0
4423 [비타민캡쳐] 360 [2] 싸장 07.01.06 72 0
4422 [비타민캡쳐] 359 [2] 싸장 07.01.06 70 0
4421 [비타민캡쳐] 358 [4] 싸장 07.01.06 75 0
4420 [비타민캡쳐] 357 [2] 싸장 07.01.06 86 0
4419 [비타민캡쳐] 356 [2] 싸장 07.01.06 55 0
4418 [비타민캡쳐] 355 [2] 싸장 07.01.06 55 0
4417 안뇽 횽아들~ [5] 근석맘 07.01.06 100 0
4416 [비타민캡쳐] 354 [2] 싸장 07.01.06 73 0
4415 [비타민캡쳐] 353 [3] 싸장 07.01.06 60 0
4414 [영상] 한양대 입학식 [4] 근석맘 07.01.06 130 0
4413 [비타민캡쳐] 352 [3] 싸장 07.01.06 101 0
4412 본의아니게 [1] 소리 07.01.06 96 0
4411 [영상] 근석이 [3] 근석맘 07.01.06 202 0
4410 [비타민캡쳐] 351 [2] 싸장 07.01.06 65 0
4409 [비타민캡쳐] 350 [1] 싸장 07.01.06 68 0
4408 [비타민캡쳐] 349 [1] 싸장 07.01.06 57 0
4407 [영상] 도레미파솔라시도 [3] 근석맘 07.01.06 96 0
4406 [비타민캡쳐] 348 [1] 싸장 07.01.06 55 0
4405 [비타민캡쳐] 347 [1] 싸장 07.01.06 62 0
4404 [비타민캡쳐] 346 [1] 싸장 07.01.06 59 0
4403 노래 리스트 [4] 소리 07.01.06 89 0
4402 [비타민캡쳐] 345 [1] 싸장 07.01.06 93 0
4401 [비타민캡쳐] 344 [1] 싸장 07.01.06 51 0
4400 [비타민캡쳐] 343 [1] 싸장 07.01.06 58 0
4399 음악 듣느라 조용한가? [2] 소리 07.01.06 98 0
4398 [비타민캡쳐] 342 [1] 싸장 07.01.06 70 0
4397 [비타민캡쳐] 341 [1] 싸장 07.01.06 48 0
홍채 1 [3] 소리 07.01.06 115 0
4395 [비타민캡쳐] 340 [1] 싸장 07.01.06 55 0
4394 [비타민캡쳐] 339 [1] 싸장 07.01.06 49 0
4393 [비타민캡쳐] 338 [1] 싸장 07.01.06 75 0
4392 [비타민캡쳐] 337 [1] 싸장 07.01.06 58 0
4391 초코바 횽 안냥~ [1] 싸장 07.01.06 75 0
4390 음방 [5] 싸장 07.01.06 81 0
4388 메롱 [3] 근석마누라 07.01.05 81 0
4387 [비타민캡쳐] 336 [4] 싸장 07.01.05 153 0
4386 [비타민캡쳐] 335 [2] 싸장 07.01.05 83 0
4385 [비타민캡쳐] 334 [3] 싸장 07.01.05 88 0
4384 [비타민캡쳐] 333 [3] 싸장 07.01.05 98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