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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상플] 우리 사랑의 조각들 0

편린(125.184) 2019.11.22 00:52:44
조회 1084 추천 2 댓글 1


시경은 숨을 들이쉬었다. 앞에 있는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과 청자켓에 청반바지를 입은 인영이 신기루인가 싶어 발을 뗄 수 조차 없었다.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까봐 겁이났다. 뭐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부를 수 조차없었다. 시경은 그저 사라질까 봐 무서워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움직여 그에게 달려갔다. 아스라듯이 사라질것만 같았던 신기루는 시경을 비웃듯이 생생하게 시경의 품 안에 잡혔다.


말 한마디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시경이 갑작스럽게 끌어안은 탓에 휘청인 여자가 몸을 딱딱히 굳히고선 말했다.


“누구세요!”


꿈에서 바랐던 목소리였다. 추모 영상에서나마 들을 수 있었던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시경의 귀에 들려왔다. 시경은 그제야 재신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 여자를 돌려세웠다. 품 안에 꼭 맞게 들어오는 덩치, 익숙한 향, 모든 것이 재신이었다. 그리고서 시경이 마주한 얼굴은 사랑해서 시경을 절망하게 만든 재신이었다.


“공주님.”


재신의 얼굴을 보자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계속 ‘공주님’이라고 부르며 시경은 울 뿐이었다. 재신은 얼떨떨했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은 채 산속에서 태어나듯이 눈을 뜬 재신은 불안함과 무서운 것 투성이였는데 갑작스레 나타난 시경이 재신을 붙잡고 눈물 흘리고 있자 재신의 마음마저 찌르르 아파졌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위로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재신은 손을 들어 시경의 얼굴을 쓰다듬어줬다. 재신의 손을 그러잡으며 시경은 재신에게 목맨 소리로 물었다.


“정말 공주님이십니까.”


재신은 어떤 대답을 해야할 지 몰랐다. 앞에 있는 시경이 찾는 이가 자신인지, 타인인지 재신도 몰랐다.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고 적막한 탓에 헤멜 뿐이었다. 아무 기억도 없는 재신에게 시경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재신이 답하지 않자 시경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것도 아니라면 꿈입니까.”


시경의 말에 재신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답했다.

시경을 꿈에서 깨어나게 해야 했다.

재신은 시경이 찾는 이가 아닐 터였다.


“글쎄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깐요”


추억과도 같은 재신의 목소리와 말투는 모두 재신이라고 시경에게 말하지만, 시경도 재신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재신이 죽을 때 가족에게만 공개되는 마지막을 재하의 배려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피하려고 해도 마지막으로 편안하게 눈감은 재신의 닫힌 얼굴이 생생하니 기억이 났다. 하지만 눈앞에있는 이는 재신이었다. 안면도의 그때와 똑같은 옷차림을 한 재신이었다. 


통제된 안면도의 섬에는 출입이 허가되지 않는 이는 들어올수없었다. 분명 재신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재신이 아닌 것도 맞았다.  시경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시경은 재신의 손을 꽉 잡았다. 재신이 아픈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손 좀....”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조금 전까지 애절하게 ‘공주님’이라고 불렀던 사람과 달리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재신의 손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뭘요? 아이참, 이것 좀 놔요.”

“여긴 출입이 통제된 곳입니다.”

“나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재신도 슬슬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것은 재신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재신이 묻고 싶었다. 여긴 어디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운 것은 재신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재신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생각해도 텅 빈 기억 탓에 재신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들어오지 말아야 하는 곳이면 내보내 줘요.”

“어디로 가시게요. 가실 곳이라도 있습니까.”

“몰라요. 나도. 경찰서라도 가면 뭐가 나오겠죠.”


재신의 말에 시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재신이 아닐까 싶어 얼굴을 찬찬히 뜯어봐도 재신이었다. 설령 재신이 아니라고 해도 시경은 앞에 있는 이를 놔줄 수가 없었다. 죽음을 항상 고민하던 시경이었다. 호위용으로 받은 총구를 스스로 들이밀고 싶었던 시경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뭘요?”

“뭐든지요. 돌아가야 한다면 그것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시경의 말에 재신은 의심스럽게 시경을 보며 말했다. 아직도 붙잡힌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시경이었다.


“제가 그쪽을 어떻게 믿어요? 뭘 보고요? 지금 제일 위험한 사람은 그 쪽같은데.”


시경은 가슴팍에 있는 신분증을 꺼내서 재신을 보여줬다. 제2중대 근위대장 은시경이라고 적혀있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제가 경찰보다 더 잘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어떤 방법이든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기억도 없다면 갈 곳도 도움을 청할 마땅한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시경의 말이 맞았다. 시경이 보이기까지 재신은 이곳을 헤맸지만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곳에 외딴집이 있었지만, 재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낯선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절절하게 부르는 ‘공주님’이라는 호칭이 이해가 갔다. 근위대이니 그럴 수 있다고 납득을 한 재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경에게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손 좀 놔줘요.”


시경은 재신의 말에 마지못해 손을 놔주었다. 하지만 한 걸음 다가가서 재신의 옆에 섰다. 눈을 뗄 수 조차 없었다. 이 앞에 있는 이는 정말 재신이 맞았다. 움직이고 따스하고 톡톡 튀는 재신이 맞았다. 재신에게 이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서로의 사이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공주님이 저에게 고백하셨습니다. 한번 입 맞췄습니다. 

그리고... 


해줄 말이 없었다. 정말 그것이 다였으니깐.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에 서로가 사랑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사무치고도 너무 사무치는 이 감정을 재신이 알아줄까.


죽음을 선택하던 재신에게 시경은 있었을까. 시경은 무서워서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었다. 


“차에 타세요.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어, 뭐라고 부르죠? 은...”


재신의 말에 시경은 재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은시경씨.”


재신의 말에 시경은 가슴이 아팠다. 재신의 말은 그토록 시경이 듣고 싶은 말이었으나 재신의 눈에 비친 시경은 낯 선이였다. 사랑이 담기지 않는 재신의 눈은 낯설어서 무서웠다. 이것이 마치 거짓이라고 네 착각일 뿐이라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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